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분 공개매수로 불붙은 경영권 다툼
[SRT(에스알 타임스) 전지선 기자] 국내 비철금속 업계 양대 축인 고려아연과 영풍의 지배권 분쟁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양측의 갈등은 오히려 확산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단순한 지분 경쟁에서 출발한 공방은 이제 환경 문제와 자본시장 논란, 형사 리스크까지 맞물리며 산업계 전반에 파장을 낳고 있다.
경영 정상화와 주주가치 제고라는 원래의 목표는 뒷전으로 밀린 채, 고려아연과 영풍 모두 신뢰 리스크를 안고 소모적 공방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고려아연이 출자한 사모펀드 '하바나 1호'(원아시아파트너스 운용)가 SM엔터테인먼트 주가 시세조종 사건에 연루된 정황이 드러나면서 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 SM엔터 주가 급등, 하이브 공개매수 무산
최근 들어서는 분쟁의 무게중심이 ‘환경’에서 ‘자본시장’으로 이동했다. 2023년 2월 16일, 당시 SM 주가가 하이브의 공개매수가(12만원)를 단숨에 돌파하며 급등했는데, 이날 오후 한 '기타 법인'이 약 850억원을 들여 지분을 대거 매입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 매수 주체가 원아시아파트너스가 세운 특수목적회사(SPC)였다는 점이 뒤늦게 드러났고, 해당 펀드의 출자금 90% 이상을 고려아연이 부담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장이 커졌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원아시아 지창배 대표와 중학교 동창이라는 개인적 인연까지 드러나 의혹은 한층 증폭됐다.
검찰은 원아시아와 손잡은 카카오가 장내 매집을 통해 SM 주가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려 하이브의 공개매수를 무산시켰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최근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가 징역 15년, 배재현 전 투자총괄대표가 징역 12년, 김성수 전 카카오엔터 대표가 징역 9년을 구형받으며 사건의 무게감은 한층 더해졌다.
영풍은 고려아연이 단순한 재무적 투자자가 아니라 '시세조종 자금의 원천'이었다고 주장한다.
원아시아 대표와 최윤범 회장의 친분, 펀드 청산 정황 등을 거론하며 지난해 9월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고, 올해 들어서는 서울남부지검에 고발장을 제출하며 수위를 높였다. 고발장에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 등이 적시됐다.
반면 고려아연은 정면으로 반박했다. 회사 측은 "원아시아에 출자한 LP(유한책임출자자)였을 뿐, 개별 투자처와 집행 과정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며 "실제 공소사실에도 고려아연의 이름은 오르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당사는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판단을 통해 여러 펀드에 자금을 투자해 왔으며, 유휴 자금의 일부를 펀드에 출자하는 것은 재계 여러 기업에서 보편적으로 구사하는 자금 운용 방식"이라며 "특히 당사는 재무적 투자 목적에 부합하게 해당 투자를 통해 일정 이상의 수익을 실현한 바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의 기류도 자본시장 신뢰 회복에 방점이 찍히면서, 고려아연 사태는 단순한 기업 간 분쟁을 넘어 정치·사법 리스크로 번질 가능성이 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달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주가조작하면 패가망신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겠다"며 "주가조작에 투입된 원금까지 몰수하도록 제도를 강화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면서 "주가조작 사범들, 앞으로는 조심하라"고 경고하며 엄정 대응을 예고하기도 했다.
시장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의 여파가 투자 행태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채원 라이프자산운용 의장은 "이러한 사건들이 자본시장에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재발방지에 도움이 될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의장은 "기본적으로 거버넌스가 좋지않은 기업들을 회피하는 움직임이 나타날 것"이라며 "아무래도 펀더멘털의 호전없이 단기급등한 주식이나 지나치게 주가가 많이 오른 테마주보다는 거버넌스도 훌륭하고 펀더멘털도 좋은 기업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해당기업들의 주가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을것"이라고 전망했다.
◆ 고려아연의 액트 활용 논란도
SM엔터 사태와 별개로, 영풍은 또 다른 공세 카드로 소액주주 플랫폼 '액트(ACT)'를 지목했다. 액트가 고려아연의 지원을 받아 영풍에 불리한 여론전을 벌였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액트 내부 문건에는 '영풍을 공격하기 위한 명분 확보 차원에서 이마트·롯데쇼핑·오로라 등 5대 저PBR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삼성전자·네이버·현대차 등 20대 대기업에 집중투표제 도입을 요구하겠다'는 계획이 담겼다.
또 다른 문건에는 ‘고려아연-액트 프로젝트 경과 보고서’에는 '영풍의 저평가를 액트 단독으로 거론할 경우 이해상충 논란이 불거질 수 있어, 저PBR 기획을 통해 영풍을 주요 종목으로 언급하게 하겠다'는 취지가 적시돼 있다.
영풍 관계자는 "한국경제인협회(구 전국경제인연합회)의 57년 회원사이기도 한 영풍그룹의 입장에서 액트의 시장 교란 행위는 회원사 전체의 명예를 훼손한 사건"이라며 "액트에 대한 규제기관의 조치가 신속히 집행돼야 하며, ‘집중투표제’와 같은 제도적 논의가 특정인의 사익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된 만큼, 향후 유사 사례 방지를 위한 제도적 보완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려아연은 이에 대해 “여러 서비스 가운데 주주총회 자문 용역을 계약했을 뿐”이라며 “영풍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양측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면서 분쟁의 무게중심은 ‘환경’에서 ‘자본시장’으로 확장되는 모양새다.
◆ 분쟁 장기화, 양측 재무 부담 확대…‘승자의 저주’ 가능성도
경영권 분쟁이 격화되면서 양 측의 재무 부담은 가중되고 있다.
고려아연은 경영권 분쟁이 격화되는 와중에도 실적 측면에서는 비교적 견조한 흐름을 보였다. 상반기 연결기준 매출은 7조6,582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약 40.9% 증가했으며, 영업이익도 5,300억원으로 16.9% 상승했다.
그러나 재무 건전성은 악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나이스신용평가는 6월 고려아연의 무보증사채 신용등급을 기존 ‘AA+ (부정적)’에서 ‘AA (안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이는 경영권 분쟁 장기화 속 자사주 매입과 대규모 투자 소요로 순차입금의존도가 2023년 말 마이너스(-)1조1,473억원에서 올해 1분기 3조476억원으로 급증하는 등 부담이 가중된 점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 외부 차입을 통한 자사주 취득에만 1조8,000억원을 투입했고, 호주 풍력발전 투자 등으로 CAPEX도 1조1,000억원 발생했다.
영풍은 상반기 연결기준 매출액이 1조1,717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22% 감소했으며, 영업손실은 1,504억원을 기록했다. 제련업 가동률 급감과 환경 규제, 시황 약화 등이 겹치며 적자 폭이 크게 확대됐다. 고려아연은 외형 성장에도 불구하고 지배구조 불투명성과 투자 논란을 해소해야 하며, 영풍은 환경 리스크와 적자 구조를 털어내는 것이 과제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번 경영권 분쟁은 어느 한쪽의 승리로 단순히 귀결되기보다는, 고려아연은 지배구조 불투명성과 투자 논란을, 영풍은 환경 리스크와 적자 구조를 안고 있어 양측 모두 시장 신뢰에 상처를 남길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