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태어날 때부터 한 번도 세상을 본 적 없는 시각장애인 임영규(권해효)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씨로 도장을 만드는 전각 장인이다. 그는 살아있는 기적으로 불리는 자신의 다큐멘터리를 찍는 김수진 PD(한지현)의 시종일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마치 자신을 어린아이를 대하듯 어르고 달래는 그녀의 말투에 앞에서는 내색 한번 못하고 뒤편에서 불편한 속내를 내비친다.

아들 임동환(박정민)은 골이 난 임영규를 다독인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모습과 판박이인 그는 이번 다큐멘터리가 사업에 도움이 되길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때 임동환은 갑작스레 어머니 정영희(신현빈)의 유골이 발견됐다는 연락을 받는다.
평생 얼굴 한번 보지 못했던 어머니 정영희의 존재. 임동환에게는 어머니의 유골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아버지는 착하기만 했던 아내 정영희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고 회상한다. 40여 년 전 사망한 어머니의 사인은 미스터리로 남겨져 있었다.

장례식에 우르르 들이닥친 이모들은 어머니의 유골만큼이나 낯설었다. 그들은 못생기고 괴물 같이 생긴 정영희가 몹쓸 짓을 벌이고 사라졌다며 사납게 힐난하고는 유골을 보며 구역질까지 한다. 재앙처럼 찾아와 짐승처럼 혀를 놀리는 그들의 얼굴을 보며 임동환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는 영정 사진 하나 없는 어머니 정영희의 얼굴을 찾기로 한다. 그 과정에는 다른 목적을 품은 김수진 PD가 동행한다.

임동환은 70년대 어머니가 일했던 청계천 피복 공장의 직원 중 그녀를 기억하는 인물들을 차례차례 만나며, 어머니가 남긴 희미한 파편 조각들을 찾아내 하나둘씩 맞춰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퍼즐이 완성되자 그녀의 얼굴과 죽음 뒤에 감춰진 추악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연상호 감독의 첫 그래픽 노블 '얼굴'을 실사화한 이 영화는 총 다섯 챕터의 인터뷰 형식 이야기 전개 안에서 두 가지 트랙의 서사가 달려나간다. 정영희의 유골 발견과 함께 얼굴을 잃어버린 그녀를 둘러싼 죽음의 진실을 파헤쳐 나가는 미스터리극과 데칼코마니처럼 닮은 아버지 임영규와 아들 임동환의 인물극, 여기에 박정민의 1인 2역 연기가 스토리의 흡입력을 배가 시킨다.

빅토리아 시대, 기형의 얼굴을 가지고 태어나 학대받는 삶을 살았지만, 뛰어난 지성과 감성을 지녔던 한 남자의 실화를 다룬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명작 '엘리펀트 맨'(1980) 속 주인공 존 메릭에게서 '얼굴'의 정영희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임영규는 정영희와 닮아있다. 그들은 편견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히는 약자의 지옥을 견디며 살아간다.

다만, 임영규는 꺾이지 않는 의지의 정영희와는 다른 길을 걸어간다. 그는 가해자들의 폭력과 핍박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연신 허리를 굽신거린다. 임영규는 백사장(임성재)의 서커스에 불려 나가 괴물쇼를 보여준다. 장마담(임정선)같은 구경꾼들의 환호를 받으며 아이처럼 좋아하는 척 웃는 얼굴을 하지만, 그의 내면은 수치심, 굴욕감, 분노로 뒤틀려 간다.
'살아있는 기적' 임영규는 평생 아름다움과 추함을 타인들의 말에 의지해 판단해왔다. 그래서 정작 아내 정영희의 진실, 정직, 선량함을 보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가해자 그리고 때로는 피해자로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구역감이 밀려오는 말과 행동은 우리들의 또 다른 '면(面)'을 거울 보듯 성찰하게 한다.

정영희가 남겨둔 진실의 궤적을 쫓아가는 이 이야기는 쌓여있는 층위를 한 꺼풀씩 벗겨나가며 궁금증을 자극한다. 마침내 진실에 다가설 때 인간 내면의 심연을 파고드는 몰입감은 고압 상태를 지속해 나간다. 자격지심과 편협한 악의로 가득한 인간의 어두운 면이 극에 달하는 폭압적인 순간, 관객은 무거운 전율에 짓눌려 완전히 마음을 잠식당한다. 영화는 정영희의 얼굴이 드러나는 마지막 순간 편견과 평범성의 아이러니를 전달한다.
'엘리펀트 맨'의 새로운 재해석 '얼굴'은 다양한 복선으로 가득한 시나리오와 배우들의 열연만으로도 영화적 재미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연상호 감독은 초저예산으로 단기간에 완성한 이 작품을 만들면서 휴가를 보내듯 스트레스를 풀고 힐링했다고 밝혔다. 그의 다음 작품 '군체', '가스인간', '심야사진관'에서도 '얼굴'과 같은 완성도가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제목: 얼굴
원작: 그래픽 노블 '얼굴'(연상호)
각본/감독: 연상호
출연: 박정민, 권해효, 신현빈, 임성재, 한지현
제공/제작: 와우포인트
공동제공/배급: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러닝타임: 103분
상영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25년 9월 11일
평점: 7.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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