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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초대석] <10> 시문학 활동 '올인' 민용태 고려대 명예교수
  • 홍용락 논설고문
  • 승인 2022.10.11 0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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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내내 열정적이고 유쾌하게 시대변화를 추구하던 얘기를 때로는 시어를 섞어, 때로는 이해가 잘 안되는 현학적인 수준으로 다양하게 설명하는 지금의 민용태 시인 모습ⓒSR타임스

◆ 홍용락 고문이 만난 '시대를 바꾸는 사람들' [10] 정열적으로 시문학 활동에 올인 민용태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 강동의 한적한 빌라촌 정원에서 점심식사 후 산책하는 민용태 시인을 만났다.

아침에는 규칙적으로 집 뒷산을 자유롭게 한 시간 조깅, 주2회 동호인들에게 시 작법 강의를 하며... 이 외에 서울과 지방에서 초청받은 시문학 행사를 소화하는데도, 한 주가 정신없이 지나간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틈만 나면 빌라촌 정원을 거닐며 시상을 가다듬는게 일상이라 한다. 이 때도 정열적인 스페인 풍 패션정장만은 꼭 유지한다고.

얼핏 보면 호방하며 자유분방한 평소 언행이지만, 그 속에서도 본인만의 규범을 가지고 있는 민 교수의 생활 가치관을 느낄 수 있는 단면이다. 

민 교수 본인과 아버님이 희망했던 직업은 시인이며 선생님이었으며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 없는 직업은 시인과 선생님이다. 

이 인터뷰 칼럼의 호칭도 시인과 교수를 적절하게 활용 할 수 밖에 없다. [편집자 주]

 

-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정성 깊은 ‘달’ 작품으로 '학원문학상' 수상... 천재 소년시인으로 등장

- 소년시절 우연히 접한 ‘돈키호테’ 와 스페인 문학에 대한 동경으로 대학2학년부터 스페인어로 시를 써서 발표 

- 스페인과 중남미 현대시를 동양적 안목으로 소화...동서양에 없는 새로운 시, 조화된 시로 창조

- 서정적 본질를 날카로운 안광과 한번 포착한 대상을 감성의 언어 활용, 멀리서부터 중심에 서있는 시로 구축

- 허위와 가식의 옷을 벗고 벌거숭이가 되어, 솔직 담백-유쾌한 화법으로 ‘도전 지구 탐험대’ ’이경규가 간다’ 등 TV 예능 프로그램 출연...대중 문화와 시 예술을 격의 없이 조화시키려고 노력

- 스페인 유학 1년만에 창작과 비평 작품을 번역한 '우화'로 스페인 유명 문학상 '마차도'(Certamen poetico Hermanos Machado) 수상

- 2016년 노벨문학상 추천 유럽한림원 Mihai Eminescu '세계 시인상' 수상...노벨문학상 기대

 

Q. 안녕하십니까? 학교 정년한 지도 꽤 되셨고, 요즘도 시 쓰는 작업을 정열적으로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민 교수님이 현재로서는 한국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인가요?

== (허허 하며 웃는다) 아마도 지난 2018년쯤 고은 시인이 노벨 문학상 수상이 유력하다는 소문이 퍼져 있을 때, 국제펜클럽 한국대표를 하고 있는 저한테 가능성을 묻는 언론인터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 때 세계 시문학 경향에 비교적 밝은 내가 고은 시인의 노벨 문학상 수상의 가능성에 대해 긍정과 부정적인 측면에서 나름대로 정확하게 설명을 해 준 것 같습니다.

그 때 당시 노벨 문학상은 미국스페인계가 주로 수상하는 분위기라고 전해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원래 시라는 것이 번역 언어를 통해서 감정과 감동을 전달하는 것인데, 고은 시인은 인간적 활동과 사상은 노벨상 수상감인데, 문학적 감동을 줄 수 있는 번역시가 조금 문제점일 수 있다고 했죠.

그럴 때마다, 한국의 서정적 감성을 스페인어와 영어로 시를 쓴 나의 시를, 노벨 문학상 추천위원회인 유럽 한림원에서 주목하고 나에게 '세계 시인상'을 수상 했기 때문에, 인터뷰 하는 언론사에서 고은 시인 이후에 가장 유망한 수상후보로 회자 시킨 거 같습니다.

