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피는 공포 영화…내면에는 인간성 회복 메시지 담아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주인공 헤매는 남자(니노미야 카즈나리)는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인물이다. 지하철에 타고 있던 그는 아이가 울어 곤란한 일을 겪고 있는 여자를 보지만, 다른 이들처럼 애써 못 본 척 외면하며 이어폰으로 귀를 막는다.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가던 그는 헤어진 전 여자 친구(고마츠 나나)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그녀는 임신했다며 병원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못 내리겠다고 고백한다. 당황한 그는 회피적인 태도로 얼버무리면서도 통화를 이어나가려 하지만, 지하도에 들어서자 갑자기 전화가 끊어진다.

이윽고 헤매는 남자는 정체불명의 걷는 남자(코치 야마토)가 계속 나타나는 끝없이 반복되는 지하도 속에 갇혀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탈출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이상 현상도 놓치지 말 것',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 즉시 되돌아갈 것', '이상 현상이 없다면 앞으로 나아갈 것', '8번 출구로 나갈 것'이라는 규칙을 지켜야만 한다. 헤매는 남자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점점 8번 출구에 가까워지는 듯했지만, 지하도는 마치 의지를 가진 생명체처럼 그의 탈출을 번번이 방해한다.

영화 '8번 출구'는 2023년 발매 후 누적 다운로드 190만회를 기록한 동명의 3D 1인칭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 전이공간) 게임을 원작으로 한다. 연출을 맡은 카와무라 겐키 감독은 이 게임을 접하고 단순한 구조 속에 무한한 영화적 가능성이 숨어 있음을 발견한다. 이후 원작에는 없는 다양한 오리지널 요소와 아이디어를 추가해 이번 작품을 완성했다.
카와무라 감독은 도쿄 지하도의 질서정연한 풍경이 어느 순간 악몽으로 전환되는 순간에 주목했다. 영화 속 지하도는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연옥(煉獄)에 비유된다. 마치 연옥에 갇힌 영혼들이 죄를 씻기 위해 불로 형벌을 받듯이 지하도에 갇힌 인물들도 끝없이 고통받으며 헤매는 모습을 담았다.
'스즈메의 문단속' 프로듀서를 맡기도 했던 카와무라 겐키 감독의 '8번 출구'는 미조구치 겐지와 스탠리 큐브릭의 영향을 받은 고전 영화 미학을 바탕으로, 일본 게임과 애니메이션 문화가 감각적으로 결합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는 미조구치 겐지 스타일의 유동적인 롱테이크에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같은 정밀한 공간 통제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부분이 두드러진다. 여기에 공간 전체를 채우는 차가운 조명, 단조로운 색조는 현대인의 익숙한 일상 공간이 얼마나 거대한 공포의 심연으로 완벽하게 전환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틀린 그림 찾기 같은 이 루프 공포 영화는 점프 스케어보다는 관객에게 단조롭고 폐쇄된 지하도 공간에 마치 실제로 갇혀있는 것과 같은 유사체험을 통해 서서히 공포감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또한, 끝없는 루프의 긴장 감각은 정제된 공간미와 리듬감 있는 편집 그리고 시작부터 강렬하게 연주되는 '볼레로(Boléro)'의 점진적 반복 선율은 알 수 없는 감정의 고양감과 동시에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착시 그림으로 유명한 에셔의 '뫼비우스의 띠' 같은 지하도 루프 구조가 만들어내는 심리적 피로감과 폐소공포 요소에는 주인공의 불안정한 과호흡까지 함께 융합되면서 내면의 답답한 질식감이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이 영화에서는 등장 인물들에게는 일체의 이름이나 뚜렷하게 구별되는 캐릭터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에서든 마주칠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을 등장시켜 관객이 인물들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되거나 혹은 객관적인 관찰자 위치에서 바라보게끔 한다.
특히 POV(1인칭 시점) 촬영으로 시작되는 도입부 연출은 관객이 마치 헤매는 남자가 되어 현장 안으로 직접 들어가 듣고, 보고, 걸어가는 것 같은 현실감과 몰입감을 부여한다. 그가 훑어보는 휴대폰 화면 속에는 앞으로의 사건 전개와 관련된 암시적 부분도 노출되므로 함께 탈출 방법을 추리해 나가는 재미도 찾을 수 있다.
헤매는 남자는 나약한 현대인이 겪고 있는 일상화된 무관심과 익명성을 상징한다. 그에게는 임신한 전 여자 친구라는 인간관계의 유일한 존재가 지하도 연옥 안에서 현실로 탈출하고 싶은 중요한 동기로 작동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지하도 바깥 현실에 있는 그녀로부터 멀리 도피하고 싶다는 흔들리는 마음도 품고 있다. 어쩌면 그런 고민으로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하도 연옥의 입구로 안내한 것인지도 모른다. 양가감정의 입체성이 부여된 이 다층적 캐릭터는 새로운 인물과의 접촉과 함께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부단히 정신적 담금질을 겪으며 결과적으로는 인간성 회복이라는 탈출구를 찾아낸다.
'8번 출구'는 겉으로는 공포 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현대인의 윤리적 무감각과 책임회피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인간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행위를 무한히 반복해 직시하면서 과연 어떤 것이 올바른 선택지라 할 수 있는지, 인간 구원 가능성의 확장을 시도는 철학적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다만, 그러한 결말에 이르는 반복 과정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피로감이 관객에게도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에 단점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 즉시 되돌아가라'라는 인디 게임의 단순한 규칙이 '양심에 따라 솔직하게 행동하라'는 범인류적 용기의 메시지로 전환되는 마지막 순간이 인상적이다. '8번 출구'는 21세기 게임 문화의 몰입적 체험이 진정한 의미의 현대적 시네마로 재탄생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 8번 출구(8番出口)
감독: 카와무라 겐키
각본: 히라세 켄타로, 카와무라 겐키
출연: 니노미야 카즈나리, 고마츠 나나, 코치 야마토 외
수입: 미디어캐슬
배급: NEW
개봉: 2025년 10월 22일
관람 등급: 12세이상관람가
상영 시간: 95분
평점: 7.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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