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파더. ⓒ판씨네마
▲더 파더. ⓒ판씨네마

- 디멘시아로 내면의 소실을 겪는 인간의 모습 담은 수작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좋은 황소를 제물로 바치지 않은 크레타 왕 미노스에게 저주를 내린다. 그 저주로 왕비 파시파에는 종을 뛰어넘어 황소를 사랑하게 되고 소머리를 가진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는다.

미노스는 그렇게 태어난 미노타우로스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미궁 라비린토스를 만들어 그 안에 가둔다.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 속에 던져진 사람들은 미노타우로스의 먹잇감이 된다.

플로리안 젤러 감독의 영화 ‘더 파더’(수입/배급: 판씨네마)는 라비린토스 같은 기억의 미궁에 갇혀 디멘시아에 시달리는 아버지와 이를 지켜보며 그 곁에서 고뇌하는 딸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이 리뷰에는 영화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딸 ‘앤’(올리비아 콜맨)을 '안소니'(안소니 홉킨스)는 의아스레 바라본다.

부리나케 달려온 딸이 호들갑을 떨며 자기 이야기는 하나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 태도가 그는 내심 못마땅하다. 딸에게 별일 아니라고 항변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저 손목시계를 훔쳐 간 간병인에게 한소리 했을 뿐인데 말이다.

▲더 파더. ⓒ판씨네마
▲더 파더. ⓒ판씨네마

“욕조 밑은 보셨나요?”

앤이 물어보자 안소니는 이젠 딸까지 의심의 눈초리로 대한다. 잠시 뒤 그는 휘파람을 불며 욕실 문을 열고 나온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의 손목에는 어느새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무심히 소파에 앉아 TV 보는 아버지를 앤은 안쓰럽게 바라본다. 연락이 뜸해진 여동생의 안부를 물어보는 안소니에게 앤은 연인이 있는 파리로 이사하겠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딸이 곁을 떠난다고 말하자 가라앉는 배 취급하냐며 역정을 내는 안소니. 그는 딸이 자신을 버리려 한다고 여긴다.

런던 거리의 백색 소음에 휘감긴 공간과 시간은 안소니의 기억과 함께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뒤엉킨다. 그는 갑자기 자신만의 공간이라 여겼던 아파트를 낯선 이에게 침범당한다.

거실 의자에 앉아있는 ‘폴’(마크 게티스)이라는 저 사내는 정말 사위가 맞는 걸까. 분명 파리로 떠난다고 말했던 앤이 벌써 결혼한 건가. 안소니는 큰 혼란에 빠진다.

더구나 폴은 안소니가 자신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거라며 아파트 소유권까지 주장한다. 졸지에 집을 빼앗긴 안소니는 불같이 화를 낸다. 시계를 도둑맞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마침 외출했다 막 돌아온 딸에게 따져 물으려 한다. 하지만 검은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온 앤은 난생처음 보는 사람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더 파더. ⓒ판씨네마
▲더 파더. ⓒ판씨네마

◆ 기억의 미궁에 갇힌 인간을 그린 심리 스릴러

이 영화에서 시간은 전도되어 정방향과 역방향을 오간다. 이 복잡하게 얽혀버린 기억의 흐름은 주로 안소니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기억의 파편화가 점점 심해질수록 안소니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 미궁에 갇힌 양상을 띤다. 그의 내면을 구성하는 기억이 차츰 소실되면서 이어지는 혼란의 심화는 드라마와 심리 스릴러의 사이를 오가는 이 영화의 극적 긴장감을 높인다.

안소니는 테세우스처럼 미궁을 빠져나갈 실을 갖고 있지 못했다. 기억의 미궁에 빠진 그는 탭 댄서가 돼 춤을 추며 즐거워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앤은 매 순간 상처받는다. 하지만 안소니는 자신을 향한 연민으로 삶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딸의 마음이 점점 멍들어가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앤의 가슴은 제자리를 찾지 못해 굴러떨어진 컵처럼 부서질 것만 같다. 날카로운 귀울림 속에서 숨죽여 눈물을 닦던 그녀의 눈에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의 곤히 잠든 모습이 들어온다. 그 순간 애증의 양가감정이 그녀의 의식 안쪽을 파고든다.

▲더 파더. ⓒ판씨네마
▲더 파더. ⓒ판씨네마

정밀한 실내극 모양새를 갖춘 이 영화는 인물이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때마다 전혀 다른 기억으로 이루어진 차원 안에 갇히는 연출을 보여준다. 인물의 고뇌와 미세한 감정 변화를 그대로 클로즈업해 객석에 앉아 연극을 지켜보는 듯한 현장감도 느끼게 한다.

낯선 기억의 방안에서 커튼을 열고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안소니. 소년처럼 뛰어놀고 싶었던 그는 울음을 터트린다. 엄마의 품이 사무치게 그리워진 그는 그렇게 아이가 된다.

이제 안소니가 머무는 곳에는 더 이상 손목시계도 검은색 문도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그의 기억이 미궁을 빠져나와 현실에 도착하지 못했지만, 숲이 곧 그를 반길 것이다.

플로리안 젤러 감독이 자신의 동명 연극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제93회 아카데미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색상, 미술상, 편집상 후보에 올랐다.

▲더 파더. ⓒ판씨네마
▲더 파더. ⓒ판씨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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