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 이병헌. ⓒBH엔터테인먼트
▲'어쩔수가없다' 이병헌. ⓒBH엔터테인먼트

"고추잠자리 시퀀스…촬영 전부터 가장 부담스러웠던 장면"

"만수는 다 이루었다고 말하지만, 결국 모든 것 다 잃어"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시리즈를 비롯해 영화 '남산의 부장들', '백두산', '마스터', '내부자들'까지 평단과 대중을 매료시킨 이병헌. 그는 최근 영화 '승부'에서 천재 바둑기사 조훈현을,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는 귀마의 목소리 연기까지 완벽하게 소화하며 도전을 거듭해왔다. 

대한민국 대표 배우 이병헌이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에서 또다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로 거듭났다. 그는 가족과 집을 지키려는 구직자 만수 역을 맡아, 벼랑 끝에 몰린 인물의 절박함과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나는 어설픈 행동 하나까지 세밀하게 표현하며 극의 리얼리티를 끌어올렸다. SR타임스는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이병헌 배우를 만나 '어쩔수가없다'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Q. 만수는 어떤 캐릭터인가

영화 속에서 아들에게 "우리가 지금 전쟁을 하고 있다"라고 얘기하잖아요. 진짜 우리 가족의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했어요. 만수에게는 옛날 사고방식과 가부장적인 느낌이 남아 있죠. 물론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남편, 아이들을 아끼는 마음 약한 남자의 모습이긴 하지만 여전히 가부장적이죠. 살짝 마초 기질도 나오는 그런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9살 때 어쩔 수 없이 팔았던 집을 25년 만에 돈 벌어서 되찾았는데 우리 가족들이 그 집에서 살아줬으면 하는 게 자기만의 욕심일 수도 있어요. 혼자 일을 저지르고 있지만, 어쨌든 우리 가족들을 위해서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근데 전 만수가 아주 평범한 가장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처음에 하는 그 무시무시한 행동들이 얼마나 흔들림도 많고 두려움도 많았을까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렇지만 두 번째 사건쯤부터는 점점 죄책감이 옅어지는 것 같았어요. 도덕적인 감각 자체가 무뎌져 버린 듯한 느낌이었죠. 첫 번째나 두 번째 사건에 비해 세 번째에서는 굉장히 치밀한 계획을 세워 완전범죄로 만들어내려는 능숙한 변화까지 보이죠.

이 영화를 전체적으로 놓고 봤을 때, 평범한 사람이 점점 무시무시한 상상을 하게 되고, 그 상상이 결국 실제 결정으로 이어지고, 그 결정을 죽을 것 같은 두려움 속에서도 꾸역꾸역 실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변화하는 인물로 만수를 바라봤고 그런 심리 변화를 중심에 두고 작업했습니다.

Q. 해외 영화제에서 관객 반응이 좋았던 부분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기억나는 촬영 장면이 있다면

베니스와 토론토의 관객반응이 달랐는데 공통된 장면이 있었어요. 시조를 쏘기 전에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손으로 가리는 장면이 있잖아요. 촬영할 때는 웃기려고 의도한 장면이 아니었거든요. 감독님께서도 왜 그 장면에서 웃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더군요. 

현지 평론가들과 기자들은 슬랩스틱이라는 표현을 공유하더군요. 저는 슬랩스틱을 한다는 생각을 전혀 못 했어요. 블랙코미디 특성 중 하나가 주인공은 절박한 상태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그런 심정인데 3자가 보기에는 약간 우스꽝스러워 보이잖아요. 이번 영화도 그런 느낌이겠구나 생각했죠.

