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과 북극의 극지연구와 개발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강조하는 박병권  전 공공기술연구회 이사장ⓒSR타임스
▲남극과 북극의 극지연구와 개발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강조하는 박병권  전 공공기술연구회 이사장ⓒSR타임스

◆ 홍용락 고문이 만난 '시대를 바꾸는 사람들' [16] 대한민국 최초로 남극 세종기지 개척한 박병권 前(전) 공공기술연구회 이사장

반가운 전화 한통을 받았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부원장을 하다가 또 말년에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야 된다고 자원해서 울릉도기지로 나갔던 임장근 선배였다.

SR타임스의 ‘시대를 바꾸는 사람들’을 자주 보고 있다며, 소개할 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박병권 이사장(86)을 꼭 소개하고 싶다는 것이다.

박 이사장은 국무총리실 산하 공공기술연구회 이사장(장관급)을 했을 뿐 아니라, KIST부설 해양개발연구소(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전신) 설립 때부터 관여했고, 특히 남극의 세종연구소, 장보고 기지와 북극의 다산 기지 설립의 산파역할을 한 산 증인이라는 것이다.

평생 동안 극지 연구의 시발점을 만든 역할로 대한민국 국가발전의 한 지평을 열어 온 분이라고 했다.

임 선배 얘기를 듣고 보니 호기심이 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박병권 님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으로 육사교수를 거쳐 미국에서 지질학 박사학위를 받고 극지 연구의 초석을 쌓았다는 점에서 나의 호기심도 배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공무원 하면서 기능적으로 그 업무를 담당한 것이 아니라, 전문적 이론을 토대로 언젠가 세계각국의 영토적, 지하자원 등의 이권 각축장이 될 극지(남극, 북극) 연구의 기반을 쌓은 혜안(慧眼)에 궁금증이 앞섰다.

서울 강남에 있는 작은 찻집에서 만난 박 이사장은 얼핏 뵙기엔 연구원들의 특징인 침착한 면만 보이지만, 이력이 설명해 주는 것 같이, 일을 해 나오는 면면은 일반인과 다른 개척자의 신화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았다. [편집자 주]

 

- 극지인 남극의 세종과 장보고 과학기지, 북극의 다산과학기지 개척 주도 

- 대한민국 과학자 최초로 남극점 도달 등, 극지 연구 주도권 국가로 발판 만드는 노력

- 북극 다산과학기지 설립 직, 간접 관여...극지 연구도 '국익 우선해야 한다' 방향성 제시

- 한국최초 로켓과 고속열차 제작에 기여, 국가차원의 과학 입국 실현 선구자 역할

 

Q. 이사장님 궁금한 것도 많고, 호기심이 나서 한 걸음에 달려왔습니다. 남극과의 인연을 맺은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 특별하게 계기가 주어졌다기 보다 지구에 관련된 공부(지구과학, 지질학)를 한 사람에게 운명처럼 기회가 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육사(16기)를 졸업하고 전방에서 초급장교로 비무장지대를 누비다가 서울대 문리대 지질 학과에 가서 공부를 하게 되고, 미국 유학(University of North Carolina at Chapel Hill) 가서 지질학 박사를 받고 다시 육사로 와서 교수를 하게 되면서 입니다.

1972년경,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최상 박사가 우리나라 정부에서 해양에 관한 연구소 즉, 해양개발연구소를 만드는데 같이 해 보자고 했습니다.

나는 1987년 한국과학기술원 부설 해양개발연구소 극지연구소장으로 정식 부임하기 전까지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적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KIST위촉연구원으로 참여하면서 해양개발연구소 설립 및 운영계획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연구소 설립에 관한 외자 도입까지 책임지며 UNDP(유엔개발계획)에 자금을 지원 받기 위해 노력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7년 전역을 결심하고 사회에 다시 진출하게 될 때, 나는 나름대로 그동안의 노력도 있었기 때문에 기관장 급은 기대를 했었습니다.

