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영화 '승부'는 대한민국 최고의 바둑 레전드 조훈현(이병헌)이 제자와의 대결에서 패한 후 타고난 승부사 기질로 다시 한번 정상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세계 프로바둑 선수권대회 최강자로 우뚝 선 국민적 영웅 조현훈 역을 맡은 이병헌은 '승부' 시나리오를 읽고 바둑을 전혀 몰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에 참여하겠다는 도전 의식을 갖고 연기에 임했음을 밝히기도 했다. SR타임스는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이병헌 배우를 만나 이번 작품에 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실존 인물인 조훈현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어나갔나
실존 인물 연기에는 자유로움이 많지 않죠.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기댈 곳이 많아요. 그분의 버릇, 겉모습, 생각 같은 것들을 많이 듣고 옮기면 되니까요. 영화에서 픽션적인 대사나 상황은 만들어진 부분일 수 있지만, 작가가 의도한 바를 잘 살려서 연기하려고 해요. 창조된 인물을 연기할 때보다 제한된 것들이 좀 있긴 하죠. 하지만 의존할 곳은 충분히 있고 자료나 참고할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 좋았어요.
지금도 바둑계 현역으로도 계신 분이시라 더 조심스러울 수 있는 부분도 있죠. 근데 '남산의 부장들' 같은 경우에는 상상해가면서 하니까 그때가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어떤 감정이었을까에 대한 정확한 답이 없다는 것이 고민 지점이었습니다.
Q. 영화에서는 조훈현 국수의 올곧음부터 옹졸함까지 다면적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굉장히 인간적인 캐릭터로 느껴졌다
워낙 시나리오에서 잘 표현이 되어 있었어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어디 한 군데 수정하거나 아이디어를 내야 하겠다는 생각이 안 들었죠. 그만큼 적절하게 잘 그려져 있어서 이런 감정이라면 내가 해볼 만하겠다 생각하면서 감정 라인의 고조를 맞춰갔던 것 같아요.
Q. 인물의 감정 전달 연기가 중요해 보인다
바둑을 두면서 안에서는 긴장과 환희 혹은 절망감 같은 엄청난 감정들이 소용돌이를 치고 있지만, 정적인 가운데 표현을 해야 하는 미세한 감정 표현이나 떨림 같은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사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미세한 감정들을 캐치해내려면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죠. (웃음)
마음속은 어쩌면 어떤 스포츠 경기를 하는 사람보다 가장 극단적인 감정 상태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절망감이든 어떤 승리를 확신하는 환희든 혹은 떨림과 긴장이든 아주 극단적인 마음의 상태죠. 정적으로 바둑돌 하나를 딱 놓고 눈빛 하나로 그 감정들을 표현해내야 하는 직업이니까 관객들한테 보여주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그런 지점들이 이 영화의 포인트이자 또 표현해내기 가장 어려웠던 숙제였어요.

Q. 가장 만족스러웠던 장면이 있다면
제가 제 입으로 이야기하기는 뭐하지만, 박찬욱 감독님이 전화를 주셨어요. 가장 좋았던 부분이 이창호 국수와의 결승전 바둑에서 자기가 처음으로 패배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안 되나?' 하고 혼잣말처럼 말하는 부분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걸 어떻게 했었지 하고 생각해봤었는데 좋은 것 같아요. (웃음)
Q. 조훈현 국수에게 실제로 들었던 조언이 있는지 그리고 작품을 위해 바둑을 어느 정도까지 배웠나
그분께서 농담처럼 하시는 말씀이겠지만 아무렇게나 막 돌을 놓는 거 하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바둑돌 놓는 방법이 있으니 진짜 프로 바둑 기사다운 손 모양으로 놔달라는 얘기를 하셨죠. 대화를 나누면 거의 혼자서 말씀하실 만큼 이야기꾼이시라 저는 주로 듣는 입장이었죠.
바둑기사들은 마치 양면테이프가 있는 것처럼 바둑판에 갖다 붙이는 느낌으로 바둑돌을 두잖아요. 프로다운 손놀림에 대해 훈련을 했어요. 제가 조훈현 국수만큼 바둑을 두지는 못하잖아요. 제일 중요한 건 돌 하나 놓았을 때 포스나 울림이 얼마만큼 그분과 같은 느낌으로 보이고 느껴지느냐는 거였죠. 제게는 제일 큰 숙제였습니다. 집에 바둑판을 놓고 아들과 계속 오목을 뒀어요. 오목은 제가 대부분 다 이겼죠. 근데 체스는 100전 100패일 만큼 저는 이런 쪽에 재능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Q. 가장 핵심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캐릭터 모습은
조훈현 국수의 매너에 대해서 사실 말이 많았어요. 옆으로 양반다리 해서 앉거나 와기라고 거의 누워서도 두셨죠. 바둑 매너에 있어서는 많이 파격적인 분입니다. 이기고 있을 때 다리를 떨기 시작한다고 영화에서도 이야기하잖아요. 어쩌면 심리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재미있는 포인트죠. 그래서 그런 것을 많이 보여드리려고 했어요.
