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동포는 모국을 위해 어떻게 기여할 것이며, 모국은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윤대기 이사장ⓒSR타임스
▲해외동포는 모국을 위해 어떻게 기여할 것이며, 모국은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윤대기 이사장ⓒSR타임스

◆ 홍용락 고문이 만난 '시대를 바꾸는 사람들' [24] "내가 '아메리칸드림'의 결과입니다” 미주한인회 총연합회 윤대기 이사장

6, 70년대와 80년대 초까지 쳥년과 청소년 시대를 겪어온 사람들은 한 번쯤 꿈꿔보거나 익숙한 용어가 바로 '아메리칸드림'이 아닌가 싶다.

 

그 당시 우리나라와 비교해 대단히 앞선 선진국인 미국에 가서 공부 하고 싶은 사람들, 돈을 벌어 인생의 터전을 잡고 싶은 사람들, 등등이 모든 꿈을 이뤄줄 기회의 땅 미국은 우리 젊은이들의 동경 나라였다.

 

아마도 그 세대의 많은 젊은이들은 '아메리칸드림'의 주인공이 되어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꿈을 꿔 봤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를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 젊은이들이 그들의 꿈을 이루어 줄 수 있는 나라로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그 나라 젊은이들이 ‘코리안 드림’을 이루려고 한국에 오기 위한 갖은 노력을 다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접하면서 그 옛날을 반추(反趨)해 보기도 하지 않는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던 세대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더 크게 느낄 듯하다.

 

윤대기(83) 미주한인회 총연합회 이사장은 운동선수(레슬링, 19964년 ‘동경올림픽’ 출전) 출신으로 60년대 미국에 건너가서, 백만장자의 꿈을 이룬 전형적인 토종출신(?) ‘아메리칸드림’을 성취하신 분이다.

 

그 간의 숱한 인생 애환을 통해 진솔하게 꿈을 이루고 인생을 변화시키는 인생관과 남의 나라에서 조국이 어떻게 변화되는가를 쳐다보는 국가관 등을 알아보고 싶었다.

 

‘세계한인회장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방문한 윤 이사장은 정말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저녁에야 동행한 미주한인회 총연합회 나기봉 대외 수석부회장과 자리를 같이할 수 있었다. [편집자 주]

 

- 70달러 들고 간 미국에서 억만장자의 부(富) 축적한 ‘아메리칸드림’ 의 표본

- 1990년 트럭 한 대로 시작...현재 200대가 넘는 대규모 물류 유통 기업 일궈

- 도쿄올림픽 국가대표 레슬링선수 출신의 긍지와 헌신으로 인생과 레슬링계 개척한 체육인

- ‘뒤는 낭떠러지다. 앞으로 가야 살 수 있다’라는 신념으로 산 것이 성공 지름길

- 미국서 체득한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이 국가 유지의 근간이라는 확고한 국가관 가져

- 모국(한국)과 원만한 협력 방향은 ‘자유’와 ‘시장경제’가 기본 바탕이라 확신

▲‘세계한인회장대회’ 후 보름을 기다리면서 ‘재외동포청’의 합리적 인식을 주문한 윤 이사장과 나기봉(사진 오른쪽) 수석부회장.ⓒSR타임스
▲‘세계한인회장대회’ 후 보름을 기다리면서 ‘재외동포청’의 합리적 인식을 주문한 윤 이사장과 나기봉(사진 오른쪽) 수석부회장.ⓒSR타임스

Q. 이사장님 반갑습니다. 운동선수 출신이여서 그런지 연세에 비해 너무 젊어 보이십니다. 어디 다녀오시나요? 볼 일은 잘 되셨나요?

== 아, 저는 10월 4일부터 6일까지 ‘2023 세계한인회장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나왔습니다.

행사 이후 보름이 지나가는 이 시점에는 미국에 진행하는 사업이 있어서 돌아가야 하지만, 재외동포청과 미주한인회 총연합회와의 문제가 있어 오늘에서야 재외동포청을 방문하고 오는 길입니다.