(그러면서 최근에 발간된 민용태 시집 '하늘 짊어질 무지개 하나'와 '민용태 시선집'을 주면서 노벨상에 근접하는 능력인지 판단해 보라면서 특유의 유쾌한 웃음으로 마무리 해 준다) 

▲인터뷰 내내 열정적이고 유쾌하게 시대변화를 추구하던 얘기를 때로는 시어를 섞어, 때로는 이해가 잘 안되는 현학적인 수준으로 다양하게 설명하는 민용태 시인 모습ⓒSR타임스

 

Q. 제가 조만간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일찌감치 인터뷰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허허) 그런데 시를 언제부터 쓰시게 되었나요?

== 내가 시를 쓰게 된 것은 내가 찾아 다니면서 시인이 되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가 나를 찾아 왔다고 할까요? 지금 와서 보니 숙명이라고 생각도 됩니다.

광주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문예지인 ‘광고시집’에서 시를 모집한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광주고등학교 문학서클은 2학년인 문순태, 이성부 선배가 전국적으로 소년 시인으로 필명을 날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나는 시 모집 공고를 보고 자신이 있었죠. “저건 내거다” 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10편을 써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재직하면서 모더니즘 시작 활동을 아마추어로 하고 있는 부친께 보내서 평가를 부탁드렸습니다.

아버님은 10편 중 8편은 수준 이하라고 아예 평가도 안하셨고, 2편도 전부 수정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아버님의 냉혹한 평가 덕분에 그래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향수'가 장원으로 뽑혔습니다.

이후에 '달'이라는 작품으로 그 당시 가장 권위있는 6회 '학원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달'이라는 작품은 당시에 유명한 시인인 박남수님 등으로부터 격찬을 받았습니다.

내용은 사춘기 소년시절에 내가 당시에 가마타고 시집오는 옆집 새색시가 가마문을 열고 두렵게 쳐다보는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얼굴이 정말 청초하게 느껴졌습니다. 반면에 내가 잘 알고 있는 신랑이 될 옆집 총각은 조금은 무지막지하고 거친 인상이었습니다.

이 대비되는 이미지를 보면서 그 새색시의 심정을 막연한 환상을 가진 사춘기 소년의 시선으로 '달'로 의인화 해서 부각 하였습니다.

‘달은 감나무 가지 위에 졸고...’ 이렇게 시작되는 시로 큰 상을 받았습니다. 이 상을 받음으로서 당시 이성부 시인이 독식(?)하고 있는 천재 소년 시인 범주에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6년 노벨문학상 추천위원회인 유럽 한림원 Mihai Eminescu 세계시인상 수상식 장면ⓒSR타임스

Q. 그런데 대학은 서반어과를 선택하셨습니다. 특별한 뜻이 있었나요?

== 앞에서 말한 것 같이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직업은 '시인'이고 직장은 '선생님을 한다' 라고 못박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지 않습니까?

고등학교 졸업 후에 대학을 선택할 때 서울대 독문과를 간다고 목표를 정해 놨습니다. 당시 독일의 시인 칼 부세의 ‘저 산너머’를 매일 낭송하고 다녔습니다.

 

(하면서 민 교수께서  칼 부세의 ‘저 산너머’를 독일어로 직접 낭송한다) 

저 산 너머 또 너머 저 멀리

모두들 행복이 있다 말하기에

남을 따라 나 또한 찾아갔건만

눈물지으며 되돌아 왔네.

저 산 너머 또 너머 더 멀리

모두들 행복이 있다 말하건만…’

 

게다가, 당시에 존경했던 청록파 시인 박목월 님이 독일 시인 ‘헤르만 헤스’와 ‘릴케’ 를 격찬하는 것을 보면서 독일문학을 전공하기로 뜻을 거의 굳힐 단계가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 나에게는 새로운 운명을 도전을 하게 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하루는 고등학교 친구 전순구님이 같이 광주YMCA에 가서 한국외국어대에서 개최하는 스페인어와 스페인 문학 무료강좌를 들어 보자고 권유를 해서 갔습니다.

그 때 순간적으로 돈키호테문학과 스페인 문학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또, 그 시기 학교 생물수업시간에 '잡종강세’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아시다 시피 '잡종강세'는 부모 양쪽의 장점 유전만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 입니다.