세상 이치라는 게 내 뜻대로만 되는게 아니더라고요. 또 그 때는 인사가 적체되어 나한테 올 수 없는 상황일 수도 있었겠죠. 그래서 그 때 해양개발연구소 극지연구실장으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정부에서 남극 기지를 건설하라는 정부의 지시가 있었지만, 전문인력이 없고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업무처리가 꽤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 시기에 그동안 해양 업무에 음양으로 관여하던 제가 극지연구실장을 맡았으니 나름대로 극지에 관한 연구·지원시스템도 정리하고, 기지건설 위치는 물론 극지 연구 연구원 확보 등등의  여러 일을 해야 했습니다.

당시 극지연구실장 보직과 극지연구부장, 극지지원실장 보직을 한꺼번에 맡으면서 노력했으니 어떤 상황인지 이해되실 겁니다.

▲우리나라 과학자로서는 처음으로 남극점에 도전했다ⓒSR타임스
▲우리나라 과학자로서는 처음으로 남극점에 도전했다ⓒSR타임스

Q. 세 개 보직을 한꺼번에 임명 받았다니 업무 강도와 인력난이 어땠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 상황에서 첫번째 임무가 남극연구기지 건설이었다면서요?

 

 == 네... 사실 국내에서도 연구시설 건립은 건설과 연구 전문성을 접목시켜 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남극이 어떤 곳입니까?

세계에서 다섯번 째 큰 대륙입니다. 유럽대륙보다도 더 크다고 합니다.

그런데 환경은 어떻습니까? 남극 대륙의 98%는 얼음입니다. 최저 영하 89.6도 까지 내려 갑니다.

영하40도 이하 날씨에는 끊는 물을 공중에 던지면 ‘꽝’하는 폭음과 함께 순간적으로 얼음이 되어 땅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허허...

이런 곳에 관한 연구를 준비하는 실무책임자의 고민은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었습니다.

1987년 신년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외무부가 남극 연구의 중요성과 기지 건설의 필요성을 보고하자, 그 자리에서 대통령의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이 상황에서 해양연구소 극지연구실이 3월에 설치 되었습니다.

해양연구소는 과학자, 기술자, 대사관 참사관으로 구성된 현장답사반을 구성하게 되고, 다음해 킹 조지(King George)섬 후보지를 답사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현대그룹이 기지 설계와 감리, 자재와 장비 운반 등의 건설을 맡게 되었습니다.

남극의 짧은 2, 3 개월의 여름 기간에 공사를 끝내야 하기 때문에, 건설인력들도 밤 낮 없이 일 한 결과 1988년 2월 세종과학기지가 준공을 하게 됩니다.

세계에서 18번째 남극에 연구기지를 세우는 나라가 된 것이죠.

 

Q. 네, 그런 과정을 겪었군요. 그런데 남극에 세종기지는 세워지지만, 그와 동시에 연구가 진행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 연구와 개척 분야도 우리가 임의로 정할 수 없는 남극 조약을 지켜야 하는 일도 있지 않았습니까?

== 잘 아시네요. 지금이야 남극에서 뭐를 할 수 있고, 뭐는 못하고 하는 것이 많이 알려졌지만 당시는 관계자들만 남극에 관해 조금 아는 정도였습니다.

남극 조약은 1959년 워싱턴에서 미국, 구 소련, 호주, 칠레, 뉴질랜드, 일본 등 12개국이 (원초 서명국 이라고도 합니다) 남극대륙을 과학적 목적을 가지고 비무장지대로 보존할 것을 규정한 조약입니다.

그래서 남극은 자유로운 과학연구와 탐사를 위해서는 어떤 나라든지 이용할 수 있지만, 영토 주장을 하거나 군사기지 설치 또는 핵무기 설치, 군사훈련 등은 엄격히 금하며, 방사능 폐기물 처분도 금하는 내용입니다.

현재 세계45개국 정도가 가입하고 우리나라는 33번째 가입된 나라입니다. 또한 남극의 세종기지를 건설하고 연구를 시작하게 되어 1989년 세계 29번째 협의 당사국 지위를 얻어 일정부분 투표권을 가진 영향력 있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몸은 군문에 있는 육사교수시절, 해양 개발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시절ⓒSR타임스
▲몸은 군문에 있는 육사교수시절, 해양 개발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시절ⓒSR타임스

Q. 네, 남극에도 그런 규정, 나름대로 국제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규정을 지키며 초기에 연구기지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것도 혼란 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1차 연구단장으로 하계대를 인솔하여 다녀오셨다면서요?

