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니아'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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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2000년대는 장르적 대중성과 작가주의적 예술성에 대한 감각을 동시에 섭렵한 젊은 감독들의 작품이 대거 등장하면서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견인했던 시기다. 그중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2003)는 동시대 한국 사회의 감정, 불안, 분노 그리고 사회 계층화를 정교하게 반영하며 시대를 앞서 나갔던 마스터피스다. 

개봉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국내외 시네필 사이에서 꾸준히 재평가와 찬사를 이끌어냈던 '지구를 지켜라!'는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그리스 출신 거장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에 의해 '부고니아'로 리메이크됐다.

▲'부고니아' ⓒCJ ENM
▲'부고니아' ⓒCJ ENM

'부고니아'는 죽은 소의 사체에서 벌이 다시 태어난다는 믿음이 담긴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단어다. 이 영화의 오프닝은 '부고니아'처럼 자연의 생명 순환과 신성함을 숭배하고 있지만, 잘못된 믿음과 망상에 잠식된 테디(제시 플레먼스)의 장황한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그는 지구상에서 벌이 점점 사라지는 '군집 붕괴 현상(CCD: Colony Collapse Disorder)'을 외계인들의 지구 침공을 뜻하는 대표적 징후이자 증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부고니아' ⓒCJ ENM
▲'부고니아' ⓒCJ ENM

테디는 원작 캐릭터 병구(신하균)의 피해망상과 편집증적 확신, 타인과의 소통 불가 성향을 이어받아, 현대 미국의 푸어 화이트(Poor White) 계층에 전환·투사된 인물이다. 그는 확증 편향된 단단한 믿음의 보호막 속에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외부와 단절된 세계를 구축한 음모론자다. 

외계인의 위협으로부터 인류와 지구를 지켜야만 한다는 테디의 거대한 사명감은 자신을 존재케 하는 이유에 가깝다. 테디는 원대한 '지구 지키기' 계획에 자신보다 더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의존적 성향이 강한 사촌 동생 돈(에이든 델비스)을 끌어들인다. 테디의 음모론 가스라이팅은 전염병처럼 돈의 불안한 마음속을 파고 든다.

▲'부고니아' ⓒCJ ENM
▲'부고니아' ⓒCJ ENM

한편, 테디가 물류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바이오 기업 CEO인 미셸(엠마 스톤)은 완벽한 자기관리, 강인한 육체,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다. 그녀는 직원들에게 직장 내 노동 자율성을 강조하는 세련된 경영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직원들에게 어항처럼 투명한 사무실에서 쉼 없이 자신을 갈아 넣으며 일할 것을 우회적으로 강요하는 인물이다.

미셸은 초반 거의 모든 프레임에서 정중앙에 위치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한다. 부와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지배 권력자이자 안타고니스트임을 의도적으로 상징하는 연출이다. 여기에 어리숙하고 초라한 테디와 돈의 모습을 교차 편집해 관객에게 극단적인 계층간 차이를 보여준다. 

▲'부고니아'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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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는 미셸을 ‘인간으로 위장한 안드로메다 외계인’이라고 확신하고 돈과 공모해 그녀의 납치를 실행한다. 어설픈 2인조 납치범들에게 속절없이 당하는 권력자 미셸의 아이러니를 묘사한 납치 소동 시퀀스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란티모스 감독은 시선 집중의 묘미를 살린 촬영과 사운드 설계 그리고 매끄러운 블랙 코미디 연출로 관객들을 납치 사건의 목격자로서 영화 속 깊숙히 끌어들인다.

▲'부고니아' ⓒCJ ENM
▲'부고니아' ⓒCJ ENM

테디는 자신의 내면세계와 완전히 일치하는 낡고 혼란스러운 집 지하에 마련해둔 ‘인류 저항군 본부’에 미셸을 가둔다. 납치된 미셸은 외계인 모선과의 교신 능력을 무력화해야한다는 이유로 머리카락을 삭발당하고 항히스타민 크림까지 잔뜩 뒤집어쓴 채 지저분한 간이침대 위에서 눈을 뜬다.

그녀는 주지사보다 영향력 있는 여성 경영인이다. 그런 그녀가 권력 정중앙에서 끌어 내려져 프레임 왼쪽 구석 피해자 위치로 내몰린다. 미셸은 막무가내로 자신을 외계인으로 몰아붙이며, 지구 침공을 포기하고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납치범들을 향해 기죽지 않고 꼿꼿한 태도로 살아남기 위한 항변을 시작한다.

▲'부고니아' ⓒCJ ENM
▲'부고니아' ⓒCJ ENM

영화 '부고니아'는 원작 '지구를 지켜라!'의 핵심 이야기를 가져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특유의 정적이고 냉정한 미학을 더해 재해석한 작품이다. 원작과 달라진 부분은 등장인물 수와 서브플롯을 줄이고 롱테이크 신 연출과 컷 편집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원작의 키치한 요소를 덜어내고 시대에 맞게 극의 밀도를 높여 캐릭터 아크와 전체 서사 집중도는 한층 향상시켰다. 이에 따라 각 캐릭터가 지닌 목표, 가치관 충돌, 내외적 갈등에서 빚어지는 사건 대부분은 미셸과 테디의 2인극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부고니아' ⓒCJ ENM
▲'부고니아' ⓒCJ ENM

'브루탈리스트'(2024)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2025)에 이어 비스타비전 포맷으로 촬영된 이 작품은 조각상처럼 부각된 등장인물들의 얼굴을 화면에 담는다. 이들은 권력자와 피해자 사이를 오가며 한 꺼풀씩 차례대로 가면을 벗어던진다.

