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도 후배 군인들에게 국가안보가 모든 것에 앞서는 최우선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후배들의 분발을 촉구한다는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SR타임스
▲현재도 후배 군인들에게 국가안보가 모든 것에 앞서는 최우선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후배들의 분발을 촉구한다는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SR타임스

◆ 홍용락 고문이 만난 '시대를 바꾸는 사람들' [15] 60년대 말 단신으로 휴전선 넘어가 '북한군 33명 응징 사살' 이진삼 前 육군 참모총장

약속된 충청향우회 회장실에서 만난 이진삼(85) 전 육군 참모총장은 막 1군사령관 출신들 모임에서 식사를 마치고 돌아 온 직후였다.

식사 잘 하셨냐고 인사하자, 그 자리가 군대서열로 실제적인 선임이어서, 후배 1군 사령관 출신들에게 남북대치 하에 있는 우리의 약해진 국방력 회복을 위해 후배 장군들이 적극 나서 주기를 강조했다고 했다.

잠깐 뵙는 사이에, 총장님은 톱니바퀴 처럼 정확하고 치밀하면서도, 연세가 믿기지 않을정도로 매사에 초집중력을 유지하고 살고 계시는 분으로 느껴졌다.

50년 전의 일에 대한 숫자 기억이 명확할 뿐 아니라, 날짜까지 몇 년도 몇월 몇일에 대해 정확한 기억을 가지고 계셨다.

그 연세쯤 이면 몇 십년 전 알던 분 이름은 모르는 것이 예사인데, 정확하게 기억해 낸다.

육사(15기)를 거쳐 별 넷 육군대장과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평생 군인이었던 것 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1960년대 말 북한이 남한 울진, 삼척 등에 무장공비를 보내 대한민국을 교란하자, 1,2,3 차에 걸쳐 직접 휴전선을 넘어 북한군 진지에 가서 북한군 33명을 사살했다.

일명, 대북 응징 보복 작전을 직접 수행한 전투력을 보여주는 참 군인이었다.

그 외에도 1968년 1.21사태 등 대간첩작전에서 직접 총을 들고 교전하며 간첩들을 사살하며 보인 군인의 참모습은 전쟁 등의 현장에서 전투하는 것이라는 본보기를 보여 줬다.

장군 진급 후에도 야전군을 자원하면서 대북 전투 현장에서, 직접 제 4땅굴을 발견한 것도 적과의 대치하는 군인만이 진짜 군인의 본분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했던 장군이다. [편집자 주]

 

- 60년대말 전향한 무장공비 넷과 함께 3차례 휴전선 넘어 북한군 습격해 33명 사살한 대북응징작전 앞장

- 소속부대 불문하고 군인은 적과 대치 현장에서 전투로 승부한다는 태생적 야전 유전자로 군생활

- ‘강력한 응징만이 적의 도발을 방지한다’ 는 신념으로 이 나라를 지켜온 4성장군의 포효

- 사단장, 군단장, 군사령관 7년 끈질긴 노력과 집념으로 제4땅굴 발견...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야전성 있는 군인의 표본

 

Q. 이 전 참모총장님, 군대 생활 중 1968년도인가요? 귀순한 남파 무장공비들을 재 훈련시켜 세번이나 휴전선 넘어 북한군 진지에 들어가서 적군 33명을 사살한 얘기가 압권이라고 합니다. 사실 휴전 중이었는데,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요?

== 휴전 중이어서 불가능하다면 아마도 휴전협정은 위반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 사건이 공식으로 밝혀진 것이 2008년 10월 8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당시 기무사령관 김종태 중장이 그동안 법적시한으로 정보 통제된 비밀 문건 9건을 해제하면서 그 일을 공식적으로 공개해서 알려졌습니다.

그 기간 정보가 통제된 것은 아마도 그 일이 1968년도 당시에, 휴전협정 위반으로 내가 적어도 UN군들한테 문책을 당할 수도 있었지 않았겠어요.

