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승과 제자 간의 치열한 승부 '백미'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오랜 연출부 생활을 통해 실무와 감각을 갈고 닦은 김형주 감독은 2014년 '군도: 민란의 시대'에서 각색과 조감독을 맡으며 윤종빈 감독과 처음으로 작품을 함께하게 되었다. 이후 영화사월광과 손잡고 2017년 '보안관'으로 연출 데뷔하면서 이성민, 조진웅, 김성균 배우들의 앙상블을 이끌어내며 주목받았다.
김형주 감독은 바둑 레전드 조훈현의 실화에 매료되어, 윤종빈 감독과 공동 각본으로 '승부'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이 영화의 키워드는 치열함이다. 제자로부터 정상을 지켜야 하는 스승과 스승을 꺾어야 정상을 차지할 수 있는 제자 간의 치열한 승부를 그린다. SR타임스는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김형주 감독을 만나 이번 영화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조훈현 국수는 어린 시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이 부분은 이창호 국수와의 관계에 집중하려고 일부러 생략된 것처럼 보인다.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실제로 조훈현 국수는 스승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습니다. 그러나 조훈현과 이창호라는 두 캐릭터의 서사라서 그 부분을 다룰 여력이 없기도 했지만, 논점이 빗나가는 것 같기도 했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진 삽입이나 스승에 대한 설명을 넣은 이유가 있어요. 극 중에서 조훈현은 처음 스승, 선생이 됩니다. 본인만의 답을 찾아가는 느낌을 좀 주고 싶었죠. 조훈현 국수의 스승을 향한 절절한 마음을 아시는 분들만 아실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이 묻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Q. 당시 대국 자료 조사는 어떻게 했나
새로 쓰기로 된 '월간 바둑' 잡지를 1970년대 것부터 한문 찾아가면서 2020년대 중후반까지 쭉 정독했습니다. 동명의 다큐멘터리 관전 기사를 먼저 접했는데 초고 작업을 하고 있을 때쯤 유튜브에 있는 영상을 보게 됐어요. 실제 영상으로 보니까 재미있기도 했고 두 캐릭터도 보였고 대국장의 공기나 당시 시대상 같은 질감들이 느껴져서 좀 더 디테일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Q. 극 중 이창호 국수는 발랄하고 총명한 아이였다가 진중한 인물로 변해간다. 성격 변화가 스승인 조훈현 국수의 엄한 가르침 때문 아니겠냐는 시선도 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어요. 저는 이창호 국수가 흔히 우리가 아는 돌부처 캐릭터로 변모하는 게 자신의 바둑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했다는 설정으로 대본 작업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 대국에서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조심스러운 성격으로 아역을 그리면 캐릭터 자체에 대한 초반 호감도나 이해도에 난관이 있을 것 같았어요. 또 자서전에 어린 시절 이창호 본인은 기억을 못 하지만, 당시 어른들은 되게 말썽꾸러기에 승리욕도 강하고 다혈질이었다는 문장이 있어요. 거기에 기대서 선택적으로 아역 캐릭터를 수정했습니다.
Q. 스승 조훈현을 상대로 처음 이겼을 당시 이창호 국수는 중학생이었다. 성인인 유아인 배우를 캐스팅한 이유는
그 지점에 대해 굉장히 고민이 많았습니다. 유아인 배우가 출연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본인도 이걸 해도 괜찮겠냐고 한 것으로 저는 알고 있는데 어쨌거나 촬영 당시에는 그에게 소년미가 있었습니다.
사제 간 첫 대결 순간에 이병헌 배우의 조훈현 캐릭터 아우라에 안 잡아 먹히고 어느 순간 대등하게 싸움을 펼쳐야 했죠. 상대에게 안 밀렸으면 좋겠는데 실제 나이라는 것에 함몰돼 아역 배우로 한다면 과연 긴장감이나 힘의 균형을 맞출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각본에는 정확한 나이 서술을 안 했어요. 어쨌든 두 사람의 에너지가 충돌하는 지점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습니다.
Q. 넷플릭스 공개로 알려졌다가 다시 극장 개봉으로 전환했다
어쨌든 거대 자본이 오가는 문제라 여러 견해 차이가 있었습니다. 당시 넷플릭스 공개가 결정됐을 때는 극장 상황이 코로나19로 인해서 너무 안 좋았어요. 그래서 너무 아쉬웠었지만 이해했었습니다. 긍정적으로 월드와이드 관객을 만나는 거니까 그것도 또 나쁘지 않다, 설렌다 이렇게 마음도 먹었죠. 그런데 갑자기 배우 문제가 터지고 나서는 제가 그 안에서 할 수 있는게 없었어요. 견뎌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죠. 결국은 돌고 돌아서 이렇게 애초 의도대로 큰 화면으로 관객들과 만날 수 있게 됐습니다.
