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평화주의자가 문명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를 만들어낸 시대의 모순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는 20세기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변곡점을 가져온 이론 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리뷰에는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눈을 뜨는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 조사관은 그에게 진행 중인 청문회가 재판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일부러 협소한 방에서 진행하는 이 비공개 보안 청문회는 이미 판결이 확정된 재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사상검증부터 사생활까지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발가벗기고 분열시켜가며 오펜하이머를 구석으로 몰아간다. 

오펜하이머는 부유한 집안에서 과잉보호를 받으며 자라났다. 그는 영리하고 지적이었지만, 자기 집에 있던 피카소 그림만큼이나 매우 복잡한 내면을 가진 섬세하고 예민한 인물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에는 열등감과 자기혐오에 빠져 살인미수까지 저지를 정도로 정신적인 위기에 내몰린다.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우주의 비밀과 우울감만이 가득했다. 당장 미치거나 자살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 오펜하이머를 구원해준 이는 양자역학의 기초를 마련했던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 닐스 보어(케네스 브래너)다. 그의 숨통을 조였던 물리학은 역설적으로 생명수가 되어준다. 그리고 양자역학의 에너지는 그를 정신적으로 충만하게 했다. 

유대인이었기에 나치 독일의 공포를 본능적으로 직감했던 오펜하이머. 그는 누구보다 먼저 핵무기 개발에 성공해 2차 세계대전을 빨리 종식시키고 싶어했다. 그래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뛰어들어 뉴멕시코 사막 위에 광신도 집단 같은 비밀연구소를 만들고 핵무기 개발을 주도한다.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그는 핵 분열과 융합 속에서 평화로운 인류의 미래를 본 이상주의자였다. 인류가 그토록 숭상해온 태양신의 힘을 손에 쥘 수 있는 순간이 도래하면 그 실체를 곧바로 알리려 했다.

삶과 죽음을 하나로 봤던 그는 핵무기라는 죽음의 도구가 역설적으로 평화의 도구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 인류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직접 목도 한다면, 한 단계 각성해 전쟁을 영원히 멈출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래서 히틀러가 지하 벙커에서 자살을 해도 핵무기 개발을 멈추지 않고 목표를 일본으로 바꾼다. 그는 아무도 없는 도쿄만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떨어뜨려 20만명을 희생시키면, 당장 전쟁터에서 죽어갈  수 백만명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인류 전체를 전쟁에서 영원히 해방 시킬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다. 트롤리 딜레마에 대해 그의 판단은 명확했다.

그의 생각대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식민지였던 조선은 핵폭탄이 나가사키에서 폭발한지 6일 후인 1945년 8월 15일 빠르게 독립할 수 있었다.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그러나 핵무기의 상호확증파괴 앞에 전 세계가 평화 공동체가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은 이뤄지지 않았다. 시대가 바뀌고 미국이 동맹국이었던 소련과 냉전을 시작하자 노동운동가이기도 했던 오펜하이머의 사회주의 성향과 인류에 대한 신뢰는 그의 앞길을 막는 독이 된다. 

오펜하이머는 일본에 사용한 핵무기 이상의 것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때문에 더 강력한 수소폭탄으로 소련 공산주의자들을 쓸어버리겠다는 동료학자 에드워드 텔러(베니 사프디)와 갈등을 빚는다. 

핵 버튼을 직접 누른 것과 마찬가지였던 트루먼 대통령(게리 올드먼) 앞에서는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실수를 한다. 거기다 아내 키티(에밀리 블런트)를 비롯해 내연녀 진 태트록(플로렌스 퓨), 친동생, 절친 등 그의 주변 사람은 공산당원 전력이 있었다.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세계 최초 핵무기 트리니티 실험으로 핵폭탄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으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물리학자가 된 오펜하이머. 

하지만 그는 전후 미소 냉전 군비경쟁과 매카시즘의 광풍 앞에 정치적 희생양이 돼 축출된다. 정확히는 그의 삶을 지탱해준 평화의 목표를 빼앗긴 것. 그는 이번에도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남들의 괴롭힘에 화를 내지도, 비난의 목소리를 내지도 않고 조용히 시들어간다.

영화에서는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휴머니즘과 윤리적 문제를 동시에 가진 그의 모순점을 자세히 조명한다.

가장 인간적인 학자가 가장 비인간적인 무기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대한 이 극명한 대비는 180분 동안 멈추지 않는 긴장감을 끌어낸다. 이 치밀한 드라마에서 방대한 대사와 컷 분할 편집은 총알과 폭탄 액션을 대신하여 스펙터클한 영화적 경험을 안긴다.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오펜하이머를 소련 스파이로 낙인찍은 마녀재판 5년 후, 미국 원자력위원회(AEC) 전 의장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은 아이젠하위 정권의 천거를 받아 상무부 장관 임명 인사청문회 자리에 선다.

이 스트로스라는 인물은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을 담당한다. 그래서 독립적으로 구분된 흑백 시퀀스로 그의 서사가 함께 진행된다. 이 영화에서는 캐릭터 시점에 따라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대비를 보여준다.

이와 함께 오펜하이머의 복잡한 내면은 빛과 소리를 통해 강렬하게 묘사된다. 아울러 IMAX 카메라로 인물을 클로즈업해 압도적인 심리 전달이 이루어진다.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전기 영화는 다소 지루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연기, 음악, 촬영, 미술, 연출, 편집 등 모든 것에 공백이 없다. 

‘테넷’에 이어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의 음악감독을 맡은 루드비히 고란손은 오펜하이머의 번뇌와 고통을 생생하게 음향으로 전한다. CG 없이 트리니티 실험을 재현한 장면 등은 일반관에서는 느낄 수 없는 IMAX 영화의 장점을 담고 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톰 콘티)과 오펜하이머의 의미심장한 대화로 마무리하는 엔딩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른 영화들처럼 끝난 듯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긴 여운을 남긴다.

키티가 악수를 거부한 에드워드 텔러는 1952년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한다. 이후 미소 간 핵 개발 경쟁은 가속화됐고 전 세계는 핵전쟁 공포에 시달린다. 1967년 오펜하이머가 사망한 지 1년 후인 1968년, UN 총회에서 핵확산방지조약(NPT)이 체결된다. 

프로메테우스처럼 혹독한 벌을 묵묵히 견딘 오펜하이머는 2022년 미국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소련 스파이 누명을 벗었다.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제목: 오펜하이머(Oppenheimer)

수입/배급: 유니버설 픽쳐스

감독·각본: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킬리언 머피, 에밀리 블런트, 맷 데이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플로렌스 퓨 외

촬영감독: 호이트 반 호이테마

음악감독: 루드비히 고란손

러닝타임: 180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국내 개봉: 2023년 8월 15일

스크린 리뷰 평점: 8.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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