▲방첩대장시절, 위장 자수 한 이수근 강연을 듣고 위장 자수 했다는 것을 간파해서 끈질긴 공조수사를 통해 밝혀냈다.ⓒSR타임스
▲방첩대장시절, 위장 자수 한 이수근 강연을 듣고 위장 자수 했다는 것을 간파해서 끈질긴 공조수사를 통해 밝혀냈다.ⓒSR타임스

Q. 군대를 다녀 온 분들도 우리 국군이 휴전선 북쪽을 넘어가서 작전을 한다는 것이 전시가 아니고서는 현실적으로 상상이 잘 안됩니다.

휴전 후 북한은 그 동안 수시로 넘어왔지만 말입니다. 남한 국군이 휴전선 넘어가 북한군을 공격하면 그날로 전쟁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 그렇죠. 우리는 평화를 지키자는 목적으로 방어를 하는 군대였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5.16이후 남북한 경제력이 차이가 나자, 한국정부를 전복시키려고 1966년부터  남한 전역에 무장공비를 57회 가까이 침투시켰고, 1967년에는 118회나 침투시켰습니다.

당시 한국은 미국과 함께 베트남에 파병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당시에 휴전선 근처 아군 초소가 습격 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무장공비가 아군 전방 사단에 침투하여 양민까지 학살하고 북으로 돌아가는 일도 있었지요. 전방 모 사단에서는 부연대장과 딸을 비롯한 가족까지 살해당하는 만행도 있었습니다.

당시 나는 방첩 부대 중대장을 맡고 있었고, 우리 국군이 당하는데, 젊은 혈기로 더 이상 참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참다 못해 방첩부대장을 찾아가 내가 북한으로 가서 우리 군이 당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대북 응징보복작전을 펼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했습니다.

 

Q. 당시 방첩부대는 그 유명한 보안사령부, 기무사령부의 전신이 아닌가요? 그 부대는 무장공비를 잡는 부대이지, 북한에 침투해서 응징하는 부대는 아니지 않습니까? 부대장 허락은 받고 시작했습니까?

== 당시 방첩부대장은 나이가 있는 분들은 알 수 있는 윤필용 장군이었습니다. 한국군 장교가 직접 앞장서서 북한에 침투, 공격을 하는 계획을 아무리 북에서 무장공비로 남파 되어 검거되거나 귀순한 사람을 데리고 한다고 해도 쉽게 허가 될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앞장서서 작전을 하다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국가에서 책임질 일이 없을 것이라면서 반 허락을 받아 냈습니다.

즉, 내가 북한땅에서 북한출신 전향한 무장공비와 작전 중 죽으면, 나를 굳이 남한 장교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북의 특수부대원 무장공비들이 검거나 귀순되면 방첩 부대 서빙고 분실에서 수용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과 같이 북에 침투하면, 나 또한 사망 후 북에서 남파한 공비로 소위 신분 세탁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참 군인은 전쟁에서 이기는 야전성을 가져야 한다며, 군사령관 시절에도 전방고지를 수시로 방문해 독려하는 이진삼 사령관ⓒSR타임스
▲참 군인은 전쟁에서 이기는 야전성을 가져야 한다며, 군사령관 시절에도 전방고지를 수시로 방문해 독려하는 이진삼 사령관ⓒSR타임스

Q.  장군님이 목숨을 걸고 자원했기 때문에, 부대장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던 거군요? 그 이후에 작전은 어떻게 진행 되었나요?

== 당시 북 특수부대원 무장공비 출신 중 네 명을 선발해, 북의 침투 지형을 고려해 혹독한 지옥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북에서 특수부대원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무술, 사격, 체력 등등은 기본을 갖춰 있었습니다. 나 또한 청소년기부터 단련된 태권도, 축구와 군대서 익힌 특공무술 등 온갖 운동으로 체력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훈련에서 앞서면 앞섰지 뒤질 이유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같이 침투해서 적진을 유린하는 데는 협동심을 기르는 훈련이 우선적으로 필요했습니다. 또 하나는 그들도 어차피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임무를 받아 생포되거나 전향한 사람들이었지만, 나는 그들을 검거한 국군 장교입니다.

피나는 훈련을 거듭해 북으로 침투했을 지라도, 그들이 나에게 총구를 바꿔 겨누면 이 작전은 허사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훈련기간 내내 이들과 진심으로 인간적인 유대와 신뢰를 쌓았습니다.

그런 후에 강원도 지역에서 북에 침투해 북한군 13사단장을 살해하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작전개시 전 밤에 몰래 가족에게 눈물로 유서까지 써 놓고 1967년 9월 어느날 출발했습니다.