당시 독일문학은 우리나라에서 번성할 만큼 이미 크게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돈키호테와 스페인 문학의 미답지를 접목시키면, 요즈음 표현으로 우성인 하이브리드 문학(민교수께서 '잡종강세' 문학이라고 표현)을 탄생할 수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1차대학은 서반어과가 없다시피 했습니다. 한국외국어 대학은 2차였기 때문에 1차 시험을 아예 안보고 합격했고, 졸업할 때는 전체 수석졸업도 해 봤습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내가 수석 졸업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으세요 허허...) 덧붙이자면, 내가 대학교 2학년 때부터 교수들도 못하는 스페인어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 입니다. (이번에는 별로 안 놀라네요 허허허...)

▲2016년 노벨문학상 추천위원회인 유럽 한림원 Mihai Eminescu 세계시인상 상장 및 트로피ⓒSR타임스

Q. 놀라는 이유가 전교수석을 할 수 있는 것은, 타고난 수재이기도 해야 하지만 성실한 노력이 있어야 하잖아요. 수재는 대부분 게으른 편이라는데... 그렇지 않았군요. 그럼 시인이 되기 위해서 그 당시는 신춘문예라는 등단을 통하는게 일반적 아니었습니까?

== 맞아요 저도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려고 노력했습니다. 196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부문 당선자인 김원호 시인과 함께 최종 다섯번 심사까지 거쳤습니다.

그러나, 제가 새로 쓴 '달'이라는 시가 최종 접전 끝에 탈락했다는 후문을 들었습니다. 실망한 나머지 신춘문예와 거리를 두고 방황도 하고 군대도 갔다 오고 졸업할 즈음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유명한 문학지 ‘창작과 비평사’에서 기성 문인과 신인을 막론하고 작품만 보고 등재하는 시스템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공모해서 내가 창비1호시인이 됩니다.

그 때 작품이 '밤으로의 작업' 입니다

‘나는 나다

나는 

한국

外國語 대학

졸업반 우등생…’

 

이렇게 진행되는 내 시는 산문시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반시(Anti-poem)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가 나오면서 그동안 서정시 일변도의 시단의 풍토가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6대 일간지에서 평하기도 한국역사의 ‘뻘’ 속에서 한국의 발전을 개척하는 시라는 격찬도 있었습니다.

 

Q. 당시 ‘창비’가 발굴한 시인이면 시인으로서 활동도 보장될 뿐 아니라 사회적인 인정도 되는 분위기였을 텐데요. 

스페인 유학을 떠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스페인 문학을 공부해 우리 문학과 접목해 새롭고 뛰어난 '잡종우성’을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어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내 입장에서는 스페인어를 통해 우리의 정서인 혼을 접목시켜 보고 싶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어 권역은 문학분야에서는 영어보다 훨씬 오래 되고 앞선 전통이 있었죠. 그래서 스페인 시인도 아니면서 오묘한 스페인어를 활용한 시인이라는 능력을 평가 받고 싶었고, 유학 일년만에 ‘마차도 문학상(Certamen Poético de los Hermanos  Machado,Madrid) ’을 받게 되면서 성취를 위한 발판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욕심은 박사학위를 취득해야 시인 활동을 하면서 '선생님'이라는 직업도 가질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서 생활인으로서 안정도 꾀 할 수 있다고 판단 했었습니다.  

▲한국무용 산조 인간문화재 이길주여사와 변함없이 단란하게 지내고 있는 민교수ⓒSR타임스

Q. 스페인 생활은 어떠 했습니까? 유학을 갔지만 태권도 사범으로 활동도 활발했다고 들었습니다?

== 고등학교 때부터 군대까지 열심히 태권도를 했기 때문에 공인 3단 단증을 받았습니다. 또 그 때 스페인에서도 태권도 열풍이 불어 내가 가진 도장에 단원이 200명 가까웠고, 승단 시험 볼 때는 800명 정도 단원이 시험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안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계획한대로 마드리드대에서 석·박사학위도 취득했습니다. 학비조달을 위해 시작한 아르바이트로 문을 연 태권도 도장이 아주 잘 되었습니다. 제 인기도 좋아 스페인에서 오리엔트 시계광고 모델도 할 정도였습니다.

박사학위를 가져도 당시는 스페인은 국내인이 아니면 대학의 정교수가 될 수 없고 강사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스페인에서 제가 네가지 직업을 가졌습니다.

대학에서 강사, 태권도 사범, 또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 거기에 스페인 시인으로서 활동도 꽤나 열심히 해 냈습니다.수입면에서 태권도 도장 수입만도 큰 금액의 수입이 보장 되었습니다.