 

Q. 아, 그렇습니까.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서는 미국 돌아가는 것도 연장해 가면서 진행하는 일이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인가 봅니다.

== 중요한 일입니다. 특히 265만 미주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에게는 아주 중요하고 예민한 행정절차의 잘못 판단으로 동포들의 뜻이 무시당하는 것 같아 시정을 요구하러 재외동포청장과의 면담을 요구했습니다.

재외동포청도 너무 바쁜 업무이겠지만, 오늘에서야 만남이 이뤄지면서, 청장을 대신해 본부장의 만남을 주선했습니다.

그 내용을 이 자리에서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핵심 내용은 재외동포청에서 이번 대회에 초청한 미주한인회 총연합회 임원을 2023년 5월에 265만 미주 동포를 대표하는 165개 지회에서 선출된 임원이 아닌, 임의의 한인 단체의 임원을 초청한 부분에 대한 정정을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미주한인회 총연합회는 역사적으로 1903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한인친목회를 계승하여 1977,1978년에 미주한인회 총연합회로 명명되어 창립된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동포 조직입니다.

지금도 미국 50개 주 165개 한인 지회가 조직되어 지회를 바탕으로 7개 지역연합회가 조직되어 있으며, 최종적으로 지회 대의원들의 투표를 통해 지난 5월에 회장 및 임원들이 임명되었습니다.

이런 단계와 적법절차를 거쳐 임명된 임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2023 세계한인회장 대회’에 재외동포청에서 선출 임원들을 인정하지 않는 행정 착오에 대해 실무 임원은 아니지만, 미주한인회 총연합회를 대표하는 이사장으로서 정확한 판단을 정정하기 위해 지금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Q. 제3자로서 몇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네요. 우선, 그런 문제에 대해 실무진에게는 오자마자 회의장 등에서 전했을 텐데, 그 점에 관해 확인을 해서 판단을 빨리해 주는 것이 주관 행정기관인 재외 동포청이 할 일 같은데 차일피일 미룬 점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또, 지금도 명확히 해결이 안 된 것 같은데, 재외동포 청장께서 일정이 바쁜 분이지만, 해외에서 온 동포 대표자들 면담을 보름 이상 미루는 점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잘 안되는 점입니다.

== (그때 배석했던 나기봉 수석부회장이 답변에 나선다) 우리도 그 점이 이해가 안 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이번 대회에 지난 5월에 적법한 선거로 선출된 29대 미주한인회 총연합회 정명훈 총회장 등 임원진을 초청하지 않고, 선거에서 지고 급조한 한인 유령단체(?) 구성원을 초청해서 급기야 제가 용산 대통령실에 항의까지 해서 급히 현 회장과 임원도 초청받아 참석하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1964년 동경올림픽에서 호주 선수를 판정으로 이기는 레슬링 국가대표 선수 시절 윤 이사장에 대한 신문기사. ⓒSR타임스
▲1964년 동경올림픽에서 호주 선수를 판정으로 이기는 레슬링 국가대표 선수 시절 윤 이사장에 대한 신문기사. ⓒSR타임스

Q. 그렇군요. 혹시 재외동포청에서 집행부 선거와 교체가 지난 5월에 있었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행정적 미스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 (다시 윤 이사장이 받는다) 나도 그랬다면 일하다가 해프닝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재외동포청 면담을 해 본 결과, 이번에 와서 미주를 대표해서 대통령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그 유령단체(?) 대표와 그 단체가 지금 미주한인회 총연합회의 고소를 당하여 재판 중에 있다는 것을 재외 동포청 실무자들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상황을 잘 알면서도 굳이 그 조직을 비호(?)하는 듯하다는 것은 아무래도 265만 미주 동포들 입장에서는 특별한 관계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일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미주한인회 총연합회 이사장이면서 나름대로 연배 등에서 어른 대접을 받는 제가 나 부회장과 남아서 문제의 진실에 대해 관련 있는 재외동포 청장이나 외교부 등에 알리고자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Q. 취지에 대해서는 이해가 됩니다. 사실의 판단은 제가 할 영역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지금 고소해서 재판이 진행되고 있으니까...결론도 빨리 나겠네요?

