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 촌뜨기들' 윤태호 작가.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파인: 촌뜨기들' 윤태호 작가.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목 '파인'은 사건보다는 캐릭터 그 자체가 이야기 중심이기 때문"

"만약 시즌2 이어진다면 등장인물들 처벌 받을 것"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1977년 바닷속에 묻힌 보물선을 차지하기 위해 몰려든 근면 성실한 생계형 촌뜨기들의 속고 속이는 이야기 '파인: 촌뜨기들(이하 '파인')은 예측을 뛰어넘는 전개와 스토리로 사랑을 받았다. 

웹툰 '이끼', '미생', '내부자들'을 통해 인간에 대한 통찰과 사회 구조를 날카롭게 조명해온 윤태호 작가 원작의 '파인'은 얽히고 설킨 캐릭터들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갈등, 감추었던 속내들이 차례로 드러나면서 예측 불가한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신선한 재미를 선사한다. SR타임스는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윤태호 작가를 만나 '파인'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Q. '파인'의 영상화 논의는 어떻게 시작됐나

기획 단계부터 공동 제작자 중 한 분인 박준희 대표님과 이야기가 됐었습니다. 그분이 '미생'을 제안을 하셨는데 이미 판권이 팔린 상태였죠. 그래서 차기작은 무조건 대표님과 같이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파인' 연재가 한 3~4개월 정도 지났을 때 바로 계약을 맺었죠.

Q. 등장인물이 범법자들이지만 매우 인간적인 면이 많다 

작품을 시작할 때는 항상 테마가 먼저 잡혀야 합니다. 테마를 응축한 것이 제목이고, 제목이 나온 후에야 시나리오 작업이 가능하거든요. 이 작품에는 1970년대 하면 떠오르는 근면과 성실이라는 키워드가 있어요. 저는 악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성실하게, 하지만 왜곡된 방식으로 일했던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래서 재미의 포인트는 '아이러니'입니다. 결국, 법을 어기는 사람들이지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려면 반드시 '서로 죽이지 않겠다'라는 약속이 필요하죠. 즉, 무법자들 사이에서 오히려 규칙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 아이러니 하나만으로도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겠다고 생각했어요.

초반부에는 인물들이 범죄를 얼마나 죄책감 없이 일상처럼 저지르는지를 보여주려 했습니다. 인물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이미 시작됐지만, 시청자분들은 사건을 중심으로 생각하셔서 언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나 하는 반응을 보이시더군요. 그래서 이런 격차가 있구나 하고 많이 배웠어요. 

만약 이야기의 핵심이 바닷속 그릇이었다면 제목은 '파인'이 아니었을 겁니다. 제가 '파인'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사건보다는 캐릭터 그 자체가 이야기의 중심이었기 때문이에요.

Q. 생동감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비결이 있다면

저는 기본적으로 플롯을 짜지 않고 작업을 시작합니다. 대신 다른 작가분들에 비해 캐릭터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세팅하는 편이에요. 주연급 캐릭터들의 가상의 역사를 모두 씁니다. 예를 들어 몇 년도에 태어났고,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셨는지 같은 사실적인 가상의 팩트를 정리해 두죠.

그리고 주요 인물들의 연령대 순으로 연보를 만듭니다. 예전에는 손으로 자를 대고 직접 그렸는데, 지금은 엑셀 파일을 활용해서 훨씬 효율적으로 작업하죠. 오른쪽에는 비고란을 만들어서, 그 연도에 한국과 전 세계적으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를 기록합니다. 그러면 그 인물이 몇 살 때 어떤 시대적 사건을 경험했는지가 자연스럽게 정리됩니다. 이런 준비 작업만 반년 이상 걸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캐릭터를 세밀하게 구축하다 보면 신체 사이즈, 말의 속도, 감정의 반응 같은 디테일이 자연스럽게 도출됩니다. 

저는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캐릭터를 아주 싫어해요. 아무리 황당무계한 서사라도 땅에 발을 붙인 사람들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대사 하나하나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캐릭터가 진짜로 살아남으려면, 전지전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함과 한계, 그 속에서의 선택이 있어야만 캐릭터가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윤태호 작가.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윤태호 작가.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Q. 작가로서 악인이나 비윤리적인 인물들에게 끌리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가 살다 보면 그런 순간 있잖아요. '나 혼자만 너무 착하게 사는 건가?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지?'같은 분노가 치밀 때가 있어요. 아마 그런 순간들이 악인 이야기를 궁금해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만약 내가 악인 캐릭터에 빙의해서 상상 속에서라도 금기를 깨버린다면, 그 결말은 어떻게 될까 하는 거죠.