== 세종기지 건설을 하는 현대그룹의 건설 인력들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연구기지 설립 다음단계로 연구인력이 상주하면서 연구를 진행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극지연구실장, 연구부장, 연구지원실장을 겸직하고 있는 나로서는 우리 나라가 남극조약에 가입하지 못하고 세종기지 건설이 시작되기 때문에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세종기지 건설을 위해 바톤(Barton) 반도 주변 지역을 자기 나라 주권이 관할하는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국가들에게 양해를 얻어내야 하기 때문에, 여러 나라를 다니며 양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칠레, 영국, 아르헨티나의 한국대사관 외교관들과 함께 그 국가 외무부를 방문해서 양해를 얻어내는 일이었는데, 국가 영토에 관한 문제라 쉽지는 않았지만 잘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연구 단장의 임무는, 연구단을 이끌고 기지 건설현장에 가서 현대그룹과 건설 현황을 파악해서 긴밀히 협조하는 일과 장비의 철수와 인수인계를 받는 일이었습니다.

덧붙여, 연구를 위해 주변 해양환경을 조사하는 일도 해야 했습니다.

이런 난제가 산적해 있는데, 바톤반도까지 가는 연구용 선박을 임차하는 일조차도 풀 수가 없었습니다. 막막한 상황이었는데, 지인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 온 칠레인을 소개받을 수 있었습니다. 행운이었습니다.

같이 근무하던 김예동 박사의 사전답사 후, 임대할 배가 있는 뿐따 아레나스 (Punta Arenas)로 동계대와  하계 연구단 30명과 함께 그 곳으로 날아갔습니다.

거기서 연구 기지에 필요한 1년 동안의 물자와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여  임차한 배(500톤)에 가득 싣고 기지로 출발했습니다.

사전에 경험하지 못한 항로를 따라 4일간의 악전고투 항해 끝에 마리안 만(Marian Cove)에 건설중인 세종기지에 도착해서 임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023년 현재도 남극 기지를 가려면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Santiago)로 가서 앞에서 말한 뿐따 아레나스로 이동해 칠레 공군기 등을 이용해 도착하거나, 또는 우리의 쇄빙선을 타고 기나긴 항해 끝에 도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상업적으로 민간 비행기가 부정기 노선으로 운행한다는 소문도 듣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불편하죠. 그 때는 1987~88년도 였으니까 불편은 말도 못하는 수준이었죠.

당시에는 전혀 가보지 못한 곳을 만들어 찾아 가는 곳이었으니까 오죽 힘이 많이 들었겠습니까?! 정말 힘들었습니다.

 

Q. 1차 연구단장이었으니까, 1차연구단 인솔이 더 힘들었다는 것은 짐작이 갑니다. 도착해서 연구단이 시작한 첫번째 연구과제가 무엇인지 기억 나십니까?

== 그럼요. 세종기지가 있는 마리안 만(Marian Cove) 주변의 해양 조사였습니다. 주변에 많은 플랑크톤을 채취해서 특성을 조사하는 것이 첫번째 연구 과제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임차한 배는 플랑크톤을 채취하는데 필요한 장비인 데빗 (Davit)이나 윈치(winch)등이 없는 단순한 상선(商船) 이었습니다.

그래서, 칠레에서 준비할 때 시장에 가서 기본 도구를 사다가 우리가 필요한 연구 도구로 재조립해서 겨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남극 연구는 아무것도 모른 체, 또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쇄빙선에서 장비를 갖추고 다니면서 연구하는 상황과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Q.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출발한 세종기지의 남극 연구 초기에는 해결이 불가능한 더 큰 한계도 있었다면서요?

== 네... 여러면에서 한계가 많았지만, 의사가 없었다는 겁니다.

연구원들의 근무 주기는 6개월이나 1년씩으로 순환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심리적인 부분은 서로 위로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병이 생기면 정말 대처가 불가능하죠.

특히 예측 불가능한 병이 생길 때는 난감합니다. 그래서 남극 근무 하러 가는 연구원들 사이에는 가기 전에 병원에 가서 멀쩡한 맹장수술을 하고 간다는 분들도 있다고 우스개 소리를 했습니다. 허허허...