== (배석했던 나기봉 수석부회장이 답변한다) 재판은 실무적으로 총회장님과 저희가 하고 있습니다.

지금 말한 것처럼 진실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는 없습니다. 재판에서도 좋은 결론이 날 것입니다. 모든 게 적법한 절차와 과정으로 이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국의 법원이지만, 저쪽 단체의 회원을 등록시켰는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을 등록시켰습니다.

그 구성원의 투표권을 어떤 판사가 인정하겠습니까? 이 정도면 사실관계에 대한 판단이 서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기회에 윤대기 이사장님이 연합회를 지회장 때부터 실무와 관계를 아신 분이고, 이제는 어른 입장에서 사심 없이 미주 한인 대표 단체에 대해서 잘못된 판단을 하는 부분을 정부와 관계기관에 밝혀 주려 하는 점에 대해 많은 감사를 드립니다.

 

Q. 잘 진행되길 바랍니다. 원래 인터뷰 안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윤 이사장님은 언제 미국에 가셨나요? 소위 ‘아메리칸드림’ 때 기회를 가지게 되었나요?

== 제가 미국에 간 것은 1969년 크리스마스 때인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당시 미국의 국경일인 크리스마스 때 미국에 가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길 바라는 저한테 예정된 암시 같기도 합니다. (허허 웃는다)

충남 홍성이 고향인 저는 어릴 때부터 체격조건이 좋아서 고향 친구인 정동구(전 한국체육대 총장) 등과 함께 레슬링했습니다.

고등학교는 서울의 성북고등학교(지금의 홍익고등학교)에서 레슬링하며 1964년 도쿄올림픽에는 국가대표 레슬링(페더급)선수로 출전했습니다.

비록 메달 획득은 못 했지만, 당시에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것만도 대단히 인정받는 시대였습니다.

이후 1965년에 개교한 동양 공업전문학교(현 동양미래대학교)에서 레슬링부 감독 겸 선생님으로 재직하면서 나름대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체육회에서 프리스타일 레슬링 코치로서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소개를 받아(올림픽 출전선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선권을 인정받지 않았나 생각됨),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Clevland)의 대학에 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영어 실력이 아주 부족했습니다. 그럼에도 올림픽 출전 선수라는 그 시대는 출중한 기량 덕분에 대학에서 코치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미국 초등학교의 정식 교사 생활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기적 같은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당시에는 어렵게 미국에 가서 기회를 가지려는 많은 젊은 분들에 비해서, 나는 올림픽출전 선수로 인정받아 쉽게 미국에 가게 된 것 같습니다.

▲미주한인회 총연합회 활동을 통해 미주 동포들의 단합을 주도하는 정명훈 총회장과 함께 한 윤 이사장ⓒSR타임스
▲미주한인회 총연합회 활동을 통해 미주 동포들의 단합을 주도하는 정명훈 총회장과 함께 한 윤 이사장ⓒSR타임스

Q. ’아메리칸드림’ 초기에는 한국에서 하던 운동과 관련된 일로 시작이 되었군요. 그럼, 언제 사업을 시작하였나요? 지금 하는 물류 유통(PB EXPRESS)하는 사업을 막 바로 하셨나요?

== 미국에서 레슬링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평범하게 미국 시민으로 정착하는 길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표본인 미국 사회에서 미래를 위해서 사는 길은 ‘경제적인 자립’이 우선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면서, 그 방향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한국인들이 미국 정착의 꿈인 치킨가게를 1,000$~2,000$로 준비해서 시작하였습니다.

거기서 조금 돈을 벌어 마트사업(grocery)을 집사람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화재가 발생해 막대한 손해를 보고 폐업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동안 교류가 있던 미국 오하이오주(州) 레슬링 대표 출신 선수 얼(Earl) 3형제가 잘되는 세차장(car wash) 사업을 나보고 해 볼 것을 권유했습니다.