근데 조훈현 국수께 예전에 일본 스승님 밑에서 같이 사실 때 훈련을 많이 받으셨는지 여쭤봤더니 두 판인가 세 판밖에 안 두셨다더군요. 나머지 시간 동안은 삶의 방식과 태도 그리고 생각 같은 것들을 교육받았다고 생각하신다더군요. 스승님도 매너가 안 좋으셨나? (웃음)
Q. 촬영 당시 이창훈 국수 아역을 맡은 김강훈 배우가 이제는 많이 성장했다
김강훈 배우는 '미스터 선샤인'에서도 아역이었죠. 시사회 때 와서 제게 인사를 하는데 저보다 키가 더 커서 너무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무대 인사는 안 했나 싶기도 했어요. 아마 무대 인사를 함께 했으면 진짜 옛날 영화처럼 보였을 것 같네요. (웃음)
Q. 유아인 배우와의 연기 호흡은 어땠나
이창호 국수는 정말 돌부처같이 말이 없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는 바둑기사로 유명하신 분이잖아요. 유아인 배우와 처음으로 함께 연기 호흡을 맞췄는데 촬영장에서 늘 과묵한 모습이었어요. 자기 캐릭터에 빠져 있으려고 애를 쓰는구나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김강훈 배우에서 유아인 배우로 바뀌면서 비로소 돌부처 이창호의 성격이 드러나는 모습들이 나와요. 고증인지 아니면 드라마틱하다고 생각해서 넣은 픽션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성격 변화가 딱 보이는 순간 참 좋다고 생각했죠.

Q. 가장 공을 들인 장면을 꼽는다면
조훈현 국수가 처음으로 질 때 후반부 장면입니다. 이제 더 이상 방법이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서 담뱃갑을 꾸기는 장면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을 했죠.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까 고민을 제일 많이 했어요. 그래서 다른 장면들보다 유독 테이크를 많이 갔어요. 찍고 며칠 후에도 감독님한테 다시 찍을 수 있냐고 물어볼 만큼 계속 욕심이 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연기가 덜컥거린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지만, 욕심을 제일 많이 냈던 장면이죠.
Q. 스승이 제자와의 대결해서 진 후에 다시 재기하는 과정이 재미있다
이 영화의 포인트라고 생각해요. 한집에 살면서 아들처럼 키우던 제자라 막 야단도 치고 가르치며 이것저것 얘기를 하다가 함께 결승전에서 붙어요. 함께 대국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의 공기와 정말 단 1%도 생각지 못한 패배를 맞았을 때 그 당혹스러운 감정을 가지고 집에 함께 돌아오죠.
그 적막한 집안에서 문정희 씨가 연기한 정미화 사모님 입장에서 보면 아들처럼 키운 이창호는 방에 틀어박혀 복기한다고 딱딱 바둑알 소리만 내고 있고 조훈현 국수는 거실에 앉아서 계속 담배만 피워대고 있는 거죠. 말할 수 없는 이 묘한 감정들이 영화의 가장 핵심이라 저나 문정희 씨나 유아인 씨도 그런 정서를 너무 연기하고 싶어서 작품을 선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Q. 가장 좋아하는 대사 또는 장면이 있다면
무심(無心)이죠. 근데 붓글씨 쓰는 거 대역 아니었습니다. 저였어요. 그거 자랑하고 싶어서 죽을 뻔했네요. (웃음) 제가 자랑할만한 게 서예입니다. 초등학교 때 대회도 나갔어요.
Q. '단언컨대'라는 이병헌 시그니처 대사가 나온다
제 친구도 저한테 그거 네가 넣은 거냐고 했어요. 근데 원래부터 대본에 있었던 대사예요. 제가 오히려 감독님께 몰입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대사를 빼면 안 되냐고 했더니 괜찮을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빼는 게 맞았네요. (웃음)
Q. 언론 시사회 때 객석에서 큰 웃음이 터지는 장면들이 있었다.
배우가 느끼는 의외의 순간이에요. 조훈현 국수가 자신에 대해 노트한 것을 우연히 보고는 이 자식 봐라 하는 마음으로 읽다가 이창호를 마주치면서 당황해서 떨어뜨리잖아요. 조훈현 국수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고 민망한 거고 이창호 국수 입장에서는 뭔가 죄를 짓고 들킨 것 같은 입장이죠. 저는 굉장히 드라마틱한 장면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차 안에서도 승부에 연연하지 말라 하고 제 딴에는 되게 심각하게 연기했거든요. 거기서 갑자기 사람들이 웃어서 깜짝 놀랐어요. 찍을 때는 전혀 생각을 못 했거든요.

