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대한민국 신문논술대회 대학 일반부 최우수상

▲ 이유민 씨.
▲ 이유민 씨.

니체는 그의 저서 ‘우상의 황혼’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몰락하는 힘의 형태로 나타난다.” 쉽게 말해, 그는 민주주의를 믿지 않았다.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모든 사람의 평등을 담보하는 상태’는 기독교적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약 한 세기가 지난 지금, 니체가 2017년의 대한민국을 보고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민주화 이후, 우리는 정치·경제·사회 모든 면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냈다. 그런데 실상은 우울하다. 실업률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고, 청년들은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산다. 정치적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표자는 국민의 뜻을 ‘대리’하는 게 아니라 마치 전권을 ‘위임’받은 것처럼 행동해 국민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즉 대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위임 민주주의(delegative democracy)’로 변질되어버린 셈이다.

그러나 모든 국민은 자신의 뜻이 정치에 반영되길 바라는 자유의지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목소리가 외면당하는 사회에서는, 국가에 대한 믿음도, 직업적 소명의식도 기대하기 힘들다. 고용절벽 시대의 일자리 창출방안을 논하는 것도 바로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인정받을 수 있고,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요구가 반영되는 환경 속에서 노사 간 합의, 계층 간 합의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치적 토양부터 바꾸어나가야 한다. 민주주의는 사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사상에 기반한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는 제도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다수결의 원칙에는 ‘다수가 소수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대전제가 깔려있다. 한국에서는 바로 이 부분을 간과해 온 탓에 사회적, 정치적 발전이 제자리걸음이었다. 해결책은 합의제 민주주의를 구현해 나가는 방법뿐이다.

합의제 민주주의는 소수의 의견을 반영할 길을 열어 둘 뿐 아니라, 그 누구의 편도 아닌 적절한 합의를 추구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일자리 정책을 민간에서 주도하냐, 정부에서 주도하냐는 식의 논쟁은 소모적이다. 어느 하나가 답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뿐더러, 일자리가 부족한 근본적 원인을 잘못 짚어서다.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의 일자리 문제는 각 계층 및 세대간의 요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합의를 찾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먼저 비정규직 문제다. 사실 비정규직은 정규직만큼이나 중요한 산업 환경의 한 축이다. 때문에 어느 국가에서나 비정규직은 존재한다. 우리나라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공론화된 것은, 그들의 고용환경이 지나치게 부실하고 직장 내 차별에서 비롯되었지, 그 수나 존재의 유무가 문제라고는 볼 수 없다. 그렇기에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방안은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정부의 역할은 노사 간의 이해관계 차이에서 중립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직업적 소명을 느낄 수 있을 만한 산업전반의 환경을 구축하는 데 있다. 어느 한 쪽의 편만을 드는 건 다분히 위험한 발상이다.

청년 실업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봐야 한다. 정부가 나서서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림으로써 고용의 활로를 뚫겠다는 발상 자체는 좋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되어선 안된다. 청년실업의 근본적 원인은 단순히 일자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청년이 ‘원하는’ 일자리가 부족해서다. 중소기업이라도 청년이 일하고 싶은 환경, 적절한 보상이 제공된다면 합의의 길이 열린다. 여기서 정부가 해야할 일은 기업엔 적절한 규제 완화나 세금혜택을 주고, 청년에게는 양질의 일자리 정보를 제공하는 일이다.

결국 답은 노사정 간의 ‘합의’로 귀결된다. ‘합의’만이 일자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가장 합리적 방안일뿐더러 민주주의의 궁극적 가치와 가까워지는 유일한 방법이다. 무엇보다도 집단 간의 갈등이 합의로써 해결 가능한 사회만이 일하고 싶은 국가, 살고 싶은 국가가 될 수 있다.

다시 니체로 돌아온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갈등 양상을 니체가 보았다면, 그는 민주주의에 더욱 회의를 느꼈을지 모르겠다. 새 정부의 정책은 과연 니체가 민주주의에 대해 낙관적으로 돌아서게 만들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의 평등을 담보하는 상태’가 불가능 할 지라도 그것에 가까워지기 위해 끊임없는 합의와 대화를 시도하는 사회. 이런 사회가 된다면 기대해보아도 될 만한 상상이 아닐까? <이유민, 일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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