 

Q. 그 시대를 살아온 저로서도 현실적으로 긴가 민가 믿겨지지 않습니다. 마치 영화 같은 얘기 같습니다. 그래서 계획했던 성과를 얻었나요?

== 1, 2, 3차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1차는 비무장지대에 잠복중인 북한군 민경대원을 사살한 후 적 13사단장과 정치부 사단장을 살해하고, 적의 통로에 부비트랩을 설치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기타 부대 배치나 경계상태, 장애물 설치 등의 군사정보수집을 해오는 것이었습니다. 야음을 틈타 전방 우리측 GP를 넘어 적의 초소 몇 곳을 기습하면서 하루 밤낮 교전을 벌인뒤 적 군관 1명을 포함해 13명을 사살하고 무사 귀환 했습니다.

1차 작전의 의의를 굳이 내가 말한다면 그동안 무시로 대남 도발을 해오는 북한에 우리가 정면으로 맞대응한 최초의 대응 보복 작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차 응징 보복 작전은 1차작전이 끝난 후 17일만에 단행되었습니다. 2차작전은 같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1차작전 결과 북측의 경계가 삼엄해 사실상 교전 등이 어렵다고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적의 13사단 지역의 정찰을 통해 군사정보수집과 적의 견고한 GP 하나를 초토화 시킬 예정이었습니다. 예상대로 우리의 1차작전으로 인해 적은 경계가 강화되어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지뢰매설 지역을 주로 통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이틀 주야 작전에서 생존해 올 수 있는 것도 천운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원 중 한명이 목함 지뢰를 피한다는 것이 미끌어져 목함 지뢰를 덮치는 사고도 있었지만 다행히 터지지 않아 전 대원이 살 수 있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나의 땅굴은 열개의 원자탄 보다도 낫다는 김일성의 망상을 여지없이 꺽어버린 제4땅굴을 발견하고 나서 이진삼 1군 사령관ⓒSR타임스
▲하나의 땅굴은 열개의 원자탄 보다도 낫다는 김일성의 망상을 여지없이 꺽어버린 제4땅굴을 발견하고 나서 이진삼 1군 사령관ⓒSR타임스

Q. 지금은 담담히 말씀을 하지만, 피 말리는 긴장 속에 적 진영에 들어가 임무를 수행할 때는 적과의 교전 상황과 악조건 지형지물의 문제 이외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겠습니다?

같이 작전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한 때는 적의 특수부대로 남한에 침투한 무장공비 출신이 아니었습니까? 작전 중에 불안하지 않았나요?

== 맞습니다 그 상황에서는 임무수행이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말씀대로 작전을 같이 하는 사람은 전향한 북한특수부대원 출신들 입니다.

그들이 단합해서 나를 쏴 배신하고 원 소속인 북쪽으로 탈출할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 사이 나름대로 훈련중 부여의 고향에도 같이 다녀오고, 집사람이 해주는 식사도 같이 하는 등 인간적인 친밀감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진심을 보여주고 신뢰를 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작전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특수작전이기 때문에, 나만 저들과 다른 입장이 될 수는 충분했습니다. 나도 그런 걱정을 안했다는 것은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내가 죽기를 각오하고 임무를 수행하려는 결기를 그들 한테 보여줬습니다. 사전에 생포 당할 경우 자결을 준비하는 각오와 의지도 분명히 보여준 것이죠. 또 작전에 들어가서는 사생결단의 신념을 가지고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그들도 묵묵히 협조하고 사선을 함께 돌파했습니다.

 

Q. 그랬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한번쯤 확인해 보는 것이 독자들에게 이해가 더 될 것 같아 묻겠습니다. 2차 작전 때는 같은 지역이어서 경계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천신만고 고생은 했지만 의도한 만큼 원활하게 임무를 수행해 나가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3차도 했다는데, 세운 목표만큼 결실이 있었나요?

== 물론이죠. 3차는 1, 2차 작전을 강원도에서 했기 때문에 적들의 경계가 심해져 경기도 지역으로 옮겼습니다. 이번에도 유서와 자른 손톱 그리고 사진 한 장이 들어있는 지갑을 GP소대장에게 맡기고, 임진강을 도강했습니다.