시인으로서 시작 활동도 만족했고요. 오죽하면 1968년 유학가서 1979년 돌아 올 때까지 한번도 한국에 온 적이 없었고, 굳이 오고자 하는 의욕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Q. 그럼 대학의 정교수가 되지 않아서 귀국을 하게 돤 것인가요?

==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스페인에서 지내기가 좋았습니다. 스페인의 분위기가 나의 정열적이고 자유분방한 분위기 하고도 잘 맞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나의 모교인 한국 외국어 대학 이사장님이 스페인이 자주 들리는 일이 있어 만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모교로 올 것을 2년가까이 종용 하셔서 1979년 스페인 문학사 책 한권과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1987년 고려대학교로 옮겼고, 2008년 정년 퇴직했습니다.

 

Q. 한국에 귀국해서 약 30년 가까이 대학에 있으면서 시작 활동도 계속 하셨나요?

== 물론입니다. 스페인 시도 한국에서 계속 발표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한국문단에서도 귀국해서 10권이상 시집을 냈습니다. 그 과정에 2002년 ’나무나비나라’ 로 한국시문학상도 수상했습니다.

덧붙여 2005년 돈키호테 1,2권 주석 해설 완역을 비롯해 수십권의 스페인 문학 번역서를 냈습니다. 또, 한국대학에서 필수적인 논문 및 연구서 수십권도 저술했습니다. (하면서 A4 6장 분량의 이력, 약력 및 저술 목록을 출력해 준다. 목록을 보면서 민용태 교수께서 허명으로 세상을 사신 분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 유학시절 태권도장을 열어 국위선양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광고모델도 했었다(스페인 언론에 난 사진 .오른쪽 당시 민용태 관장)ⓒSR타임스

Q. 교수와 시인의 본업에 분명히 충실 하셨습니다. 이 기간에 교수님은 사회적 반향을 크게 일으킨 사건에 직, 간접으로 관여한 시간들이 아니었습니까? 우선 연세대학교에 계시던 고 마광수 교수님의 외설논란에 검증단으로 참여해서 사회적 통념을 무시(?) 한 증언을 했던 일이 있었죠? 또 유명대학 교수로서 TV에능프로에 출연해서 당시에는 거룩한(?) 직업의 표상인 교수의 격을 떨어뜨렸다는 일부의 비난도 있었지 않았나요?

== 나눠서 말씀 드릴까요?

아시다시피 당시에 연세대학교 마광수교수가 ‘즐거운 사라’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당시 그 소설이 외설이라고 검찰에 고발되어 재판을 받을 때, 나도 자유분방한 행동, 극도의 자유주의자 교수라는 평가를 일부로 부터 받았기 때문에 검증단으로 뽑혔다고 보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검증단 중에는 한국문학계를 대표하는 분과 내가 국제 팬 클럽 한국대표를 하기 때문에 문학차원에서, 세계적인 문학경향 관점에서는 이 소설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을 가진 사람으로 내가 선정된 것입니다.

담당 검사가 소설 200여페이지 중 7곳이 음란표현이라는 주장에 대한 검증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나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소설의 그 많은 장면 중 단지 7곳의 표현이 음란이라는 것은 전체 맥락을 무시한 기계적 사회통념이라고 반박 검증했습니다. 물론 문학적 가치도 보장되는 작품이라는 나의 소신도 밝혔습니다.

재판과정은 새로운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긍정적인 부분이 있었고, 언론도 내 주장을 옹호하는 여론을 형성하는 논조를 보였습니다.

▲틈만나면 빌라 정원을 산책하면서 소리내어 시를 암송하고 시상도 가다듬는다는 민용태 시인. ⓒSR타임스

Q. 교수님 개인한테는 외부에서 발생한 재판으로만 끝나지 않고 대학교 내에서 교수생활을 위협받는 일로 확대되었다면서요?

== 물론 재판도 긍정적으로 끝날 것 같았지만 판결을 3년이나 유예하다가 유죄선고로 끝을 냈습니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시대가 지나치게 상대방이나 제 삼자에게는 윤리적 잣대로 단죄하는 한국사회의 패쇄성에 다시 한번 전율을 가졌습니다.