초기에 세종 기지도 이런 문제가 왜 아니 고민이었겠습니까? 남극에 가서 근무할 의사를 전혀 구할 수 없었습니다.

정부나 연구소에서 힘써 보았지만 남극 기지에 지원해 줄 수 있는 의사가 없었습니다. 속수무책이었죠.

그래서 내가 국방부에 근무하고 있는 육사 동기생인 정책국장 이필섭 장군을 방문하여 하소연을 했고 어렵게 군의관 중에서 지원자를 받아 충당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아 참 힘들었습니다. 지금은 개별적으로 의사와 계약해서 파견된다고 하니, 상당한 대우를 해 주거나 국가를 위한 신념 있는 분이 파견되거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해양연구소 극지연구실장 시절, 1차연구단장으로 남극 세종연구소에 갔을 때 모습ⓒSR타임스
▲해양연구소 극지연구실장 시절, 1차연구단장으로 남극 세종연구소에 갔을 때 모습ⓒSR타임스

Q. 이사장님 얘기를 듣다 보니,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남극연구기지인 세종기지 건설에 산파역과 주춧돌을 놓는 역할을 다하셨네요. 세종기지가 문을 열고 20여년이 지난 2014년 장보고 과학기지 건설 땐 어떤 역할을 하셨나요?

== 장보고 기지 건설 때는 그 위치를 어디에 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습니다. 그 때 나는 극지연구소 자문위원으로 있었습니다.

그 시기는 한국해양연구소(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전신) 소장을 두 번 역임하고 공공기술연구회 이사장도 거친 상태였으니까, 기지 후보지 결정에  많은 조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무렵 우리나라도 쇄빙선 ‘아라온’호 건조가 완료되었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남극에 장보고 과학 기지인 제2기지 건설 안을 논의 하는 때 였습니다.

장보고 과학기지 후보로 2개 후보지가 경합을 벌였습니다. 하나는 러시아가 사용하다 방치한 러시아 기지 주변지역과, 다른 하나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하계지역으로 사용하던 지역이었습니다.

사실 나는 그 전에 1992년 남극점을 한국 과학자로서 최초로 방문할 기회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나는 우리가 남극 기지를 또 건설하려면 테라 노바 만 (Terra Nova Bay)지역이 타당하다고 관심있게 본 적이 있었습니다.

앞서 후보지로 논의 되던 이탈리아와 독일의 하계 기지 지역이었죠. 연구소 내에서도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이 양분되었습니다.

급기야 정부가 나서서 남극 제2기지 즉, 장보고 기지 선정위원회를 만들어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위원회에서 내가 위원장으로 회의를 주재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장보고 과학 기지가 세워진 장소는 내가 1992년 남극점 갈 때 봐 둔 기지 후보지였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와 다수의 위원들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문제에 접근해서 장보고기지가 결정되었습니다 .

장보고 과학 기지 건립 위치 결정은, 내가 남극점을 탐사한 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Q. 아, 그렇습니까. 1992년 한국 최초로 과학자로서 처음 남극점을 다녀왔다는데, 그 일이 장보고 기지 위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 계기가 된 이유는 뭘까요? 또, 남극점과 남극의 차이는 무었 입니까?

== 남극은 남극점을 포함한 남극 대륙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 남극점(南極點)은 보통 지구의 가장 남쪽 즉 남위 90° 지점(한 점)을 말합니다. 

현재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얼음덩어리의 이동에 따라서 또는 대륙 이동설에 따라서 현재 남극점으로 표시된 지점이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고 봅니다. 

남극점의 평균 고도는 2835m이고, 평균기온은 여름 영하28도, 겨울 영하60도입니다. 역대 최저기온은 74.5도를 기록한 적도 있는 지구 남반부에서 가장 추운 지역입니다.

노르웨이 탐험가 아문센이 1911년 최초로 찾은 곳이죠. 이전에는 다니기가 힘들었습니다. 또 현재도 고지대이기때문에 산소가 희박합니다.