이번 작전은 비무장지대 너머 적 고지 뒤편에 있는 GP하나를 공격하기 위한 것 이었습니다. 야음을 틈타 적의 경계병들을 하나하나 처치하면서, 목표한 적의 GP를 기습해서 수류탄투척과 기관단총으로 적을 20여명을 사살했습니다.

격전을 치룬 후 새벽 아군 초소로 복귀했지만, 교전 중 같이 작전을 수행했던 대원 한명이 불행하게도 적의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돌아온뒤 아군 GP에서 엎드려 통곡했지만, 그는 살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 동안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힘든 훈련을 같이 해오면서 다져진 전우애가 있었기 때문에, 처한 상황을 떠나 애석하고 안타깝기 그지 없어 한없이 목놓아 울었습니다.

▲체육청소년부 장관으로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 등 메달 획득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는 모습ⓒSR타임스
▲체육청소년부 장관으로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 등 메달 획득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는 모습ⓒSR타임스

Q.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대결과 응징은 그것으로 끝났나요? 또 국군사(史)에 남을 휴전 후 전대미문의 대북 응징 보복작전 이었는데 특별한 보상은 없었나요?

== 암묵적 동의를 해 준 부대장도 크게 기뻐했을 뿐 아니라, 당시에 대통령인 박정희 대통령도 청와대로 불러 격려를 크게 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일개 육군 위관 장교를 대통령께서 신상도 파악하고, 장군이 꼭 되어 나라 안보에 기여하라고 격려까지 해 주었습니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키(신장)을 물어보길래 165센티라고 하니까, 대통령보다 1센티 크다고 한 말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후 방첩부대장은 같이 계속 근무하기를 원했지만, 나는 두 번, 세 번 요청해 전방보병부대로 전출을 희망했습니다.보병 부대로 전출을 희망한 것은 나는 처음 군문에 들어올 때부터 참된 군인은 '전방에서 나라 지키는 보병이다' 라는 의지가 확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방첩 부대에 근무하면서 나라를 위한 보람도 있었지만, 대 간첩, 대 공비 작전 때 희생된 전우들 생각을 하게 되면은 살아남은 자의 괴로움과 자책감이 교차하였기 때문입니다.

 

Q. 총장님은 적과의 전투에서는 초인적 전투력을 보여줬지만, 전우애 앞에서는 눈물도 마르지 않는 단면을 보여주는 상황이군요.

그런데 일반인들이 알기로는 방첩 부대의 임무는 적에 대한 정보수집과 분석을 통해 일선 군인들의 효율적인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을 돕는 역할로 알고 있는데, 총장님은 앞에서 말한 응징보복작전 이외에도 무장공비와 직접 전투를 벌여서 사살하는 전투 현장에 치중한 것 같습니다?

== 사실 나는 방첩 부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소령이 맡는 사령부 직할 특공 대장을 대위 진급 예정자 중위 신분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게 1964년도 였습니다. 당시 방첩 부대 특공대장은 28명 정도 지휘병력을 데리고 간첩을 회유 역이용, 접선 등을 통해 간첩을 잡아내는 일을 했습니다.

나는 전국 어디에서든지 간첩과 무장공비가 나타나면 출동해서 지휘관들에게 작전을 조언해 주기도 하면서, 돌발상황에서는 내가 직접 교전하면서 무장공비와 간첩을 사살하거나 검거 했습니다.

 

Q. 방첩 부대 특공대장을 하면서 직접 검거와 전투를 벌이기도 한 것은 전투력을 가진 군인 본연의 야성(野性)이 나타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 어떤 전투가 있었나요?

== 대표적인 것이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까부수러 왔다”는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습격 시도 사건인 ‘1.21사태’ 때 입니다.

나는 당시 검거된 김신조를 1차 심문해서 “박정희 목 따러 왔다”는 임무에 대한 진술과 함께 편성, 장비, 훈련, 습격, 철수로 까지 파악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파악한 무장공비일당들의 작전계획과 침투로, 철수로까지 우리측 작전부대에 알려줘서 2주만에 29명을 사살하고 1명 월북, 1명 귀순으로 작전 종결을 신속히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방첩 부대 특공대장인 나는 자수한 김신조를 앞세워 특공대원 25명을 지휘해서, 비봉 승가사 옆에서 드보크(간첩 침투장비 비밀 매설지)를 발견해 침투 장비도 회수했습니다.

