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파이어. ⓒ엠엔엠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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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유머, 비극 그리고 사랑을 섬세하게 조합해낸 거장의 스토리 텔링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베를린파를 이끈 주역인 동시에 자유로운 장르의 차용, 다층적인 비유와 알레고리, 독특한 심리적 긴장감, 지적이고 우아한 연출을 특징으로 하는 작품 세계를 구축한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거장이다. 

그에게 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심사위원대상)을 안겨준 작품 ‘어파이어’는 사랑과 낭만이 넘쳐야 할 여름 해변을 배경으로 자기 안에 갇혀있는 예술가에 대한 풍자를 중심으로 젋은 남녀의 드라마를 담아낸 작품이다.

(이 리뷰에는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파이어. ⓒ엠엔엠인터내셔널
▲어파이어. ⓒ엠엔엠인터내셔널

소설가인 레온(토마스 슈베르트)과 사진작가를 꿈꾸는 펠릭스(랭스턴 위벨)는 발트해 해변 근처 별장으로 향한다. 조용한 휴양지를 찾아가는 두 사람은 그곳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휴식이 아닌 일을 해야한다. 레온은 소설을, 펠릭스는 예술학교 입학 포트폴리오를 완성해볼 셈이다. 

겨우 도착한 별장은 뜻밖에도 나디아(파울라 베어)라는 여성이 먼저 차지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레온과 펠릭스는 남아 있는 방을 같이 써야 했다. 펠릭스는 왠지 전혀 문제가 없어했지만, 까탈스러운 레온은 집필 작업에 방해가 된다며 난감해한다. 

다음날 아침 레온은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 나디아와 그녀의 남자친구 데비트(엔노 트렙스)가 한밤중에 내는 소음 때문에 잠을 설쳤기 때문. 하지만 그녀를 향한 불쾌한 감정은 어느 순간 잦아든다. 나디아는 첫눈에 마음을 움직이게 할 만큼 매력적인 여성이었던 것.

▲어파이어. ⓒ엠엔엠인터내셔널
▲어파이어. ⓒ엠엔엠인터내셔널

붙임성 있고 사람 좋은 펠릭스는 나디아, 데비트와 금방 친해진다. 하지만 고집스럽고 소심한 레온은 그들의 주변을 맴돌기만 한다. 한곳에 모인 네 명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미묘한 감정이 오가고 그 사이 멀리서 일어난 산불은 점점 별장 근처까지 닥쳐온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이 그들에게 운명처럼 다가온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신작 ‘어파이어’는 ‘운디네’에 이은 원소 3부작 중 두 번째 이야기다. 숲의 불을 통해 공포와 폭력성을 담는 동시에 해변의 물을 통해 고요함과 평화를 그린다. 

▲어파이어. ⓒ엠엔엠인터내셔널
▲어파이어. ⓒ엠엔엠인터내셔널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이 겸손하게 일정 부분 자신의 모습을 투사했다고 밝힌 레온이라는 캐릭터는 성실함이나 진정성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스노비즘적 인물이다. 항상 바쁜 척하면서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른 성격에 더해 타인의 출신과 직업을 깎아내리며 우월감을 얻는 오만한 캐릭터다.

레온은 스스로 창작자라는 직업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은 그 만의 착각. 별 볼 일 없는 인명구조원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데비트가 놀라운 이야기꾼 재능으로 주목을 받자 그 자리에서 어린아이처럼 심술을 부린다. 단단한 껍질 안에 갇혀있는 레온은 펠릭스가 뛰어난 예술 감각을 인정 받는 자리에서도 불만을 억누르지 못한다.  

▲어파이어. ⓒ엠엔엠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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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렇게 흠모하던 나디아 앞에 이르러서는 단번에 가장 한심한 모습으로 벌거벗겨진다. 인간관계 드라마 속에 담아낸 촌철살인의 풍자와 사회비판의 메시지는 길을 잃은 헨젤과 그레텔 같은 현대인들 앞에 자신을 비춰볼 거울을 제공한다. 

이번 작품은 지금까지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이 만들어온 전작들과는 다른 가벼움이 느껴진다. 고뇌의 무거움보다는 에릭 로메르 감독의 ‘여름 이야기’나 ‘해변의 폴린’ 같은 작품에서 만날 수 있는 일상의 잔잔함과 유머러스한 로맨스 감성이 담겨있다. 물론 관계의 모순과 슬픔, 비극이 교차하는 서사 요소들은 빼놓지 않았다.

▲어파이어. ⓒ엠엔엠인터내셔널
▲어파이어. ⓒ엠엔엠인터내셔널

폼페이 유적에서 영감을 얻은 사랑과 죽음의 이야기는 담백한 내레이션과 함께 마침내 결말에 도달한다. 비로소 나비처럼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세상으로 나온 레온은 미소 짓는다. 자기 안의 새로운 감정을 재발견하는 엔딩은 언제나 로맨틱할 수 밖에 없다. 

내한 인터뷰를 통해 다음 영화에서는 꼭 희망을 담아보겠다고 한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차기작이 기대된다.

▲어파이어. ⓒ엠엔엠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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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파이어(Afire, Roter Himmel)

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

출연: 토마스 슈베르트, 파울라 베어, 랭스턴 위벨, 엔노 트렙스, 마티아스 브란트

장르: 드라마

수입/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

러닝타임: 102분

개봉: 2023년 9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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