본인들은 다른 사업으로 전직하면서 그동안 성실하게 일하는 나를 눈여겨본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3형제가 보증을 서 주어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당시에는 세차장 사업이 미국에서는 호황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일한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거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잠깐 돈은 벌 수 있었지만, 경기 흐름에 따라 세차장 사업은 언젠가 하향 산업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차에 한국에서 온 친구가 저한테 새로운 사업 하나를 제안했습니다.

한국에서 연세대학교에 다니면서 같은 운동을 했던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저보다 늦게 미국에 왔지만, 저한테 향후 물류 사업을 하면 전망이 좋을 것이라는 정보를 알려 줬습니다.

또 투자회사 회장도 저에게 소개를 해 줬습니다. 시장조사를 하면서 타당성을 분석해 보니까 분명하게 승산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990년대 초에 물류 유통 사업에 뛰어들었죠. 지금은 미국 전역에 도달할 수 있는 물류 운반차를 200여 대 가지고 거기에 따른 기반 시설도 가진 물류 유통 사업을 아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Q. 그렇군요. 사업 규모까지 말씀해 주셨는데, 어느 정도인지 쉽게 와 닿지 않는군요.쉽게 이해할 수 있게 예를 들어 줄 수 있을까요?

== 그러죠. 미국에서 억만장자라 얘기할 때는, 그 사람의 가진 총재산이 억 단위를 넘어 수 조, 수십 조 원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미국의 억만장자는 그 큰 나라지만 1,000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저의 사업 규모는 억만장자에는 조금 못 미치지만, 백만장자라는 소리는 듣습니다.

백만장자는 미국에서 재산이 전체 몇 십억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1년에 본인에게 들어오는 순수입이 그 정도라고 합니다.

조금 이해가 됩니까? 제가 살고 있는 클리블랜드는 미국의 대표적인 산업도시입니다. 그 도시에서 저는 주류 상류층 클럽 멤버에 항상 들어가는 정도입니다.

미국에서 그 지역 특정 클럽 멤버가 되는 것은 자기 인생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척도로 판단됩니다. (허허허, 자랑이 좀 과했나요)

▲모교 중앙대(大)와 클리블랜드 대(大)와의 학생 교류 지원으로 77명의 석,박사를 배출한 공로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윤 이사장.ⓒSR타임스
▲모교 중앙대(大)와 클리블랜드 대(大)와의 학생 교류 지원으로 77명의 석,박사를 배출한 공로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윤 이사장.ⓒSR타임스

Q. 대강 이해가 됩니다. 이런 사업을 이룩하면서 난관이 많이 있었겠죠? 또, 사업 성공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점이 있었습니까?

== 어려운 점은 초기 이민자들이 겪는 것을 저도 다 겪었습니다. 언어능력이 모자라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점은 많은 한국분들한테 잘 알려진 얘기입니다.

게다가 자본이 없는 가난한 나라에서 꿈을 꾸고 간 미국은 자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요즈음 한국 사회를 보니까 많은 젊은이들이 돈을 벌고 싶은데, 초기 자본이 없는 것을 탓하고 좌절하더라고요.

당시 아메리칸드림을 꿈꾸고 미국에 간 사람들도 똑같은 장벽에 부딪혔습니다. 그렇다고 좌절하고 남 탓을 하면 일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기본 원칙은 똑같습니다. 무슨 일을 고민하고 시도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다 보면 한국 동포나 미국 사람들한테서 자연적으로 믿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게 신용이고, 신용이 생기면 기회도 또 오는 게 모든 일에 순리 아닌가요? 저라고 무슨 자본이 있었겠습니까? 단돈 70$ 가지고 미국에 갔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다 보니까 기회가 오게 된 것이죠. 그 과정에서 제가 운동을 한 사람으로서 운동한 사람들끼리 만남과 좋은 관계가 형성되고, 좋은 관계 속에서 도움도 받고 저도 할 수 있는 봉사를 하게 되는 것이죠.