저한테 학교 내에서 사회적 통념에 어긋나는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보직교수들이나 동료교수들에게 질시에 가까운 배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보직총장이 동문회에서 민교수 사직서를 받으라고 항의가 들어온다고 하면서, 그 총장이 동문회측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나한테 확인서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확인서 내용을 '나는 음란소설을 쓰지 않겠다' 로 적어 달라고 했습니다. 기가 막혔지만, 거대조직에서 한 개인을 상대로 이지메(집단 따돌림)을 행할 때 약한 개인 교수가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은 타협과 순종 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전횡하는 학교조직은 나에 대한 시기와 질시로 나를 고립시켰지만, 학생들은 수강신청을 한 강좌에 1천 명에 가까운 수강 신청을 하기 때문에 대강당에서 강의를 진행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TV 예능 프로그램에 고정적으로 출연해서 많은 화제와 논란을 동시에 불러온 ‘이경규가 간다’ ‘도전지구탐험대’ 출연 당시의 모습ⓒSR타임스

Q. 이해가 됩니다. 사회적으로 인기가 있는 교수셨고, TV예능프로그램에도 고정적으로 출연했으니, 주변 교수들로부터 얼마나 시기를 받았겠습니까? 예능프로그램은 어떻게 출연하게 되었나요? 방송에 출연하는 걸 좋아 했나요?

== 사실은 지상파 출연 전에 EBS(한국교육방송)에서 스페인 어 가르치는 강의를 10년 가까이 하면서, 강의자체를 재미있게 한다고 소문이 났었습니다. 

당연히 지상파 KBS와 MBC에서 섭외가 들어 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대학교수가 예능프로에 나가는 것을 백안시 하는 시대였습니다.

나도 처음에도 망설였지만, 사람들한테 시 예술을 소개하면서 대중성을 확보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시 문화가 일반인들하고 호흡 못하고 시 문학 하는 분들 하고만 공감한다면, 당연히 예술의 범주가 축소될 수 밖에 없고, 시 예술 자체도 사변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커짐에 대한 우려가 있었습니다 

또한, 서정적이고 소탈하면서도 직선적인 내 성격으로서는 시가 고급문화 범주를 지키다 사라지는 것보다 대중문화와 가까워져 일반인들과 공유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민용태 교수댁 거실에서 인터뷰하는 홍용락 고문ⓒSR타임스

Q. TV 출연을 통해서 시 예술을 일반인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대중문화 화 하자는 목적을 이뤘습니까?

== 완전할 수는 없죠. 처음에는 시를 소개해서 일반 시청자들이 많이 인지하도록 노력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재미위주로 추구하는 TV프로그램 컨셉과 잘 맞지 않아 곤혹스러울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TV출연을 하는 것을 계기로 소위 사회적으로 고급문화 예술을 하는 사람들도 대중문화와 호흡하지 않으면 궁극적으로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는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은 오히려 고급문화의 전달을 대중문화가 앞장서서 선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클래식하는 분들과 유행가 부르는 가수들이 같이 공연을 해도 대중들은 큰 이질감 없이 보고 받아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TV출연할 때 40년 초등학교 교사를 하신, 작고하신 아버님이 아들이 대중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다고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작은 효도라도 한 것 같습니다.

▲ⓒ홍용락 논설고문

또한, 제가 앞서서 시 예술을 대중문화 매체에 접목시키려 했던 것에도 작은 보람을 가집니다.

그리고 나도 이제는 특별한 장소가 아닌 곳에서, 대화중이라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시를 낭독해 주는 습관을 생활화 하면서 나름대로 시의 일반화와 대중화에 앞장서서 가고 있습니다 .

 (인터뷰 내내 느끼는 것은 천재 소년 시인이었지만, 지금도 일반인들이 따를 수 없는 문학적 감성을 분명히 가진 분이다 라는 것을 공감하게 되었다. 머리로는 재능이 주는 이상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가슴은 의도적으로 일반인들과 똑 같은 상식적인 생활인의 자세로 살고 있는 분이라는 것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내년에는 스페인 마드리드 출판사 (E. Huerga y Fierro)에서  내 시 전집을 내겠다고 합니다. 또한 내가 회장으로 있는 아시아 스페인어문학회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려요. 그 기회에 내 시 출판기념회도 가질 예정입니다. 제가. ‘스페인 왕립 한림원’은 종신위원입니다. 스페인과 유럽 문단에 좀 파문이 일겠죠?” 하하...)

 

 

홍용락 논설고문  hyrac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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