지금은 이곳에 미국의 아문젠-스콧(Amunzen-Scott)기지가 있으며 미국이 천문대, 레이더, 비행장까지 갖추고 우주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기지가 없는 국가의 연구자는 가기가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남극점에 다녀온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은 쉽게 갈 수 없는 곳에 다녀왔다는 단순한 기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보고 기지 건설을 위한 위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또, 당시의 주한뉴질랜드 대사의 국익을 위한 노력을 말하려는 것이고 이 이야기는 극지에서 힘들게 연구하는 연구원들도 그들의 노력이 국가발전에 어떤 식으로든지 밀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서 긍지를 가지라는 선배 연구자의 고언(苦言)이기도 합니다.

내가 해양연구소 소장 첫번째 임기 중인 1992년 경 어느 날 주한뉴질랜드 대사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만나서 대화하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제2의 남극 기지를 세우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첫번째 기지인 세종 기지를 건설하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뉴질랜드는 남국 조약 초기 서명국이며, 미국은 남극기지 운영을 위해 뉴질랜드 크라이스트 처치(Christchurch)를 전초기지로 활발하게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뉴질랜드 대사는 나에게 크라이스트 처치 방문과 함께 남극의 뉴질랜드 스컷(Scott) 기지와 미국의 맥머도(MacMurdo) 기지를 방문하고 남극점까지 초청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초청에 응했습니다. 남극 연구를 둘러싼 주변 환경과 다른 나라의 연구 활동도 파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울을 출발해 남극 연구 기지에 물자 지원의 메카 격인 크라이스트 처치에 우선적으로 가서 남극기지 입·출입의 물동량과 종류 및 조달 방법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크라이스트 처치를 떠나 미군 수송기로 미국의 맥머도(Macmurdo) 기지를 방문해 2000명 가까운 기지 종사자들을 위한 운영 상태와 기지의 식당, 병원, 교회 및 장비지원 시설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 맥머도 기지에서는 미국 과학재단 대표, 기지의 운영, 관리를 맡고 있는 회사의 대표, 미공군 파견대 대표가 매일 아침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미국의 맥머도(Macmurdo)기지로 비행하는 동안 비행기 아래로 보이는 개활지를 눈 여겨 볼 기회를 가졌고 남극연구기지에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 지역을 내려다 보며 기지의 적합성을 시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바다에 접해 있는 넓은 지역이 눈에 들어 왔고 그 지역이 오늘날 장보고 기지가 위치한 테라 노바 베이(Tera Nova Bay)지역입니다.

미국의 맥머도(MacMurdo)기지에 머물면서 기상상태가 양호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다행히 기상 상태가 좋아져서 미공군의 안내로 마침내 미국의 남극점기지인 아문센-스콧(Amunsen-Scott)기지 (남극점)를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남극점은 공기도 희박하고 추위도 혹독한 지역이어서 미국의 맥머도(Macmurdo)기지와 자연환경이 대비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현재 장보고기지가 있는 지역은 미국의 맥머도(Macmurdo)기지와 멀지 않은 곳(비행기로 2시간 정도)이고 뉴질랜드와 미국 맥머도 기지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주한 뉴질랜드대사가 이와 같이 세세한 부분까지 고려해서 초대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전반적인 기지 건설의 조건을 느껴보고 남극기지 물동량 수송과 준비를 위한 전초기지로 뉴질랜드와 호혜적 관계를 가지고 싶은 의도는 분명 했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북극다산기지 개소식 때 방문해 연구와 탐사 방향을 협의했다ⓒSR타임스
▲북극다산기지 개소식 때 방문해 연구와 탐사 방향을 협의했다ⓒSR타임스

Q. 이사장님이 각고의 노력이 있어서 두 개의 남극기지가 건설되었네요. 최근 정부는 2030년까지 남극에 내륙 탐사 기지를 하나 더 설치하겠다는 안을 내 놓았습니다. 알고 계시죠?

 == 당연히 알고 있죠. 그동안 힘들여 건설했지만, 세종과학기지와 장보고과학기지는 내륙이 아닌 남극의 해안 지대에 건설 되었습니다.

현재 미국, 러시아,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공동사용), 중국 등이 남국 내륙 내에 기지를 건설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번에 남극 내륙에 제3기지가 건설된다면, 우리는 6번째 단독으로 내륙 기지를 건설하는 나라가 되는 셈이죠. 이렇게 되면, 3000미터 깊이의 남극 심부 빙하를 시추하기가 훨씬 용이해질 것입니다.