어머니 샌디(알리시아 실버스톤)가 외계인의 비밀 실험대상이며, 외계인의 모선이 있다는 등 테디의 믿을 수 없는 황당한 주장은 과연 진실일까. 여기에 더해 권력을 잃은 미셸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진실과 거짓이 섞어 적극적인 자기 변론을 펼친다.

광기에 사로잡힌 이 납치극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피해자와 가해자 전복이 반복되는 이야기 구조 속에서 누구를 지지하고 따라야 할지 혼란스러움이 가중된다. 프레임 왼쪽에서 사촌 형을 의심 없이 따르던 돈조차 어느 순간 혼란에 빠진다. 관객 역시 돈과 마찬가지로 미셸과 테디 중 누구의 이야기를 믿고 따라가야 할지 갈팡질팡한다. 그 사이 어느새 미셸은 협상 테이블의 오른쪽에 다시 앉는다. 그녀는 안타고니스트의 위치를 회복하자 혼란과 모순이 가득한 서스펜스극의 주도권을 쥐고 흔들기 시작한다.

▲'부고니아' ⓒCJ ENM
▲'부고니아' ⓒCJ ENM

엎치락뒤치락하는 전도적 서사에는 저스킨 펜드릭스의 OST가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불협화음과 장엄함을 동시에 갖춘 오케스트라 스코어는 등장인물들의 내적 갈등 에너지를 증폭시킨다.

영화의 전반부 서사는 느린 속도로 빌드업이 진행되는 단점도 있지만, 후반부에 접어들면 폭발적인 여러 시퀀스들을 통해 관객에게 시각적 감정적 충격을 안긴다. 

제시 플레먼스는 낮고 차분한 어조로 망상과 음모론에 빠진 테디를 완벽하게 연기하며, 개인의 트라우마와 사회적 불신이 어떻게 위험한 믿음과 결합하는가를 보여준다. 원작의 순이(황정민) 캐릭터에 해당하는 돈을 연기한 에이든 델비스는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약자인 인물의 감정 균열과 심리 연기로 관객 마음속에 연민을 자아낸다. 

▲'부고니아' ⓒCJ ENM
▲'부고니아' ⓒCJ ENM

여기에 엠마 스톤은 원작의 만식(백윤식)보다 좀 더 냉정하고 침착한 캐릭터로 다듬어진 미셸을 통해 통속적인 권력자의 속성과 그 이면의 취약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실제 삭발을 선택한 엠마 스톤은 캐릭터 감정을 정교하게 연기해 나간다. 그녀는 선과 악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환원되지 않는 캐릭터 균형을 유지하며, 혼신을 다한 연기를 펼친다. 엠마 스톤 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들이 놀라운 연기 열전을 펼치며, 반전 서사의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깊이감 있는 감정선으로 완성한다. 

이 작품은 정보 과잉 문제, 환경 위기, 자본주의 병폐, 종말론적 음모론 등 사회 풍자와 함께 SF 스릴러, 블랙 코미디 등 다채로운 장르 결합을 이뤄낸다.

오프닝에 던져진 복선은 엔딩에 이르러 성공적으로 회수되며, 장준환 감독의 원작과는 다른 방식으로 친환경적인 '지구 지키기' 미션을 완수해낸다. 고전 명작을 리메이크했던 스콧 데릭슨 감독의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2008) 결말에 실망했던 관객이라면 '부고니아'를 통해 대리 만족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부고니아'는 한국영화 리메이크라는 화제성 이상의 귀한 가치를 지닌 영화다. 이처럼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반으로, 한없는 존중을 담아 성공적으로 재창조해낸 리메이크 영화는 흔하지 않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스타일의 '지구를 지켜라!'를 결말 스포일러 없이 감상하고 싶다면, 장준환 감독 원작을 미리 예습하지 않은 상태로 '부고니아'부터 먼저 관람할 것을 권장한다.

▲'부고니아' ⓒCJ ENM
▲'부고니아' ⓒCJ ENM

 

제목: 부고니아 (BUGONIA)

원작: '지구를 지켜라!' (장준환 각본, 감독)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각본: 윌 트레이시

출연: 엠마 스톤, 제시 플레먼스, 에이든 델비스, 알리시아 실버스톤 외 

프로듀서: 에드 기니, 앤드루 로우, 요르고스 란티모스, 엠마 스톤, 아리 애스터, 라스 크누센, 이미경, 고경범

제공: 포커스 피처스, 프레멘틀, CJ ENM

제작: 엘리먼트 픽처스, 스퀘어 페그, CJ ENM 

배급: CJ ENM 

러닝타임: 118분

관람등급: 청소년관람불가

한국 개봉 : 2025년 11월 5일

평점: 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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