 

Q. 이사장님의 사업 성공 비결은 주어진 조건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성실하게 대처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천하신 것이네요. 주변에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세대도 다 그런 좌우명으로 사셨나요?

== 제가 생각할 때는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언어소통도 안 되고 자본금도 없는 초기 ‘아메리칸드림’ 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물질의 부족함과 정신적으로 고단함을 본인들이 희망을 품고 이겨 나갔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초기’ 아메리칸드림’으로 온 분들은 누구나 저처럼 언어장벽 극복을 위해 라디오 이어폰을 끼고 잠을 잤을 것입니다.

당시 누구든지 제가 생각한 것처럼 ‘뒤는 낭떠러지다. 앞으로 가야 살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 역경을 이겨 나왔기 때문에 ‘아메리칸드림’ 이민자들의 70~80%가 지금은 부를 축적해 좋은 차와 집을 소유한, 소위 미국 사회에서 성공한 이민자들로 평가받는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국력 신장도 미주 동포들에게 많은 심리적 안정의 도움을 준 것 같습니다.

단적인 예로, 삼성기업이 대한민국의 기업으로 평가받지 않고,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인식되고 있는 점은 미주 동포들에게도 대한민국 출신으로 자긍심을 크게 가지는 한 요소가 됩니다.

또, 미국에 진출한 한국의 많은 남·여 골프 선수들이 우승하는 것을 보면서 골프가 생활화된 미국 사람들에게 한국의 이미지가 좋아졌습니다.

그 영향으로 미국 거주 한국 동포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친밀도도 높아질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104회 전국체육대회 레슬링 경기를 참관하고 대한 레슬링협회에 발전 기금을 전달하는 윤 이사장ⓒSR타임스
▲104회 전국체육대회 레슬링 경기를 참관하고 대한 레슬링협회에 발전 기금을 전달하는 윤 이사장ⓒSR타임스

Q. 사업을 하면서 또 운동과 교육 분야에도 많은 정열을 보인 것 같습니다. 클리블랜드대학과 중앙대학교와 교환학생 제도의 산파역을 맡아 2006년도에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도 받으셨다면서요?

== 미국에 가서 처음부터 레슬링 지도자를 했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미국에 가서 초기에는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마침 고향 친구이며 레슬링을 같이해 온 정동구 전 한체대 총장이 당시에 레슬링 국가대표 감독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 감독이 국가대표들이 흑인 및 백인들과 연습함으로써, 서양 선수들에 대한 ‘피해의식’(complex)을 줄이는 방법을 고민해 왔습니다.

그 당시 한국 사정은 외국에 가서 전지훈련을 쉽게 할 지원책이 어려운 형편이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1975년 정 감독이 선수들을 데리고 오면 내가 같이 다니면서 미국 전역 순회 연습을 주선하고 그쪽 동포들 집에 숙식을 알선하는 등의 지원과 봉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1976년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가 금메달을 딸 수 있게 나름대로 뒷받침했습니다. 88 서울올림픽 때 금메달을 딴 한명우 선수도 이런 식의 후원을 받아 결실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감정이 북받칩니다. 그 이후 제가 기업을 하며 형편이 좀 나아지게 되면서, 1997년에 모교인 중앙대학교(中央大學校)와 클리블랜드(Cleveland States University) 대학교와 교환학생 자매결연을 맺는 산파 역할을 나름대로 했습니다.

그 이후 25년간 77명의 학생 교환이 이뤄졌습니다. 77명의 학생이 교환되면서 석·박사과정을 이수한 것이죠.

물론 중앙대학교에서 클리블랜드로 온 학생이 거의 85%였고, 클리블랜드대에서 중앙대로 교환학생으로 간 숫자는 10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점을 공적으로 평가해서 중앙대학교에서 저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미주한인회 총연합회와 모국과의 전향적인 상생 관계를 대담하는 홍용락(사진 왼쪽) 고문과 나 수석부회장(사진 오른쪽),  윤 이사장.ⓒSR타임스
▲미주한인회 총연합회와 모국과의 전향적인 상생 관계를 대담하는 홍용락(사진 왼쪽) 고문과 나 수석부회장(사진 오른쪽), 윤 이사장.ⓒSR타임스

Q. 듣고 보니 미국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변화하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세대의 표본의 자격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윤대기 이사장님께서 대표적인 해외동포사회인 미주 동포들을 대표해서 대한민국과 해외동포와의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제언을 한다면 뭐가 있을까요?