전문적으로 ‘빙하 코어’ 를 채취할 수 있으며 이 심부 빙하 코어 채취 작업을 통해 남극의 기후 변화 내지 지구환경 변화에 대한 연구를 더 세밀하게, 활성화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빙하 분석을 통해 빙하가 만들어지는 각 시기별, 공기와 물 성분, 탄산가스 양의 변화를 분석해서 지구 환경 변화의 비밀도 밝혀낼 수 있다는 것 입니다.

또, 고립된 환경에서 수 천년, 수 만년 존재한 미생물 존재도 밝혀 낼  수 있겠죠.

어떤 분들은 빙저호의 생태환경이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와 비슷하다고 주장해 궁금증을 더 자아내고도 있습니다.

정부는 2027년까지 내륙 연구 거점의 기지 후보를 선정한다는 계획을 야심 차게 극지연구소와 함께 추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Q. 이사장님이 아직까지 극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을 하고 계셔서 자세히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극지에 관한 얘기를 이제까지는 남극중심으로만 얘기해 왔지만, 북극 얘기도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러시죠. 

나는 2번째 해양연구소 소장과 공공기술연구회 이사장을 하는 동안 북극 다산과학기지 설립에 직, 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직접 그 곳을 방문하여 주변 환경을 확인하고 추진하였습니다. 북극 다산 기지는 2002년 노르웨이 최북단 스발바르 제도에 있는 니 알슨(Ny Alesund) 과학단지내에 노르웨이 정부에서 운영하는 공공 회사와 임대계약을 맺어 그 곳의 시설물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북극의 다산 과학 기지를 운영함으로서 남극과 북극에 모두 연구기지를 운영하는 세계 8번째 국가가 되었습니다.

북극 하면 우리는 단순히 추운 지역이라고 생각하며, 지구의 북극 점 주변 혹은 북쪽 인근지역을 생각하게 됩니다.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보통 북위 66.33도(Arctic Circle) 이북 지역 또는 영구동토층의 한계선'을 북극이라 지칭합니다.

또, 북극 지역에 있는 북극해는 세계 5대 대양의 하나로, 북미 및 유라시아 대륙으로 둘러싸인 해양을 지칭하죠. 이 곳은 빙하로 덮혀 있다가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현재 얼음이 녹는 해빙 지역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을 연구하기 위하여 스발바르 제도에 다산 과학기지를 비롯해 많은 국가들이 과학기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스발바르 제도는 북유럽 국가인 노르웨이 최북단에 위치하고 그린란드 동북쪽에 위치하며 5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면적은 한반도의 27% 정도이고, 전체 면적의 85%가 일년 내내 빙하로 덮혀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북극은 ‘스발바르 조약’에 가입만 하면 이 지역에서 자원 개발이나 새우 어획 같은 수산업이 가능하며 이 곳에 거주하며 상업을 할 수도 있습니다.

▲공공기술연구소 이사장 시절 항공우주원에서 첫 로켓 개발을 독려하던 시절ⓒSR타임스
▲공공기술연구소 이사장 시절 항공우주원에서 첫 로켓 개발을 독려하던 시절ⓒSR타임스

Q. ‘스발바르 조약’이 궁금한데요? 이 조약은 언제, 무엇 때문에 만들어 진 것인가요?

== 스발바르 조약(svalbardtraktaten)또는 스피츠베르겐 조약은 북극 스발바르 제도(스피츠베르겐)에 대한 노르웨이의 자치권 행사를 인정하는 조약입니다.

그러나 자치권의 행사는 일정한 규정의 영향은 받지만, 노르웨이 법률 전체가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이 조약은 스발바르 군도의 비무장 지대를 정하고 있으며, 모든 서명국은 군도에서 평등하게 경제 활동(석탄 채광 등)을 할 권리를 가집니다. 