Q. 코로나19는 종식됐지만, 극장 침체 상황은 여전하다
걱정도 많이 되고 뭐 막막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단순히 영화나 극장 시장에 파이도 작아진 것도 있겠지만, 영화 찍고 개봉하기까지 6년이 걸렸어요. 그냥 제 팔자의 문제인지 영화의 문제인지 모르겠는데 얄궂게도 계속 뭐가 안 맞나 이런 생각은 들기도 합니다.
이런 표현이 좀 조심스럽긴 한데 그냥 극장에서 보면 더 좋을 작품입니다. 바둑을 모르셔도 즐기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또 아시면 아시는 대로 더 많은 게 보이실 거고 그래서 극장에 와주십사하고 호소드려요.

Q. 바둑이 정적인 스포츠라 드라마틱한 연출에 대해 고민을 했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영화의 톤 자체를 안에서는 뜨거운 감정들이 왔다 갔다 하지만 담백하게 하고 싶었고요. 넘치지 않게 하고 싶었습니다.
화면이 뒤집히는 장면에서 그다음에 조훈현 국수의 바둑돌들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CG가 있었어요. 대국 장면에서 꽤 있었는데 CG 팀한테 너무 미안했는데 막상 넣고 보니까 담백함과 연관해서 톤 자체가 좀 흔들리는 느낌을 많이 받았죠. 공들인 것 중에 최소한의 것들만 남기고 사실은 걷어낸 부분이 있어서 CG팀에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
Q. 두 번의 대국 장면에서 바둑 룰을 CG로 설명하는 등의 장면은 의도적으로 넣지 않은 것 같다
자료를 조사하면서 이 바둑이라는 게 너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 관전기에서도 한 수 한 수에 대한 의미를 자세하게 몇 주에 걸쳐서 설명을 해 주시더군요. 예를 들면 이세돌과 알파고의 수처럼 말이죠. 근데 그런 수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 그냥 함몰되는 느낌을 많이 받았죠. 수위조절을 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바둑을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는 전제 하의 선택이 있었고 전반적인 흐름과 분위기의 큰 맥락들은 꼭 짚어주자는 정도를 지키려 했고요. 지나친 설명은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까 절제를 했습니다.
후반 대국 같은 경우는 CG가 있어요. 이창호 캐릭터의 시뮬레이션 같은 수읽기가 있었고 마지막에 바둑알에 금이 가면서 패배를 직감하는 그 정도 느낌만 들어가 있습니다. 사실 거기서 그 바둑알이 산산조각이 나는 컷들도 있었어요. CG팀에 진짜 죄송해서 술 한 잔 샀었습니다. 저 또한 살을 발라내고 뼈를 깎는 심정이었어요.
Q. 반대로 꼭 살려야겠다고 생각해서 공들인 장면이 있다면
마지막 엔딩 시퀀스에서 조훈현과 이창호 내레이션으로 '창호 또 너냐? 네, 선생님' 하는 부분 있잖아요. 그걸 되게 살리고 싶었거든요. 당시 월간 바둑에 보면 전날 전야제부터 같은 숙소에서 기자가 자고 다음 날 대국을 다 지켜보면서 정말 디테일하게 쓴 글이 있습니다. 특집 기사 첫 페이지에 '창호 또 너냐? 네, 선생님. 도리 없지 이것이 승부니까'라는 타이틀이 있어서 그걸 꼭 영화 엔딩으로 가져가고 싶다고 생각했었습니다.
Q. 치열한 감정싸움 속에서 긴장감을 풀어주는 유머 감각이 빛났던 작품이다. 코미디 연출이 어렵지는 않았는지
캐스팅을 잘하면 됩니다. (웃음) 개인적으로는 '보안관'을 코미디 영화라고 생각 진짜 안 합니다. 코미디는 호흡인 것 같습니다. 능숙한 연기의 배우들이 서로 빨리 치고 들어가는 느낌 때문에 그 맛이 제대로 잘 살았던 것 같습니다. 미세한 조절은 편집해서 할 수 있죠. 그래도 기본적으로 연기를 잘하시는 분들과 함께하면 80%는 묻어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승부에 연연하지 마"하는 차 안 장면은 웃음을 의도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속으로 '이놈이 나를?' 하면서 가슴이 섬뜩해지는 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웃음)
Q. 특별 출연한 조우진 배우의 남기철 캐릭터는 분량은 적었지만 인상 깊었다
조훈현, 이창호와 함께 승부의 세계에 몸담고 있는 캐릭터죠. 조훈현의 라이벌이고 서로 좋은 감정이 있을 리 만무한 그런 캐릭터로 설정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훈현과 이창호라는 두 인물이 어느 순간 굉장히 외로워지는 캐릭터들이죠. 그 상황에서 때로는 자극을 주기도 하고 위로를 건네고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그런 승부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 캐릭터를 떠올렸어요.