Q. 그 장면은 그냥 웃고 마는 게 아니라 캐릭터들의 내면을 또 다른 관점으로 보여주면서 후반부 서사를 강화한다. 김형주 감독은 연기 잘하는 배우를 캐스팅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어떤 감각으로 연기했나
'승부'라는 영화가 실제 이야기이지만 너무 거짓말처럼 드라마틱하잖아요. 그것 자체만으로도 이 영화가 가져가는 힘이 엄청 크다라고 생각했고, 유머러스한 장면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어요. 매번 진지하게 이 영화를 대했고 연기도 그렇게 했는데 시사회 날 굉장히 놀라고 당황스러웠어요.
이 영화는 '번지 점프를 하다' 때 제 감정하고 되게 비슷해요. 그 영화도 굉장히 진지한 영화라고 생각하거든요. 기자시사회로 기억하는데 심각한 감정 장면에서 기자분들이 계속 웃더군요. 심지어 제일 심각한 장면에서는 빵 터졌었죠.
그래서 큰일 났구나, 진짜 끝났구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매니저한테 화장실에 있을 테니까 사람들이 다 가면 절 데리러 오라고 했어요. 그리곤 너무 창피해서 화장실에서 들어가서 진짜 몇십 분 동안 숨어 있었던 적이 있어요. 근데 끝나고 나서 매니저가 너무 재밌지 않냐라는 얘기를 자기가 몇 번이나 들었다고 말해주는 거예요. 아마 영화 안으로 확 빠져들어서 보게 되면 너무나 그럴 법하니까 웃음이 나왔었던 것 같아요.
이 영화도 저는 전혀 웃긴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연기했어요. 그런데 웃음 포인트들이 많은 걸 보면서 관객들이 이 영화에 빠졌구나, 감정 이입이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되게 기분이 좋았어요.
Q. 아들이 매긴 본인의 작품 순위를 공개한다면
제 아들이 본 제 작품 순위는 '승부'가 1등이고 2등이 '공동경비구역 JSA', 3등이 '광해' 4등이 '그것만이 내 세상'입니다. 근데 '그것만이 내 세상'은 제가 틀어줘서 아들이 보다가 다 보지도 않았어요. 왜 4등이냐고 하니까 엄마가 암 치료 때문에 삭발한 모습을 보고 너무 슬퍼서 못 보겠다고 하더군요. 제가 그래도 영화라는 건 그렇게 중간에 끊고 안 보면 안 된다고 했어요. (웃음) 나머지를 못 본다는 게 아깝지 않냐니까 자기는 너무 눈물이 나서 절대로 끝까지 안 볼 거래요. 그리고는 한 이틀 동안 울어요. 갱년기가 벌써 왔나봐요. (웃음)
Q. 아버지께서 영화를 좋아하셨다고 알고 있다
한 4살 5살 때부터 주말에 영화를 보여주시면서 배우 이름이 뭐다 하고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셨는데 대부분 흑백 서부 영화들이었어요. 거기서 나오는 콩 요리가 어린 마음에 먹고 싶었어요. 나중에 '매그니피센트 7'에 같이 출연한 에단 호크에게도 물어봤었죠. 실제로 그 영화 식탁 장면에서 콩 요리가 나오는데 전 신기해서 계속 그것만 먹고 있었죠. 근데 맛은 별로 없었어요. (웃음)
아무튼 극장도 많이 데려가 주셨는데 배우가 된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고 전공도 그쪽으로 배워본 적이 없지만, 아버지의 영향이 되게 컸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Q. '내 마음의 풍금'에서 아버지의 옷을 입고 촬영했다. 이번 작품도 아버지와 관련된 소품이 등장하나
아버지가 입으셨던 옷이 이제는 두 벌 정도 남아 있습니다. '내 마음의 풍금'에서는 아버지가 늘 자주 입으셨던 재킷을 입었는데 나머지 한 벌은 이 영화의 캐릭터와 잘 안 맞았어요. 사실은 그런 생각을 못 하기도 했어요. 어쨌든 아버지는 진짜 할리우드 영화 마니아셨어요. 어쩌면 아버지가 영화를 하셨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좋아하셨던 분이셨죠. 결국 '매그니피센트 7'에서 아버지가 사진으로나마 할리우드 영화에 데뷔하셨어요. 심지어 감독님이 엔드 크레딧에 아버지를 연기자 이름으로 올려놔 주셨죠. 살면서 받았던 가장 큰 감동 중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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