또 적의 도주로를 사전 확인하는 과정에서 나와 대원 3명과 김신조가 매복한 공비들과 눈속에 갇혀 치열한 교전까지 하였습니다.

▲육군참모총장시절 한.미 군사동맹 강화를 위해 콜린 파웰 당시 미 육군 전략사령부 총사령관과의 회담 석상에서 이진삼 총장ⓒSR타임스
▲육군참모총장시절 한.미 군사동맹 강화를 위해 콜린 파웰 당시 미 육군 전략사령부 총사령관과의 회담 석상에서 이진삼 총장ⓒSR타임스

Q. 방첩 부대 특공대장이었지만, 실제는 야전의 전투군인 처럼 싸웠네요. 그럼 1,21사태 외에 직접 간첩을 검거하고 전투를 벌인 경험은 없나요?

== 1,21사태 이후 방첩부대에서 소령이 받는 교육과정인 고등군사반을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나는 원래 병과인 보병의 야전군 지원을 희망했습니다. 전투부대 지휘관을 원했던 것이죠.

그 이유는 내가 방첩 부대 후신인 보안부대에 계속 있을 경우, 군인으로서 성공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관 학교를 나와서 장군이 되고 싶은 것이 군인들로서는 목표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나는 고등군사반을 졸업하고 발령받은 곳은 보안사령부 충남의 대공과장으로 중령보직 자리였습니다. 소령 진급 예정 대위로서 또 2계급 상위 중령 자리를 보임 받았습니다.

자랑 같습니다만, 나는 위관 장교 시절 부터 9개 보직을 계급보다 상위 직책을 수행했습니다. 새로 보직 받은 직책의 임무는 서해안으로 침투하는 간첩을 검거하는 보직이었습니다.

충남 507대공과장을 10개월여 맡으면서, 충남 당진에 침투한 무장간첩을 작전 부대와 함께 1명 체포, 1명 사살 했으며, 체포한 간첩을 심문하여 남파간첩 1명과 포섭된 일당 9명을 체포했습니다.

또한, 체포되어 전향한 남파간첩을 이용한 역용접선공작을 통해 1970년 충남 서산 승언리 해안에 침투한 무장간첩 3명을 사살하는 전과 등을 올렸습니다.

 

Q. 소규모 대간첩 작전이라도 워낙 강도높은 훈련으로 무장한 적들이기 때문에 아찔한 순간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 1968년 11월 서산 가야산 주변에 무장간첩 추격을 작전부대들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운전병과 수행 상병 1명  등 총 3명이 간첩이 은신한 능선에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근처에는 같은 보안부대 지역분견대장인 소 모 소령과 2명의 하사관이 무장간첩을 에워싸고 감시하고 있었지요. 그 때 15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무장간첩이 소 모 소령 일행에게 사격을 가했습니다. 소 모 소령은 그 자리에서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소 모 소령을 후송하고 나서 나는 운전병과 함께 포복으로 우회해서 간첩 은신처로 접근했습니다. 그 사이 운전병의 철모에 탄알이 명중하였으나, 다행히 튕겨 나갔습니다.

나는 침착하게 간첩 은신처 뒤 20미터까지 포복으로 단독 접근해서 수류탄 두 발을 투척해 사살했습니다. 이 사건이 무장간첩 임관재, 박일근 사살 작전이었습니다.

같은 부대원이었으나 불의의 습격으로 사망한 소 모 소령은 직책상 상위 직위였던 나로서는 무한한 안타까움이 앞섰던 작전 상황이었습니다.

▲군인은 국가와 국민을 지켜야 하는 오직 한 가지 사명 뿐임을 강조하며, 지역 내 대민 봉사에 앞장서는 이진삼 당시 1군 사령관ⓒSR타임스
▲군인은 국가와 국민을 지켜야 하는 오직 한 가지 사명 뿐임을 강조하며, 지역 내 대민 봉사에 앞장서는 이진삼 당시 1군 사령관ⓒSR타임스

Q. 젊은 시절 군대 생활은 부대 성격을 떠나 적과 대치하는 전투현장에서 활약하신 것 같습니다.  당시 베트남 전쟁에 우리 국군이 참여했는데, 총장님도 파병 대열에 참여하셨습니까?

==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저도 그러고 보니까, 보병부대 생활에는 최전방에서 적과 대치해서 직접 전투를 하거나, 아니면 적의 기습작전을 탐지하는 제4땅굴 발견 등을 했고, 방첩부대, 보안부대 생활에서도 직접 적과 교전하는 전투현장만 찾아 다닌 군대 생활이었던 것 같습니다.