1920년 14개국이 조인국이 되었으며 현재 40여개국이 가입 되었습니다. 더 쉽게 설명하면 이 조약에 가입한 나라와 국민은 아무런 제약없이 이 지역 자원을 개발하거나 필요한 경제 사업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다산과학기지가 건설되고 10년 후인 2012년에 본인과 몇명의 과학자들이 정부에 건의하여 현재는 이 조약에 가입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오래 전부터 이 곳에서 석탄 개발을 해 왔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이 체류하였다고도 합니다. 현재 스발바르 제도에는 몇 개국의 국민들이 개인 사업을 위해 얼마간의 인원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스발바르군도를 말하다 보니까 앞으로 우리나라가 북극 지역에 관심을 가져야 할 곳은 그린란드도 생각해 봐야 될 것입니다.

한반도의 9.8배 정도 면적을 가진 자치령입니다. 국토의 81%가 얼음으로 덮혀 있지만, 풍부한 광물 및 수산자원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2, 3주간 짧은 여름기간에는 반팔도 입고 다니는 지역이라고 하니까, 자원개발을 위해서는 국가나 개인들이 한번쯤 고려해 볼 지역이라고 생각합니다.

 

Q. 저도 동의가 됩니다.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특히 생각을 많이 해볼 지역인 것 같습니다. 다산과학기지로 얘기를 다시 좁혀 보겠습니다. 북극에 다산과학기지가 설치되어 하는 일과, 앞으로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요?

== 현재 북극 다산기지에서는 북극권의 환경 변화 관측이 가능합니다. 그 일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발바르 제도 대륙붕 지역 해저에는 전 세계 석유 부존 량의 20%가 매장되어 있다는 보고서가 있습니다.

또 이 주변 바다의 어획량은 세계 어획량의 37%에 달한다고 합니다. 앞에서 얘기한 스발바르조약에 가입한 국가들은 대륙붕 관할 구역이 해안으로부터 12해리(19Km)가 아니라 해양법이 정하는 200해리(320Km)를 활용 가능하다는 주장으로 함으로써, 노르웨이 등 인접 국과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가입한 국가들은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정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현재는 아무도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향후, 국익을 위해서 지금부터 연구와 함께 지하자원 및 어획을 위한 작업이 국가적으로나 개인 사업으로 활성화 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다산기지에서는(주로 하계에 운영) 단순한 과학 현상을 관측하고, 국제협력을 하는 수준입니다.

스발바르 섬(제도)은 북극권에 위치해 있어서 우리 인공 위성이 하루에 수차례 경유합니다.(남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항공우주연구원은 남극 세종기지에 중계 시설을 가지고 있고, 북극에서는 노르웨이 전문회사와 계약을 해서 우리가 발사한 위성과 교신하면서 접촉 결과를 항공우주연구원에 통보한다고 합니다.

인근 그린란드에는 나토가 어마어마한 방공망 시설이 갖추고 있는 예를 보아, 현재보다 좀 더 활발한 국익과 국민 경제에 도움이 되는 정책개발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덧붙이면, 선진국들은 북극해의 자유 항해권 보장문제, 북극권의 자원 개발과 해빙으로 인한 지구 온난화, 메탄가스 등의 증가와 기후변화에 대한 대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도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극지(남극.북극)개발연구의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바뀔 수 있다고 강조하는 박병권 이사장과 인터뷰하는 홍용락 고문(사진 오른쪽)ⓒSR타임스
▲우리나라가 극지(남극.북극)개발연구의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바뀔 수 있다고 강조하는 박병권 이사장과 인터뷰하는 홍용락 고문(사진 오른쪽)ⓒSR타임스

Q. 극지 연구가 국익을 위한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국민들은 남극과 북극 연구는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자료 등 매장 자원의 발견 또 지구 탄생의 비밀을 밝히는 학술적 의미에 치중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것만은 아니군요?

== 물론 그런 학술적이고 기초과학적인 연구가 바탕이 되어야 하겠죠.

그러나, 현재 인간의 생존이 쉽지 않은 남극에 많은 투자를 하는 국가들이 지구환경을 보존하는 순수한 목적에서만은 아닐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가 단언컨데 지금 남극 진출에 공을 들이는 나라는 대부분 '영토확장'에 우선 목적이 있지 않겠습니까?

남극은 미국, 중국보다 큰 대륙입니다. 한반도의 62배 크기입니다. 전 세계의 대륙 면적의 9.2%입니다. 지구 담수량의 68%를 가지고 있으니까, 인류 생존의 마지막 보고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도 같습니다.

