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자산어보.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 ‘허구’ 통해 ‘진실’에 도전하는 이준익 감독 영화

[SR(에스알)타임스 심우진 기자] 1801년, 정조의 뒤를 이어 아들 순조가 불과 11세의 나이로 조선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한다. 이와 함께 정순왕후 김 씨의 수렴청정이 시작된다. 이때 노론 세력은 남인들에 대한 숙청작업의 일환으로 사학(邪學), 즉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 박해를 시작한다.

이 피비린내 나는 ‘신유박해’의 광풍은 남인계 학자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를 비껴가지 않는다. 끝까지 배교하지 않은 정약종은 같은 해 결국 순교하고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된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제작/배급: 씨네월드/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는 신유박해 시기 흑산도로 유배된 학자 ‘정약전’(설경구)과 청년 어부 ‘창대’(변요한)의 만남을 통해 주자의 성리학이 지배하던 19세기 초 조선 시대 지식인의 고뇌를 담는다.

▲자산어보.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자산어보.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이 리뷰는 영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자는 참 힘이 세구나”

로마 교황청이 ‘조상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효가 근본인 성리학을 버리지 못하고 배교했던 정약전이 들었던 말이다. 이젠 정약전이 이 말을 그대로 흑산도 토박이 어부 창대에게 내뱉는다.

창대는 정약전을 두고 400년을 이어온 주자의 나라에서 제사도 모시지 않는 ‘사학죄인’이라 칭하며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다. 정약전은 젊은 청년의 꾸짖음에 답답해진 속마음을 술로 달랜다.

▲자산어보.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자산어보.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 서로에게 스승이자 제자가 된 ‘정약용’과 ‘창대’

서자 출신인 창대는 글공부를 좋아한다. 그에게는 책 안에 담긴 성리학의 지혜가 곧 세상의 모든 진리였다. 창대가 뭍에서 온 새 책을 기쁘게 반기는 까닭은 학문만이 그를 바깥세상으로 인도할 유일한 발판이 돼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승 없는 창대의 독학에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 양반과 상놈 구분이 없고 임금도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꾸는 개혁가 정약전은 호기심 많은 학자였다. 조선 땅 끝 흑산도로 내쳐진 뒤 사물 공부 재미에 깊이 빠져버린 그는 평생 바다에서 물질하며 살아온 어부 창대가 가진 해박한 물고기 지식을 내심 탐낸다.

첫 만남부터 티격태격했던 두 사람이지만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지자 서로의 지식을 맞교환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천주학쟁이 역적 정약전을 스승으로 인정하기 싫었던 창대는 이 껄끄러운 지식 교환이 ‘거래’임을 애써 강조한다. 하지만 이내 정약전이 뿜어내는 당대 최고 지식인다운 학문적 소양의 지적 매력과 인품에 감화되면서 곧바로 머리를 조아리고 그를 스승으로 모신다.

정약전 또한 지금까지 평생 공부해온 학문의 실용성이 외진 섬마을 어부가 물고기를 아는 만큼의 지식에도 미치지 못함을 깨닫는다. 그는 애매한 관념 철학에 벗어나 객관적 세계에 대한 관찰과 견문을 근간으로 해양생물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자산어보’의 집필을 시작한다. 그렇게 정약전과 창대는 서로에게 스승과 제자인 동시에 학문연구 동료 관계를 유지한다.

▲자산어보.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자산어보.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 가치관 충돌...대립하는 두 사람  

창대가 출세에 뜻을 둔 이유는 자신의 신분 상승과 딸린 식솔들의 윤택한 삶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임금을 보필하는 관직에 올라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를 몰아내고 청백리가 되어 백성을 돌보고자 한다.   

정약전의 제자로서 날로 학식이 높아져 가는 창대는 자신이 꿈꾸는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점차 큰 날갯짓 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스승 정약전과 제자 창대간 사상적 이견의 골은 깊어져 간다.

▲자산어보.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자산어보.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이준익 감독은 앞서 흑백 영화로 제작한 ‘동주’(2016)에서 일제 강점기 말 전체주의 앞에서 변절하지 않은 윤동주와 송몽규 두 지식인의 저항 의식을 무거운 시선으로 그려냈다.

이번 ‘자산어보’에서 이준익 감독은 조선 시대 지식인 정약전을 비운의 사상가로 묘사한다. 영화 속 정약전은 동양 전통 사상과 서학 사이를 넘나드는 방대한 지식을 겸비한 인물로 서양 지식과 문물을 수용하고 군주제와 신분제 폐지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멸문지화 당할 것이 뻔한 내용의 책은 차마 쓸 수 없어 ‘자산어보’, ‘표해시말’ 같은 저서만 남겼다는 것이다.

성리학에 대한 아집을 가진 창대가 스승의 사상을 매섭게 비판하고 ‘목민심서’의 길을 택한 후 훗날 목도하게 되는 것은 결국 주자가 지배하는 조선의 참담한 현실이었다.

▲자산어보.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자산어보.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 '사극 장인' 이준익 감독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 제작과 관련해 “창대라는 인물과 관련된 배경 설정은 창작이며, 조선시대 영화를 흑백으로 볼 기회가 많지 않을 것 같아 흑백 영화를 고집했다”고 밝혔다.

그는 “창작자는 허구를 통해서 진실성에 도전한다”며, “근거를 가지고 합당한 허구를 붙였느냐 아니면 날조를 했느냐에 따라 개봉 후 자기 자리를 찾거나 또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자산어보’는 개봉 후 10년 뒤 자기 자리를 찾는 영화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한, 흑백 영화 ‘동주’와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동주’는 어둠을 깊이 있게 다루려 했고 ‘자산어보’는 어둠보다 밝음이, 흑보다는 백이 더 많이 차지한다”고 설명했다.

▲자산어보.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자산어보.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부분적인 컬러 장면 연출 의도에 대해서 이 감독은 “파랑새는 창대의 희망을 돋보이게 하고 싶었던 부분이고, 마지막 장면은 보고 싶은 대로 보지 말고 보이는 대로 보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준익 감독 특유의 연출로 탄생한 영화 속 장면에서는 장인정신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한국 수묵화를 필름에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자연의 아름다움과 토속적 정서가 흑백 화면을 가득 채운다.

정약전 역의 설경구와 창대 역의 변요한은 사제 간의 정이 생생히 살아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이 밖에도 정약전 곁에서 물심양면으로 그를 돕는 ‘가거댁’ 역의 이정은, 악독한 탐관오리지만 어수룩하면서도 과하지 않은 코믹 연기로 웃음을 주는 ‘별장’ 역의 조우진, 부정(父情)보다는 사리사욕이 앞서는 ‘장진사’ 역의 김의성을 비롯해 정진영, 류승룡, 방은진, 최원영 등 각자 독보적인 연기력을 입증해온 배우들을 한 영화 안에서 볼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31일 개봉.

▲자산어보.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자산어보.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저작권자 © SR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