== 우선 저처럼 ‘아메리칸드림’을 쫓아간 세대는 이제 대부분 미국에서 성공했습니다. 그들의 자녀들은 미국에 살지만, 본인들은 한국에 돌아와서 살기를 많은 분이 원합니다.

미국 정부도 이들 연금 1인당 4, 5백만원을 한국에서 사용할 수 있게 지급 제도를 비롯해 모국에 돌아가 살 수 있도록 많은 제도를 바꾸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한국 정부도 참정권까지 주며, 해외 동포들의 이중국적을 허용하죠. 이런 좋은 제도가 한국에도 도움이 되게 잘 발전하면 좋겠습니다.

아직 보완되어야 할 점은 미국에 거주하는 동포에게 참정권을 주면서도, 실제로는 투표 장소로 가는데 이동이 10시간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웬만한 노력으로는 투표에 참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우편, 메일 등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대안을 잘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제안은 해외 동포들이 고국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주십시요.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먼저 금전적으로 해외에서 성공한 동포들이 고국에 의미 있게 기여할 방법을 찾아 주십시오.

미주 동포들의 예를 들면, 저 자신도 그랬지만, 초기 미국 생활이 힘든데도 우리 8남매에게 1년에 얼마씩 꼭 보내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 했습니다.

미주 동포들이 기부하는 방법을 고국에서는 한꺼번에 커다란 목돈 기부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거금을 한꺼번에 낼 수도 있고, 사업 파트너로 같이 협력할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미국의 동포들은 대부분 생활이 안정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스스로 느껴질 때 고국의 필요한 분야에 십시일반(十匙一飯) 기부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도 해외 동포들이 고국을 위해 자부심을 가지고 기부금을 보낼 수 있도록 각 분야에서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 주길 바랍니다. 구체적인 방법을 잘 연구해서 상생의 방법을 찾길 기대합니다.

이스라엘 국민들이 모국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모국에 필요한 분야에 자발적으로 헌금을 많이 하는 예를 참고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이제는 젊은 세대들의 교류 방안도 제도적으로 마련해야 할 때입니다. 한국의 우수한 젊은 세대들이 미국에 많이 취업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에 와서 교육받은 분도 있고, 한국에서 질 높은 교육을 받은 분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미국의 기업이나 기관에 취업하는 것은 보수와 근무 환경이 좋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미국에 와서 선진 교육을 받은 분들이 대부분 귀국했습니다. 그것은 한국에도 교수 같은 좋은 자리가 보장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에도 만만한 자리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세대들을 일정 기간 교류할 수 있는 체제를 한국에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의 우수한 능력을 한국의 기업과 기관이 더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홍용락 SR 타임스 논설고문
▲ⓒ홍용락 SR 타임스 논설고문

(짧은 인터뷰 시간이었지만, 윤 이사장님은 매사에 매우 긍정적인 분이었다.

그와 같은 에너지는 운동을 통해서 단련된 체력과 정신력이 뒷받침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 이제는 깊어진 연륜으로 인생을 보면서 다음 세대를 포용하는 듯했다.

물론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몸에 밴 생활의 합리성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분 같았다.

미국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1986년도 지역한인회장을 시작으로, 2020년도에는 중서부 한인연합회 회장을 거쳤다.

2023년에는 미주한인연합회 이사장으로 미주 재외 동포들 사이에는 정신적 리더십(Leadership)을 발휘하는 자리매김을 하는 분이다.

그러면서도 미국 사회에서 체득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반(反)공산주의 이념 자체를 확고하게 하면서 모국과 어떤 관계를 하는 것이 합리적인지를 고민하는 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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