그런 땅이 지금은 주인이 없는 땅입니다. 그러나 2048년 남극 조약이 끝나면 어떻게 정리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도 북반부에 위치한 러시아는 남극 대륙(기지) 해안에 기름 탱크를 만들어 필요시 남극 기지에 와서 잠수함에 기름을 보급받는다고 합니다.

미국은 남극 해안의 얕은 바다에 대규모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산되는 석유자원 조사에 열을 내고 있을 뿐 아니라, 미국 공군은 조종사들의 극지방 운행 훈련 등 간접적 군사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뒤늦게 남극에 진출하여 남극대륙 내에 관측 시설을 건설 하는 등 남극조약 해제 후를 대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지하자원 및 수산자원 등의 기초자료 획득과 주변 해역의 생태계 조사도 계속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외에 국가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활용할 새로운 일을 계속 찾아 내야 할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가 발사한 인공위성은 대전에 위치한 항공우주연구원과의 교신은 1일 1회 정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남극의 세종 기지, 장보고 기지와 북극 다산 기지를 활용하면, 우리 인공위성과 교신을 많게는 일일 8회정도 교신 하며 명령을 하달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파악한 정보가 순수하게 과학 정보일 수도 있지만, 활용도에 따라 국가안보 자료로 활용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 정도로 합시다. 군사적인 문제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나도 정확하게 알고 있지는 않지만 세계적인 예로 미루어 추측해 봤습니다(허허허)

 

Q. 북극 연구 방향에 대해서도 한 말씀 덧 붙인다면요?

== 북극은 정부에서 2026년까지 2774억원을 들여 1만5천톤급 차세대 쇄빙연구선을 만들어 북위 80도 이상 고위도 탐사를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북위 80도 이상은 현재 국내 유일의 쇄빙연구선인 아라온호가 못 들어가 탐사가 불가능한 곳 입니다. 새 쇄빙선을 통해 북극점까지 연구역역으로 활용한다는 생각입니다.

이 쇄빙선으로 북극 항로 영역 확보는 물론 극지 산업 발전 기반도 마련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이처럼 남극과 북극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자는 정부와 극지연구소 등의 노력은 아직까지는 남극과 북극에서의 활동이 추격자 입장이지만 조만간 선도자 반열을 기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홍용락 논설고문
▲ⓒ홍용락 논설고문

(인터뷰가 끝나고 나니까, 박병권 이사장님을 소개해 준 임장근 선배와 두 분 이력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임 선배도 육사를 졸업한 뒤 한국해양개발연구원 부원장을 거친 이력이 우선 같습니다.

이력이 같은 두 분이어서 임 선배가 박 이사장님의 활동영역에 대해 남다르게 공감하는 점이 많았던 것 같았습니다.

나는 임 선배가 부원장을 거친 후 연구원으로서 울릉도, 독도기지에 가서 마지막 봉사를 하겠다고 하길래 그 때는 이해를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두 분이 젊은 날에 육군사관학교를 통해 조국 봉사의 DNA가 잠재되어 있었던 기개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타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박 이사장님도 편히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남극과 북극 개발 연구인 극지 연구를 벗어나지 않고 몰두를 자청하지 않았나 쉽습니다.

장관급 위상을 가진 공공기술연구회 이사장을 할 때도 산하기관 관리만 잘 하면 편할 수 있는 자리였지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산하기관 항공우주연구소에서 처음으로 위성발사를 위한 로켓 개발을 할 때 직, 간접으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또 , 그 당시 규모가 적은 철도기술연구소를 확대 개편하여 고속열차를 처음으로 만들어 냈다고 했습니다. 이 외에도 건설기술연구소에 화재 실험 동을 경기도에 건립하는데 발벗고 나선 분이었습니다.

과학기술정보 관련 연구 기관이 2개로 분산되어 있던 것을 하나로 통합하여 현재의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을 탄생시키기도 했습니다.

그 시대, 또 한 시대를 개척한 분들은 대부분 워커홀릭(일 중독자)였다지만, 열심히 노력하신 분입니다. 이런 분들의 노력이 오늘날 국민들과 함께 나라발전을 꿈꾸는 과학입국시대를 열게 되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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