부부 싸움할 때 개 짖는 소리를 내는데 원래는 사람 대사가 있던 장면이었어요. 근데 감독님께서 그냥 짖어보라고 하셔서 해봤더니 많이 웃으셨어요. 그냥 장난으로 촬영하신 줄 알았는데 첫 테이크 장면을 그냥 쓰신 것 같더군요. 그 장면이 이성의 끈이 끊어질 만큼 화가 나서 그런 상황이 생길 수 있다고는 생각해요. 그런데 관객분들이 별로 안 웃으시더군요. (웃음)  

▲'어쩔수가없다' 이병헌. ⓒBH엔터테인먼트
▲'어쩔수가없다' ⓒCJ ENM

Q. 고추잠자리 시퀀스에 대한 관객 반응이 좋다

그 시퀀스는 정말 하나도 쉬운 게 없었어요. 만수가 항상 부츠를 신고 다니는데, 그 산이 경사가 너무 심해서 "여길 어떻게 올라가지?", "여길 또 어떻게 내려가지?" 이런 생각만 들 정도였죠. 올라가는 건 그나마 괜찮았는데, 내려갈 때는 정말 목숨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어요. 이대로 앞으로 꼬꾸라지면 큰일 나겠다 싶을 만큼 위험했거든요. 뒤에서는 총 들고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니까, 결국 목숨을 걸고 뛰어야 하는 장면이었죠.

염혜란 배우, 이성민 배우에 저까지 셋이 뒤엉켜 싸우는 장면은 합이 정해져 있지 않았어요. '여기서 상황이 역전된다', '일어나려다 다시 넘어지고, 가까스로 일어선다' 같은 흐름만 정해져 있었거든요. 리허설만 하루 따로 잡아서 연습했죠. 

'엔딩에서 정말 잘해야한다' 혹은 '클라이맥스 장면이 잘 안 나오면 어떻게 하나' 하고 촬영 전부터 걱정스럽고 부담스러운 시퀀스가 있는데 고추잠자리 장면이 저에게는 딱 그런 시퀀스였어요.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건 물론이고, 연극적인 느낌이 살짝 있는 장면이라 설득력 있게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특히 염혜란 씨는 발가락이 살짝 골절된 상태였어요. 감독님이 계속 괜찮겠냐고 걱정하셨는데, 본인은 괜찮다면서 정말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며칠 동안 그 격렬한 레슬링 장면을 소화했어요. 체력도, 인내심도 정말 대단한 배우예요. 그 시퀀스에서 제일 힘들었던 사람은 단연 염혜란 씨였다고 생각합니다.

Q. 만수는 식물을 사랑하면서도 나무를 죽이는 제지회사에 다니고 분재가 취미인 모순된 인물이다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죠. 선출은 제지용 나무는 임의로 벌목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주기로 베고 심는 과정을 반복하는 순환 구조라 산을 헐벗게 만드는 행위와는 다르다고 하죠. 분재라는 소재는 굉장히 한국적이면서도 동양적인 상징이에요. 얼핏 보면 고상하고 아날로그적인, 제지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즐길 법한 취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굉장히 잔인한 행위이기도 하죠. 나무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인위적으로 꺾고, 틀고, 방향을 조정하면서 형태를 강제로 만들어내니까요. 

이 분재 설정을 감독님이 넣은 이유는, 아마도 처리 대상을 전기톱으로 자르지 못해서겠죠. 차마 자신이 할 수 없는 그 행위를 분재라는 상징적인 방식으로 대체한 거죠. 저는 그런 연결고리를 이어지도록 설정한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배우 이병헌. ⓒBH엔터테인먼트
▲배우 이병헌. ⓒBH엔터테인먼트

Q. 극 중 분재된 상대방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그 모습을 포스터로 썼으면 정말 매니아 영화가 됐을 것 같더군요. (웃음) 결국 만수가 특기를 살려서 분재로 예쁘게 만들잖아요. (웃음) 이게 박찬욱 감독의 감독님의 개성이 듬뿍 들어간 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영화가 너무 꽉 차 있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기도 했다가 또 어떤 시점에서는 너무 잔인하기도 하고 기괴해요.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상하게 뭔가 아름다웠다는 이미지가 진하게 남는 게 박찬욱 감독님 영화의 특징인 것 같아요.

Q. 마지막 경쟁자를 제거하는 방식은 잔인하게 변했다. 마치 나무를 심고 비료를 주는 듯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죽일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하다 

그게 바로 만수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부분이었어요. 첫 번째 사건에서는 계획이 있긴 했지만 결국 다른 사람에 의해 목표가 제거되죠. 두 번째는 약간 사고처럼 총이 발사되어 상대가 죽게 되죠. 그런데 세 번째에 이르면 이미 완전히 변한 만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치밀하게  행동하면서 질식사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완전범죄를 계획하고 차근차근 실행하죠. 

