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발효된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한국을 비롯한 글로벌 기업에 새로운 성장 기회를 열어주었다. 전기차·배터리·재생에너지에 제공되는 대규모 세제 혜택은 국내 기업들의 대미 투자 러시를 이끌며 공급망 재편의 촉매제가 됐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비자 규제와 관세 압박, 보조금 폐지 등이 맞물리면서 투자 환경이 크게 불확실해졌다. 여기에 한국판 IRA 입법도 지연되며 국내 대응 기반마저 취약한 실정이다. SR타임스는 IRA 3년의 성과와 트럼프 리스크가 교차하는 현 시점에서 한국 기업들의 전략과 정부 대응, 그리고 글로벌 공급망 변화가 던지는 함의를 심층적으로 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시행된 지 3년여가 지나면서 국내 중후장대 기업들의 발걸음이 북미로 향하고 있다. ⓒ전지선 기자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시행된 지 3년여가 지나면서 국내 중후장대 기업들의 발걸음이 북미로 향하고 있다. ⓒ전지선 기자

트럼프 '변수' 확대

[SRT(에스알 타임스) 전지선 기자]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시행된 지 3년여가 지나면서 국내 중후장대 기업들의 발걸음이 북미로 향하고 있다. 조선·전력망·수소·배터리 등 미래 산업 분야에서 세제 혜택과 인프라 지원을 등에 업고 현지 투자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순풍만 부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강화한 비자 규제와 관세 압박, 한국인 근로자 구금 사건까지 겹치며 투자 환경은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연간 10만 달러에 달하는 H-1B 비자 수수료 검토와 상호보복 관세 조정 협상 등은 기업들의 전략적 결정을 어렵게 만든다. IRA의 혜택과 정치적 리스크가 공존하는 가운데 한국 기업들은 기회와 불확실성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 투자 '러시'와 정책 리스크 공존 

IRA는 전기차·배터리·재생에너지 산업에 대규모 세제 혜택을 부여하면서 글로벌 기업들의 미국 내 투자를 높였다. 국내 대형 제조업체들 역시 잇따라 현지 투자 카드를 꺼내 들었다.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미국 조선업 재건 프로젝트(MASGA)와 연계해 생산 거점 확보를 검토 중이고, LS전선과 대한전선은 북미 HVDC(초고압 직류) 전력망 확충 흐름 속에서 케이블 공장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포스코는 수소환원제철(HyREX) 기술을 앞세워 미국과 유럽 시장 동시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2차전지와 관련 소재 분야에서도 공격적 투자가 이어지고 있다. SK온과 LG에너지솔루션, 롯데케미칼은 IRA 세제 혜택을 활용해 미국 내 배터리 및 핵심 소재 공장 증설에 나서고 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자료를 인용한 파이낸셜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의 대미 투자 규모는 2023년 215억 달러로 세계 최상위권에 올랐다. IRA 시행이 실질적인 투자 러시를 불러왔다는 평가다.

하지만 최근 들어 투자 속도를 늦추거나 보류하는 기류도 감지된다. 핵심은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리스크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9월 H-1B 비자 개혁안을 내놓으며 신규 신청자에게 최대 10만 달러의 일회성 수수료를 부과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외국인 전문인력 의존도가 높은 한국 기업들에게는 직격탄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 건설 과정에서 한국인 근로자 일부가 미국 이민단속국(ICE)에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해 파장이 일었다.

한국 정부는 “비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투자 프로젝트는 사실상 진전이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민석 국무총리도 지난 9월 25일 “미국 내 비자 문제가 풀리지 않는 한 대미 투자가 정체될 수밖에 없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여기에 자동차 등 일부 품목에 대한 한·미 간 보복 관세율이 25%에서 15%로 조정되는 협상이 진행 중이나, 정책 변동성이 크다는 점에서 장기 투자에는 부담이 된다.

◆ 기업들의 균형 전략과 'OBBBA' 개정

기업들의 대응 전략은 점차 '균형'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고 있다.

첫째, 현지화 확대다. 대표적으로 LS전선은 자회사 LS그린링크를 통해 버지니아주 체사피크에 미국 최대 규모 해저케이블 공장을 착공했다. 총 6억8,100만 달러(약 1조 원)를 투입해 2027년 완공, 2028년 상업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둘째, 정책 대응력 강화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은 북미 배터리 산업 행사 등에서 미국 내 제조 역량 및 공급망 강화 의지를 강조하며 장기 투자 지속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셋째, 정부와의 공조다. 조지아 공장 구금 사태 이후 기업들은 일정 조정 가능성을 검토하며 정부와 비자 문제 해결을 위한 긴밀한 협조 체제를 가동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 차원의 대응에도 불구하고, 정책 리스크는 점점 더 구조적인 차원으로 확산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IRA의 뼈대를 직접 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기차 구매 보조금 제도다. 애초 IRA는 2032년까지 미국 내에서 생산된 전기차에 최대 7,500달러를 지원한는 방침이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 Act, OBBBA)’으로 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지난 9월 30일부로 보조금이 전면 종료됐다. 국내 배터리 업계는 IRA가 제공한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 효과로 미국 내 생산 확대와 수익성 개선을 이뤄왔지만, 이 제도 역시 축소·폐지 논란에 휘말리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IRA를 손보려는 이유는 막대한 재정 부담과 정치적 반발 때문이다. 매년 수백억 달러의 보조금·세액공제 재원이 소요되는 데다 일자리 창출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불만도 미국 내에서 확산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판매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하지만 동시에 다른 규제 비용이 낮아질 것으로 보기에 판매 믹스를 좀 더 탄력적으로 운영하려 한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판 IRA 논의는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당시 내세운 '국내 생산 촉진 세제'는 반도체·2차전지 등 국가 전략기술을 국내에서 생산할 경우 법인세·소득세를 공제해주는 내용을 골자로 했지만, 내년도 세제 개편안에서는 제외됐고 국회 논의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한국 기업들이 미국·유럽 지원 정책에만 의존해야 하는 구조적 한계가 부각되는 대목이다.

결국 핵심은 속도 조절이다. IRA가 제공한 혜택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리스크가 언제든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업계는 투자 일정을 세밀하게 조정하면서도 북미 공급망 내 존재감을 놓치지 않는 전략적 균형을 모색하고 있다. 향후 관건은 미국 정부가 내놓을 구체적 비자·관세 정책의 방향, 그리고 한국 정부의 외교적 협상력이다. 이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될 때만이 IRA 순풍은 기업들의 지속 가능한 성장 동력으로 이어질 수 있을 전망이다.

재계 관계자는 "IRA는 국내 기업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변수와 한국판 IRA 부재가 동시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이제는 무작정 속도를 내기보다 투자 일정을 세밀히 조정하면서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전략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이어 "비자와 관세 문제는 기업 차원의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정부가 통상 협상과 외교 채널을 통해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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