우리는 윤리와 비윤리, 합법과 불법의 경계 위에 있습니다. 비윤리적으로 살고 싶지는 않지만, 때로는 경계선을 슬쩍 건드리기도 하잖아요. 주호민 작가가 무단횡단하면서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어떤 세무사는 절세라는 건 성립이 안 되는 말인데 너무 흔하게 쓴다고 하죠. 그런 것이 인간인 겁니다. 그래서 악인 서사를 좋아합니다. 

특히 영화 '파고'는 정말 수십 번 봤습니다. 그 작품은 애초에 계획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주잖아요. 악인이 된다는 건 단순히 욕심을 부리는 게 아니라 자기 양심과 자신의 세계관 전체를 바꾸는 일이에요. 사실 그건 너무나 두렵고 무서운 일이죠.

Q. 작품 속 설정이 매우 디테일하다

도자기 설정은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1970년대 신안 관련 기사를 찾아서 다 읽고 정리했죠. 골동품에 관한 책도 여러 권 사서 수기로 메모하며 공부했어요. 또 신안 보물선 발굴 결과물을 다룬 책이 있는데, 거의 논문처럼 사실관계가 정리되어 있어서 그걸 보며 큰 윤곽을 잡았습니다.

부산에 계신 골동품 하시는 분을 만났고 목포 시청과 신안군청도 찾아가서 발굴 당시 이야기를 듣고, 전시장과 박물관도 둘러봤습니다. 드론 팀도 섭외해서 신안군 섬들을 직접 돌며 11군데 포인트에서 수백 장의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골동품 하던 사람들이 자기 경험을 적어놓은 책도 참고해서 대사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사투리 작업은 제가 어릴 때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자라난 경험이 밑거름됐죠. 광주, 서울, 군산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자연스럽게 지역 말투를 빨리 습득하려 애를 썼는데, 그게 나중에 글로도 연결된 것 같아요. 또 국립도서관에 가서 판소리 채록집을 찾아보고 남도 사투리를 메모하기도 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나온 지역어 연구서, '한국의 발견' 시리즈 같은 책도 참고하면서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사투리의 미묘한 차이까지 기록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고어와 한자 문장을 좋아합니다. 20대 초반에는 이문열 선생님의 책을 탐독했는데, 문장이 유려하려면 뜻이 압축되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문장의 맛에 빠졌던 경험이 지금까지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Q. 작가로서의 요즘 일과를 밝힌다면

지난해 4월부터 병원에서 건강을 위해 일찍 잠을 자라는 처방을 받았어요. 그래서 무조건 자정은 안 넘기고 밤 10시쯤에 잠듭니다. 그리고는 아침 7시쯤 일어나서 10분 정도 그냥 눈감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습니다. 술도 끊었고 많이 걸어 다니고 있어요. 

요즘에는 책을 집중해서 읽고 챗GPT나 제미나이(Gemini)에게 제가 생각하는 것과 아이디어를 질문해보기도 해요. 예를 들면 회귀물과 관련된 양자역학에 대해 질문을 해보는 거죠. 그렇게 하다보면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가 즐겁게 흘러갑니다. 

Q. 원작자로서 이번 작품의 영상화에 대해 당부한 것이 있다면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원작자가 작품을 팔 때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계약서에 명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계약서에 없는 부분을 뒤늦게 이야기하는 것은 반칙이라고 보거든요.

제가 반드시 구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은 원작 안에 다 담아냈고, 그것으로 제 역할은 끝난 거죠. 영상화 과정에서 꼭 구현되어야 하는 요소가 있다면 계약 단계에서 반영했을 겁니다.

물론 감독님이나 제작진이 이 캐릭터는 왜 썼는지, 의도는 무엇인지 같은 질문을 주신다면 얼마든지 답변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요청이 없는 상황에서 제가 먼저 나서서 미리 의견을 드리거나 간섭하는 건 있을 수 없죠.

▲윤태호 작가.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윤태호 작가.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Q. 강윤성 감독은 원작을 존중한 각색이라고 말했다. 결과물에 대한 생각은

'미생' 때도 1화 방영 당시 제작 스태프분들과 함께 모여 시청한 적도 있는데, 감독님이 마음에 안 드시면 어떡하냐고 걱정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애초에 그런 마음이 없어요. '원작 그대로여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죠. 그냥 한 명의 시청자로서 작품을 봅니다.