베트남 파병도 예외없이 내가 참전했습니다. 젊은 혈기에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고 출병하다가, 동기생으로부터 소문을 듣고 부산 출항 직전 잠깐 만나본 아내때문에 울컥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베트남 전쟁에 1965년 맹호사단 기동대장 겸 군수사령부 보안대장으로 1년 정도 참전 후 귀국했습니다. 베트남에서 내 임무는 기동대장으로서 한국을 포함하여 미 고위장성, 상·하의원, 행정부 장관인 한·미 주요인사(VIP)를 경호하는 임무였습니다.

아시다시피 베트남 전쟁은 전선이 없이 진행되기 때문에 베트남에 온 요인들이 이동할 때 어디서 베트콩이 나타나서 조우할지 몰라 대단한 긴장 속에 경호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다른 임무는 보안부대장 역할이었습니다. 부대원들과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지역의 행정 공무원들로부터 적의 동태에 대한 첩보를 수집해 아군에게 제공해서 효율적 전투를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19번도로를 따라 ‘안욘’ 군이라는 지역에 군수를 만나러 갔습니다. 베트남은 원체 날씨가 무덥기 때문에 낮 12시부터 2시간 동안 ‘시에스타(낮잠)’시간이 있습니다.

시에스타 시간에 그 지역을 방문했는데, 전 마을이 조용한데 50미터 논 속에서 베트콩이 폭발물을 설치 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같이 간 운전병과 포복으로 접근해 베트콩 2명을 육박전 끝에 제압해서 체포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내 군대생활은 한국에서나 베트남에서도 적과 직접적인 전투를 벌이는 일이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Q. 젊은 시절 적과 직접적으로 전투를 하면서 보낸 군대 생활이, 장군이 되어서도 적이 땅굴을 파서 전선 후방에 쳐들어 오려는 음모를 발로 뛰면서 직접 찾아냈다면서요?

== 네, 제4땅굴을 발견한 것입니다. 제4땅굴은 제3땅굴이 발견된 지 12년만인 1990년 3월 3일 양구 동북방 26킬로미터 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지하 145미터에 높이와 폭이 1.7미터 길이가 2,052미터이며, 군사분계선 남쪽이 무려 1,028미터나 됩니다. 내가 21사단장때부터 감지를 해서 3군단장과 1군사령관을 하면서 7년간 끈질긴 집념으로 발견한 땅굴입니다.

제4땅굴은 동부지역의 험준한 산악지형에는 땅굴이 효용성이 없다는 판단을 한 상황에서도,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곳에서 북한은 침략야욕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하는 땅굴입니다.

또 하나 강조할 점은, 시추와 발견과 관통 뿐만 아니라 역 갱도 공사까지 이전의 땅굴 발견이 미군 등 외부에 많은 부분 의존했음에도, 제 4땅굴은 국군의 단독 작전으로 발견한 최초의 남침용 땅굴이라는 점입니다.

 

Q. 제 4땅굴은 총장님 사단장 시절에는 발견이 안되었습니다. 군단장, 군사령관을 이 땅굴 발견하기 위해 그 쪽 지역으로 자원 한 건가요? 우연의 일치 치고는 정말 잘 맞아떨어진 것 같습니다.

== 땅굴 때문에 일부러 군단장과 군사령관을 그 쪽으로 자원 한 건 아닙니다(하하하)

군 인사를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그 땅굴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사단장 시절 어느 정도 확신을 했습니다.

