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함·상선 건조 기술 고도화…사업 재편으로 글로벌 경쟁력 강화
[SRT(에스알 타임스) 안병용 기자] 1971년 9월. 정주영 HD현대 창업주는 그리스 선박왕 오아시스의 처남인 리바노스를 찾아갔다. 정 창업주는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과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흔들면서 “모래밭에서 조선소를 짓고 배도 만들어 납품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실제 HD현대는 그로부터 3년 뒤인 1974년 유조선 한 척의 뱃고동을 울렸고, 51년 만에 세계 최초로 5,000척 인도라는 신화까지 만드는 위대한 도전 정신을 보여줬다.
20일 HD현대에 따르면 회사가 5,000번째로 인도한 선박은 필리핀 초계함 2번함인 디에고 실랑함이다. 길이 118.4m, 폭 14.9m, 순항속도 15노트(28㎞/h), 항속거리가 4500해리(8,330㎞)에 이르는 최신예 군함이다. 1호 선박이었던 애틀랜틱 배런호로부터 시작된 대장정의 이정표다. HD현대는 그간 68국 700여 선주사에 선박을 인도했다. 구체적으로 HD현대중공업이 2,631척, HD현대미포가 1,570척, HD현대삼호가 799척을 인도했다. 장구한 조선업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과 일본도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다.
선박 5,000척을 일렬로 세우면 선박 길이를 250m로 가정할 경우 총길이가 1,250㎞에 달한다. 이 길이는 서울에서 도쿄까지의 직선거리(약 1,150㎞)보다 길다. 에베레스트산(약 8,800m) 높이의 140배가 넘는다. 정주영 창업주가 백사장에서 골조를 세우며 시작한 대장정은 현재 이지스함, 호위함, 초계함에 이르기까지 선박 건조 기술 계보의 기반이 됐고 지금은 그의 손자인 정기선 회장이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HD현대가 조선업 패러다임을 바꾼 도전의 역사는 군함에만 그치지 않는다. 시장에서 비교적 부가가치가 낮은 유조선과 벌크선은 물론 기술적 난이도가 높은 액화천연가스(LNG)선과 암모니아 운반선 같은 친환경 기술이 집약된 선박도 주도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HD현대는 고부가가치 선종 중심으로 기술 고도화에 집중하는 사이 경쟁국인 중국이 저가 물량 공세를 퍼붓자 이에 따른 선제적인 사업 재편도 추진하고 있다. HD현대의 조선 계열사인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의 합병 작업은 현재 마무리 중으로 다음 달 통합 HD현대중공업을 출범시킨다. 회사 측은 조선업에서 2035년까지 연 매출 37조원을 달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HD현대는 이번 대기록 달성이 마침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가 본격화되는 시점과 겹쳤다는 점에서 미국 진출도 본격화할 전망이다. 이미 미국 조선·군함 시장 진출에 대비해 현지 협력체계도 구축하고 있다. 미국 최대 방산 조선사인 헌팅턴 잉걸스와는 해군의 차세대 군수지원함(NGLS) 개념설계 협력을 진행 중이다. 에디슨 슈에스트 오프쇼어와는 상선 분야에서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었다. 미시간대와 MIT 등 주요 대학들과 공동 추진하고 있는 조선 인재 양성 사업은 마스가 관련 사업을 인적으로 탄탄하게 뒷받침할 것으로 관측된다.
정기선 회장은 자율운항 기술 확보와 스마트 조선소 구축 등 신기술 확보에도 전념하는 중이다. 소형모듈원자로(SMR)를 비롯해 인공지능(AI) 등 미래 사업을 전략적으로 주도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정 회장은 전날 울산 HD현대중공업에서 열린 ‘선박 5,000척 인도 기념식’에서 “5,000척은 대한민국 조선 산업의 자부심이자 세계 해양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꾼 도전의 역사”라면서 “다음 5,000척과 또 다른 반세기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은 “울산에서 애틀랜틱을 넘어 북극항로까지 나아갈 계기가 마련됐다”면서 “HD현대가 반세기 만에 달성한 5,000척 선박 인도는 새로운 반세기를 향한 도전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