Q. 그 장면에서 만수의 변화 과정을 설명한다면

대화 중에 "라인 매니저 하나 더 뽑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순간 만수가 울컥해요. '아, 이 사람을 안 죽여도 되겠구나' 하는 안도의 눈물이에요. '하느님인지 부처님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이렇게 안 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이죠. 하지만,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게 됩니다. 선출의 태도를 보니 그냥 해본 소리였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되고 또 마음이 변하게 됩니다.   

거기에 "회사 월급으로 이런 집을 어떻게 사냐? 다 비리"고 말해놓고 선출이 너무 무서운 눈을 하고 있으니까 "근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라는 대사를 하잖아요. 사실 그거 다 애드리브였어요. (웃음) 어쨌든 만수는 자신의 원래 계획이 망쳐졌다고 생각하고 총을 들죠. 근데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도를 들키지 않았다는 걸 알고는 다시 원래 계획대로 상황을 이어나가는 거죠. 

▲'어쩔수가없다' 이병헌. ⓒBH엔터테인먼트
▲이병헌. ⓒBH엔터테인먼트

Q. 엔딩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고 연기했나 

저는 그 결말을 아주 처참한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갈기갈기 찢긴 비극이죠. 영화를 보고 나면 어떤 관객분들은 "뭔가 해소되는 시원한 결말이 있든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게 해피엔딩인가, 아니면 비극인가?" 하고 해석이 다르실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처음부터 이 이야기를 엄청난 비극으로 봤어요. 엔딩에서 첫 출근 때 우산을 들고 서로 헤어지는 모습은 바비큐 파티의 첫 장면과 겉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아요.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 있고,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라고 생각했어요. 

미리도, 아이들도, 만수도 각자 자기 얘기를 가족에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관계가 파괴되어 있죠. 어쩌면 그 시점에서 미리는 아이들과 함께 떠났을지도 몰라요. 원래는 그 신이 있었어요. 감독님이 그걸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셨는지 열린 결말로 남겨두신 거예요. 그 장면은 삭제가 됐지만, 암시 장면은 남아 있어요. 만수가 마지막 일을 저지르고 아내 미리를 껴안으려고 하는데 흠칫하죠. 그때 미리가 "그렇게 열심히 살지 말지 그랬어"라고 하는 부분이 저는 암시라고 봤어요. 

Q. AI 시대에 만수가 생존한 부분은 어떻게 보면 긍정적인 엔딩일 수도 있지 않나

만수의 마지막 공장 장면은 연민이 가는 쓸쓸하고 슬픈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필요도 없는데 종이를 두드리는 아날로그적인 버릇을 못 버리잖아요. 25년이나 해왔던 건데 오히려 거기서 되게 서툴러 보이는거죠. 그래서 슬픈 엔딩라고 봅니다. 

영화 첫 장면에서 만수는 "다 이루었다"고 말하잖아요. 근데 사실 그는 모든 것을 잃은 거예요. 계획한 대로 완전범죄를 이루었지만, 정작 자신이 진짜 원하던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죠. 만수가 공장에 들어서면서 혼자서 "파이팅!"하고 으쌰으쌰하잖아요. 원래 그 장면은 만수가 혼자 춤까지 추는 버전도 찍었어요. 

그런데 그 뒤 롱샷에서 클로즈업으로 전환되며 만수 표정을 보여주잖아요. 모든 기운이 빠져나간 듯 우울하고 공허한 얼굴이죠. 아무리 자기 자신을 다독여도,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요. 그 상태에서 AI화된 공장에서 방황하죠. 맨 마지막에 빠져나가는 장면에서도 여전히 길을 잃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 뒤에서 하나둘씩 불이 꺼지는 건 감독님의 아이디어였는데, 저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정말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 모든 일을 해내고 살아남았지만, 정작 자신도 AI 시스템 공장에서 필요 없는 존재가 된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불이 꺼지는 건 마치 '너도 이제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런 감정으로 본다면 이 영화는 굉장히 슬프고, 상실감이 큰 비극적인 결말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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