21사단장 시절부터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나는 과학적으로 관측과 시추 및 청음 활동을 집념을 가지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군단장 시절과 군사령관 시절에도 시추기를 옮겨가면서 끈질기게 시추한 결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홍용락 논설고문(사진 왼쪽)과 국가안보가 지켜질 수 있는 것은 국가의 ‘힘’ 뿐이라는 요지로 대담하는 이진삼 전 육군 참모총장ⓒSR타임스
▲홍용락 논설고문(사진 왼쪽)과 국가안보가 지켜질 수 있는 것은 국가의 ‘힘’ 뿐이라는 요지로 대담하는 이진삼 전 육군 참모총장ⓒSR타임스

Q. 앞에서 말씀하신 땅굴은 시추해서 발견하고 관통하면 그만일 텐데...역 갱도 공사 작전은 무엇입니까? 이 때에도 북한 적군과 갱내에서 교전을 하면서 전투를 벌이는 건가요?

== 실제 전투는 없었지만, 그런 상황을 대비해서 관통 후에 갱도에 들어와 있는 북한군의 소탕작전을 준비했습니다.

실제 제 4땅굴은 관통 몇시간 전까지 북한군이 내려와 있었다는 것도 확인 된 바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땅굴 발견과 함께 역갱도 소탕작전이란 적의 반격 대책에 대비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 때 발견을 예상하고 미리 21사단 수색대대를 2개월 강도높은 훈련을 통해 투입 준비를 마쳤습니다. 관통 후에 적이 있으면 갱도 전투로 싸워야 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갱도 내부를 감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예상 출구에 대한 판단과 수색을 실시하여 적이 설치한 장애물 폭탄을 제거해야 합니다.

제 1, 2, 3, 땅굴의 소탕작전 중에는 인명피해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긴장해서 준비했습니다. 실제로 적은 우리가 땅굴 소탕작전에 돌입하자 황급히 퇴각하면서도 목함 지뢰를 묻어 놓아 앞서 탐색하던 군견 한 마리가 산화하기까지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나는 제 4땅굴 소탕작전에 장병들을 군사분계선에서 500미터 전방갱도까지 진출할 것을 명령했으나 이미 적들이 퇴각한 후였습니다. 그러므로 소탕작전으로 군사분계선 앞으로 500미터 더 나간 장병들을 군사분계선까지 500미터 후퇴를 명령한 후 지상 분계선 위치에 지하 콘크리트 벽을 쌓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지하에서도 군사분계선을 확보했다 할 수 있습니다

 

Q. 평생의 군대생활을 적과의 전투를 벌인 참 군인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못다한 얘기가 있으신가요?

 

== 내가 그 어려운 전투에서 승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모태신앙입니다. 대응보복작전에서나 베트남 전쟁에서나 적과 대치된 위기상황에서는 나는 항상 성경을 암송했습니다. 오늘까지 나를 지켜준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홍용락 논설고문
▲ⓒ홍용락 논설고문

(보통사람은 한번도 받기 힘든 국가훈장(외국훈장포함)을 약 17회 받았고, 대통령·국무총리 표창을 21회 수상한 분이다.

대한민국과 사회를 위해 받은 훈·포장이니까,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이 대한민국에서 한 시대를 바꿔 나간 것은 더 이상 이론의 여지가 없을 듯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별종(?)의 인생을 살아온 부분도 있다. 대전고등학교 다니다, 부여고등학교로 축구선수하기 위해 전학했단다. 어느 학교가 더 명문인지, 지금 충청향우회 회장을 하니까, 충청도 분들은  쉽게 판단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어릴 때 부터 소신껏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닦은 결과로 야전군이 아닌 군 체육부대(사격지도단)단장도 경험했고, 체육청소년부 장관으로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에게 금메달도 따게 뒷받침 해서 또다른 애국의 길을 열기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 부여에서 국회의원을 해서 국립대학교로 전통문화대학교를 제자리 매김 하게 하는 교육영역까지 지경을 넓힌 광폭 인생을 살아 왔다.

인터뷰 내내 살아 온 인생을 듣는 것만으로도 때로는 숙연해지고, 때로는 땀을 쥐게 하는 흥분도 되고, 전우애를 말할 땐 코끝이 먹먹해 지는 것 같았다.

그 중에서도 백미(白眉)는 ‘강력한 응징만이 적의 도발을 방지한다’ 는 신념으로 이 나라를 지켜온 별 넷 대장의 포효다.

과연 ‘전쟁보다는 비겁한 평화가 낫다’ 고 읊조리는 유약한 군인들과 정치인들에게 국방과 안보 위기의 참 뜻이 전달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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