조우진 배우와는 '보안관'을 같이 했던 인연도 있었고 이병헌 선배님과 작품을 같이 한 경험들이 있잖아요. 그런 외적인 이유로 투영되는 나름의 정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캐스팅을 했습니다. 바둑이 인생에 비유가 많이 되는데 비 오는 날 조훈현과 얘기하는 장면을 찍고 나서 조우진 배우가 많이 울컥했나 봐요. 사실은 바둑을 연기로 치환해도 사실 다 말이 되거든요. 조우진 배우가 이병헌 선배님한테 제가 연기 얘기를 해도 되는 거예요? 하고 묻더군요. (웃음) 그래서 그 부분도 맛깔나고 담백하고 심심하지 않게 해 주신 것 같아요.

Q. 이병헌 배우가 연기한 조훈현 캐릭터는 국민 영웅으로 시작해서 대인배처럼 가다가 중간에 옹졸하고 소인배적인 모습도 보여준다
조훈현 국수님은 대국할 때 버릇이 되게 독특하셨다고 합니다. 다리를 많이 떨고 콧노래 흥얼거린다는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있었어요. 근데 실제로 제자를 훈육하는 방식 같은 건 없었어요. 이미 이창호는 사실 제자로 들어올 때부터 완성형이었죠. 둘이 그냥 말없이 복기만 하는 게 다였고 자기 스타일을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조훈현은 일인자지만 스승으로서는 첫발을 내딛는 처지라 시행 착오적으로 답을 강요한다거나 정서를 강요한다고 하는 맥락으로 접근을 했죠. 실제 두 사람의 기풍이 달라요. 또 이창호는 자신의 바둑을 찾기 위해 절치부심한다는 맥락으로 봤던 것 같습니다.
소인배적인 부분은 실제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어요. 근데 저는 그런 부분이 굉장히 인간적인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부분을 너무 없어 보이지 않고 근사하게 이병헌 선배가 해줘서 좋았습니다. 조훈현 국수님은 일단 영화를 재미있게 보셨어요. 어떤 장면들에서는 그래 맞아 저런 감정이었지 하고 어렴풋이 기억난다고도 하셨어요. 그리고 나는 가르친 거 없고 이창호 혼자 알아서 습득한 거라서 영화 속 이병헌처럼 좋은 스승이었는지는 모르겠다는 말씀도 하셨죠.
그런데 바닥을 치고 난 다음에 다시 올라오는 그 과정이 너무 짧게 묘사된 게 아닌가 싶다고 하셨어요. 실제로는 너무나 힘들었다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또 사람들은 그 부분을 길게 보고 싶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냥 짧고 굵게 넘어가자 하고 리듬감을 살렸습니다.
Q. 유아인 배우가 본인에게 직접 사과했나
제 데뷔작으로 만나 결혼식 축사도 해 주신 이성민 배우 외에는 그렇게 친밀한 편은 아니라 배우들과 따로 연락하고 지내지 않는 편입니다. 지난해 여름에 유아인 배우 부친상 때 가는 게 도리 아닐까 생각해서 찾아갔는데 사과의 말을 전했어요. 길게 얘기할 자리는 아니었고 저도 서울로 바로 이동해야 해서 오래 머물 수는 없었습니다.
Q. 유아인 배우 장면을 편집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방법이 없었어요. 보셔서 알겠지만 신이나 컷 몇 개 편집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었죠.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모든 작업이 끝난 상태였고요. 컷 하나에도 상대 배우와의 리액션과 음악의 리듬과 템포를 다 맞춰놨기 때문에 엄두가 안 났어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도 없는 거니까 그냥 애초 의도했던 대로 완성했던 영화를 보여드리는 게 맞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제게 남은 방법은 그거 하나여서 있는 그대로 했습니다.
Q. 끝으로 관객분들한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여러 사연이 있지만, 영화를 있는 그대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바둑이 딱딱하고 지루하다는 선입견이 있으실 텐데 그런 편견과 장벽을 허물고 극장을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애초에 극장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작품입니다. 큰 화면으로 숨은 디테일들을 보시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서 극장에서 관람해 주시면 너무나 저에게 활력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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