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상수 영화 예술론의 총화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스포일러 주의: 이 리뷰에는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준희’(이혜영)는 어느 작고 아담한 책방을 찾아간다. 하지만 다투는 소리에 곧바로 밖으로 나와 담배를 입에 문다.
이럴 때 담배는 참 편리한 도구다. 어색한 순간을 심심하지 않게 해준다. 그뿐인가. 글 쓸 때, 시나리오 쓸 때 창작 에너지를 북돋는 화톳불이 되어준다. 숱한 소설을 써왔던 준희 또한 그 신세를 많이 졌을 것이다.
책방 주인 ‘세원’(서영화)은 갑자기 불쑥 찾아온 선배 준희를 보고 놀란다. 남 눈치 안 보고 편하게 살고 싶어서 몰래 잠적한 자신을 어떻게 찾아낸 걸까. 반가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심 이 재회가 불안하다. 겨우 얻은 평화가 연기처럼 흩어질까 두렵다. 그래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럽다.
세원과 달리 책방 일을 도와주는 ‘현우’(박미소)는 존경해온 유명 소설가 준희를 직접 만났다는 사실에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홀로 타워 건물에 오른 준희는 우연히 영화 감독 ‘효진’(권해효)과 그의 처 ‘양주’(조윤희)를 만난다. 이 부부는 30년을 함께 살아왔다.
준희와 효진 사이에는 과거 일로 감정적인 앙금이 남아있다. 효진은 꼬여버린 둘 사이 불편한 감정을 털어내고 싶어 하지만 준희는 그게 쉽지 않은 듯하다. 준희의 입에서 조금씩 가시 돋친 말들이 흘러나온다.
만약 준희가 책방에서 배웠던 수어로 이 말들을 전했다면 덜 차갑게 느껴질까. 세 사람 사이에 생겨나는 어색함은 도리어 관객에게는 희극적으로 다가온다.
세 사람은 공원을 산책하다 우연히 배우 ‘길수’(김민희)를 만난다. 효진은 연기를 그만뒀다는 길수를 앞에 두고 “너무 아깝다”는 말을 연발하며 아쉬워한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준희는 효진에게 버럭 큰소리로 화를 낸다. 타인의 삶을 이러쿵저러쿵 자기 기준으로 재단하려는 세상 모든 이를 향한 듯한 호통이다. 직접 면전에서 들었다면 눈물이 쏙 빠졌을지도 모를 준희의 매서운 대사가 부부를 작품 밖으로 밀어낸다.
한편, 길수는 자기 편을 들어주는 준희에게 왠지 호감이 간다. 영화를 찍고 싶어 하는 소설가라…이 사람과 함께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홍상수 감독의 27번째 작품인 ‘소설가의 영화’는 솔직하다. 홍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쭉 나열한다. 전작 ‘당신얼굴 앞에서’(2021)의 마지막 여운에서 이어지는 듯한 캐릭터의 감정선도 흥미롭다. 이번에도 등장인물들은 분식으로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하고, 술자리에 모이고, 담배를 만끽한다.
코로나19 팬데믹 현실 풍경을 그대로 담은 이 영화에는 일반인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가, 영화감독, 배우, 시인 등 예술 하는 사람들 중심이다. 하지만 타이틀 롤인 소설가는 글을 쓰지 않고, 배우도 더는 연기를 하지 않는다.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채 은둔한 소설가와 배우는 정말 우연히 만나고 모여 하고 싶은 일에 매달린다. 소설가는 원고를 쓰는 대신 영상을 찍고 배우는 자기만의 색깔을 찾아 연기를 다시 시작한다.
극 속에서 홍상수 감독이 창조한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한 목소리를 낸다. 특히 그 만의 영화 예술론과 철학이 이혜영이 연기한 준희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홍상수 감독은 주역인 준희를 비롯해 영화 감독 효진, 젊고 부유한 영화학도 ‘경우’(하성국) 그리고 시인 ‘만수’(기주봉)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불어넣는다.
홍상수 감독의 롱테이크 신들은 이전보다 훨씬 대담해졌다. 그리고 더 자유롭게 느껴진다. 그림 위에 덧칠하듯 입혀진 우둘투둘한 흑백 필름 입자 질감과 영화 속 영화의 디지털카메라 색감이 도드라진다. “그냥 해봤다”라고 단 답할지라도 그 연출 의도는 오직 홍 감독만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의 영화’는 홍상수 영화 예술론의 총화다. 홍상수 감독이 창작의 회전문을 수없이 반복해 드나들며 가장 개인적인 영역의 취향을 미니멀하게 압축하고 세공해 완성한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 안에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 독보적인 아티스트 임을 스스로 증명한다. 아울러 자신이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배우를 가장 편안하게 기록한 작품이기도 하다.
◆ 제목: 소설가의 영화 (영제: The Novelist’s Film)
◆ 각본/감독/촬영/편집/음악: 홍상수
◆ 제작실장: 김민희
◆ 동시녹음: 서지훈
◆ 출연: 이혜영, 김민희, 서영화, 권해효, 조윤희, 기주봉, 박미소, 하성국, 이은미
◆ 상영 시간: 92분
◆ 제작: 영화제작 전원사
◆ 배급: 영화제작 전원사, 콘텐츠판다
◆ 해외 배급: 화인컷
◆ 개봉: 2022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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