강윤성 감독님이 시나리오 쓰실 때는 원작자인 저보다 더 많이 원작을 반복해 보셨을 겁니다. 영상화 작업을 하는 분들은 오히려 원작자보다 작품을 더 깊고 넓게 들여다보시는 경우가 많죠.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을 감독님은 분명히 더 많이 고민하셨을 것이고, 실제로 1년 넘게 각색 작업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결과물을 보면서 '이렇게 달라지니까 이런 매력이 생기는구나'하는 걸 많이 느꼈습니다. 작가는 원고를 쓰면서 자기 자신이 첫 번째 독자가 될 수밖에 없어요. 또 원작으로 영상을 만드는 분들에게는 저 같은 원작자가 첫 번째 시청자가 될 수밖에 없겠죠. 그런 점에서 감독님은 제 앞에서 원작을 극복해야 한다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려고 정말 많이 노력하신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감독님이 원하실 때만 코멘트를 드리자는 원칙을 지켰습니다. 결국, 그게 제 역할이니까요.

Q. 임수정 배우가 맡은 양정숙은 원작과는 다른 캐릭터로 각색됐는데

저는 임수정 배우 배역에 가장 놀랐습니다. 처음 캐스팅 사실을 알았을 때는 "왜요?"라고 했거든요. 제가 생각했던 양정숙은 최악의 캐릭터입니다. '멸망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었거든요. 교활하고 술수가 가득해요. 밝지만 어딘가 날카로운 톤을 지닌 인물이죠.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임수정 배우가 굳이 그 배역을 맡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어요.

현장에서 만났을 때는 관석이에게 욕을 퍼붓는 장면을 찍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다른 장면에서는 아주 곱고 차분한 톤으로 대사를 하길래 순간 심장이 철렁했어요. 왜냐면 제가 생각한 양정숙의 톤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작품이 공개되고 쭉 보면서 제가 크게 반성했어요. 양정숙은 단순히 교활하고 천박한 여성이 아니라, '회장의 사모님'이라는 역할을 끝까지 연기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어요. 화장실처럼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도 그 연기를 멈추지 않는 인물인 거죠. 그렇다면 당연히 카랑카랑한 톤이 아니라, 품위 있는 척, 고운 척을 하면서 자기 삶을 꾸려가야 맞았던 거죠.

임수정 배우는 바로 그 점을 완벽하게 해석하고 잡아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오히려 제가 그 부분을 보지 못했구나 싶어요. 임수정 배우의 양정숙이야말로 정답이라고 봅니다.

Q. 결말을 보면 시즌2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는 느낌이다

감독님이 "원작은 정말 내일도 없는 사람들처럼 끝나는데, 이렇게 조금은 밝게 마무리해도 괜찮을까요?"하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원작 안에서 이 인물들은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분명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렇지만 만약 시즌2가 이어진다면, 그때는 충분히 처벌을 받아도 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결말에서는 잠시 밝게 살아있는 모습으로 끝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다고 봤습니다. 오히려 그 순간의 아이러니가 더 흥미로울 수 있으니까요. 제 만족도는 시즌1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리고 시즌2를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닌 부분이고요. (웃음)

Q. 한국은 출판 만화 신작이 거의 사라졌고 대부분 웹툰으로 이동한 상태다. 한국 만화 생태계와 미래를 어떻게 보는지

예전 출판 만화 시절에는 만화방이 동네마다 있었죠. 매달 수천 권의 책이 쏟아져 나오다 보니, 신인 작가 작품은 책꽂이에 꽂힐 기회조차 거의 없었습니다. 발간 한 달 만에 헌책방이나 폐지장으로 직행하는 때도 많았고요. 그러다 보니 사실상 유명 작가 위주로만 소비가 됐습니다.

그런데 지금 웹툰은 다릅니다. 매대라는 게 없잖아요. 플랫폼에 들어가면 그 작가의 작품이 저장되어 고스란히 쌓여 있습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댓글수, 조회수, 별점 같은 데이터를 통해 작품의 반응을 바로 확인할 수 있고, 제작자 입장에서도 이게 굉장히 큰 리서치 자료가 돼요. 

예전 같으면 만화방 사장님들한테 요즘 뭐 잘나가는지 물어봐야 했다면, 지금은 플랫폼에서 순위와 댓글만 봐도 독자들의 진짜 반응을 알 수 있죠. 악플만 아니라면, 댓글은 업계 입장에서는 좋은 데이터가 됩니다.

저는 웹툰이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것이라고 봐요. 코로나19때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투자가 많이 몰렸어요. 하지만, 지금은 잠시 어려워졌어요. 그래도 결국은 좋은 작품과 작가가 등장해 판을 다시 이끌어 나갈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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