▲아무도 없는 곳. ⓒ엣나인필름
▲아무도 없는 곳. ⓒ엣나인필름

- 극장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이 담긴 영화

[SR(에스알)타임스 심우진 기자] 제 20회 전주국제영화제 전주시네마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영화 ’아무도 없는 곳’(제작/배급: 볼미디어/엣나인필름)은 ‘더 테이블’(2016), ‘페르소나’(2019) 등을 통해 섬세한 연출을 선보인 김종관 감독의 작품이다.

김종관 감독은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인 ‘Shades of the Heart(마음의 음영)’이 말해주듯 빛과 소리라는 영화적 장치를 작품 안에 심어 넣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관객이 극장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이 담긴 실험적 옴니버스 영화를 완성했다. 

(이 리뷰에는 영화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 ⓒ엣나인필름
▲아무도 없는 곳. ⓒ엣나인필름

◆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여자

지하상가 커피숍 유리 벽에 기댄 채 잠들었던 ‘미영’(이지은)이 눈을 뜬다. 그녀는 90년대의 어디쯤에선가 멈춰버린 듯한 이 오래된 가게와는 어울리지 않는 젊고 앳된 모습이다.

미영은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창석’(연우진)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화장을 고치며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린다. 창석도 멋쩍게 첫인사를 하며 웃는다.

창석에게 나이 먹는 게 무섭지 않냐고 혼잣말하듯 물어보고는 주위를 둘러보는 미영. 그녀는 창석이 소설책을 읽는다고 하자 지어낸 가짜 이야기 믿는 걸 이해할 수 없다며 시답잖다는 듯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잘 만든 이야기는 사람이 믿게 돼 있어요”

창석의 대답과 함께 시작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미영은 어느새 거슬러 올라갔던 시간의 계단 위에서 꿈꾸듯 내려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울 속 허상 같은 현실로 되돌아온다.

▲아무도 없는 곳. ⓒ엣나인필름
▲아무도 없는 곳. ⓒ엣나인필름

◆ 담배 태우는 여자

출판사 편집자인 ‘유진’(윤혜리)은 창석이 자기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해주는 건 여전하다며 미소 짓는다. 하지만 그녀는 창석과 달리 남이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유진은 소설을 통해 창석의 삶을 알게 된 기분이 들었다고 말한다. 창석은 자신이 겪은 일이기에 지어낸 이야기는 없지만, 관점이 존재하기에 소설이 됐다고 설명해준다.

소설 속 주인공은 죽기 때문에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말하자 창석은 지어낸 것이 더 솔직할 때가 많다고 답한다. 이야기를 나누며 공원을 거닐던 창석은 유진과 함께 죽어가는 새를 바라본다.

창석의 소설을 ‘재미있다’ 하지는 않지만 ‘좋아한다’고 말하는 유진. 그녀는 인도네시아산 담배를 태우며 헤어진 남자친구 이야기를 꺼낸다. 그녀의 고백은 어스름하게 내린 어둠 속으로 담배 연기처럼 스며든다.

▲아무도 없는 곳. ⓒ엣나인필름
▲아무도 없는 곳. ⓒ엣나인필름

◆ 기적을 믿는 남자

카페에서 글을 쓰던 창석은 불현듯 나타난 사진가 ‘성하’(김상호)를 반갑게 맞이한다. 창석이 그간의 안부를 물어보자 성하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조금씩 하락선을 타고 있다며 덤덤하게 답한다.

사진가가 아닌 시인처럼 말하던 성하는 이 우연한 만남보다 더 신기한 일이 있다면서 창석 앞에 하얀색 작은 병을 내민다. 그것은 암에 걸린 아내에게서 희망이 사라져갈 때 그가 먹기 위해 구한 청산가리가 담긴 병이었다. 성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창석의 표정은 굳어진다.

아내를 살려보고자 절망의 끝에서 새로운 희망에 매달리게 된 성하. 그는 어느 스님이 준 물을 아내에게 발라주자 의식이 돌아왔다며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연신 웃음을 멈추지 않는 성하는 기적을 믿고 있었다.

걸려온 전화를 받기 위해 성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창석은 손을 뻗어 하얀 병을 손에 쥔다.

▲아무도 없는 곳. ⓒ엣나인필름
▲아무도 없는 곳. ⓒ엣나인필름

◆ 기억을 모으는 여자

바텐더 ‘주은’(이주영)은 마지막 출근 날이라며 창석에게 서비스 잔을 건넨다. 시를 쓰며 마음에 담긴 것을 풀어간다는 그녀는 오토바이 사고로 기억을 잃었다. 주은이 보여주는 흉터를 창석은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술이 없는 술병처럼 텅 비어 버린 기억을 사서라도 채워 넣고 싶어 하는 주은. 그녀는 창석의 기억을 사고 싶다고 말하자 창석은 슬픈 기억은 팔기 싫다고 답한다. 만들어진 이야기일지도 모를 창석의 기억은 그렇게 술 한잔 가격이 매겨져 주은에게 팔린다.

주은은 기다린다는 말로 기다리는 사람이 된 창석을 보며 웃는다.

▲아무도 없는 곳. ⓒ엣나인필름
▲아무도 없는 곳. ⓒ엣나인필름

◆ 아무도 없는 곳에 있는 남자

영국에서 7년의 세월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온 창석. 그는 전과는 다른 길을 거닐 때도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버스를 탈 때도 혼자다.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을 만나지만 접점이 끊기는 순간부터 고독에 휩싸여 웅크린 채 지낸다. 문득 한밤중에 눈을 뜬 창석은 하얀 병을 바라본다.

창석은 아무도 없는 어두운 길을 계속 지나 공중전화 수화기를 든다. 아내의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그곳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내 두 사람의 상실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음을 깨닫는다. 어쩌면 그의 오열은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에 대한 죄의식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내와 함께 늙어 같이 사라지고 싶었던 창석의 꿈은 미영의 망각, 유진의 아이, 성하의 아내, 주은의 기억처럼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은 엄마와 두 노인의 뒷모습은 코다(Coda) 없는 다 카포(Da capo)가 되어 영화를 시작점으로 되돌린다.

▲김종관 감독과 배우 이주영, 윤혜리, 연우진(사진 왼쪽부터).
▲김종관 감독과 배우 이주영, 윤혜리, 연우진(사진 왼쪽부터).

◆ 김종관 감독이 들려주는 어둠의 이야기

상업영화 ‘조제’(2020)에 이어 김종관 감독이 들려주는 이 이야기에는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젊음과 늙음, 기억과 망각이 다른 시간 속 같은 공간 안에서 공존한다. 그래서인지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지만 ‘인셉션’(2010)과 부분적으로 닮았다는 느낌도 든다.

여기에 잠재의식을 자극하는 서브리미널 효과의 음악,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느린 호흡으로 이어지는 장면들, 여백이 짙은 인물 간 문답식 대화 등 김종관 감독만의 연출력이 더해져 영화는 몽환적 깊이를 더한다.

김종관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한 영화를 많이 만들어왔다. 형식적인 실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이 이야기를 구상하게 됐다”며, “한 인물이 여러 인물을 만나면서 심적인 변화를 겪는 이야기다. 영화라는 언어를 이용해 어떤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고 어둠의 영역을 잘 관찰해서 이야기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영화 안에서 여러 층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꿈도 현실도 아닌 경계에서 창작에 대한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해보고 싶었다”며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시도했던 부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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