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부시 정권이 2003년 이라크 침공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허위로 드러났다. 당시 이런 주장에 대해 언론은 별다른 의혹의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걸프전쟁 이후 이라크가 거의 무장 해제 당하다시피 해 자기방어용 무기밖에 없다는 정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언론조차 별 의심 없이 부시 행정부의 ‘거짓’을 그대로 받아쓴 것이다. ‘언론선진국’이라는 미국의 현실이 이럴진대 과연 어느 나라의 언론이 독립적이고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언론의 독립성과 공정성, 그리고 권언유착 문제와 관련해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 20세기 ‘진보언론의 영웅’ 이사도어 파인슈타인 스톤이다. 월터 리프먼과 함께 미국 언론의 양대 거목으로 꼽히는 스톤은 리프먼과 달리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그는 1953년 독립주간신문인 ‘I. F. 스톤 위클리’를 창간해 미국의 냉전정책에 반대했고, 주류 언론이 침묵할 때 매카시 광풍에 맞서 싸웠으며, 베트남전 참전의 빌미가 된 통킹만 사건을 날조라고 비판했다. 통킹만 사건은 훗날 국방부 기밀문서가 언론에 폭로됨으로써 거짓이었음이 공식 확인됐다. 스톤의 결론은 이렇다.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All governments lie)”

우리는 지금 참담하기 짝이 없는 ‘정부의 거짓’과 마주하고 있다.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가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전대미문의 질 낮은 국정농단 파문에 국민은 분노를 넘어 허탈감에 빠져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라크 침공 당시 미국 언론처럼 받아쓰기 바빴던 우리 언론이 ‘앵무새’의 습성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매’의 눈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언론’의 선두에 종합편성채널(종편) JTBC가 있다. 대안 언론을 표방한 ‘뉴스타파’ 또한 빼놓을 수 없다. JTBC는 200여 개의 파일이 들어 있는 최순실씨가 사용하던 태블릿 PC에서 최씨의 국정개입을 입증하는 ‘대통령 문서’를 확인해 특종 보도함으로써 의혹정국의 흐름을 결정지었다. JTBC는 2011년 창사 이래 시사보도 프로그램 최고 시청률 기록과 함께 ‘가장 신뢰하는 언론매체’ 1위에 올랐다. ‘선택과 집중’ 보도의 개가라고 할 수 있다.

‘뉴스타파’는 최순실씨와 박근혜 대통령의 ‘40년 우정’을 입증하는 동영상을 입수해 보도하는 기민함을 보여줬다. 2013년엔 조세피난처 관련 특종을 내보내 주요 신문들이 이를 받아 사설까지 쓰게 하는 등 탐사 저널리즘의 전형을 보여주기도 했다. 침묵의 카르텔 속에 묻혀버릴 뻔한 중대한 사건을 일개 비영리 독립 언론이 찾아내 수면 위로 드러낸 것이다.

이런 사례들에서처럼 지금 우리 언론이 그 본연의 사명에 입각해 사실보도는 물론 진실보도 측면에서도 사회적 기능을 다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보도의 겉옷을 걸치고 있지만 그 안에 어떤 진실이, 어떤 정의가 갇혀 숨죽이고 있는지는 섣불리 예단하기 어렵다. 저널리즘의 의무에 대해 천착한 미국 허친스위원회는 “사실적으론 맞지만 실질적으론 거짓일 수 있는” 언론보도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위원회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제 사실을 진실되게 보도하는 것으론 부족하다. 사실에 관한 진실을 보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겨봐야 할 대목이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부끄러운 언론보도를 기억한다. 진정 충실한 사실보도가 이뤄졌는가. 보이지 않은 권력의 작용은 없었는가. 세월호 ‘전원구조 오보’ 소동이라니…. 당시 KBS 보도국장은 사퇴의사를 밝히며 위로부터 “끊임없이 보도통제를 받았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진실보도는 고사하고 초동단계에선 사실보도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사실 뒤에 가려진 진실’까지 보여주기를 기대하는 건 그야말로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격이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 언론의 ‘최순실 게이트’ 보도는 비록 지상파의 경우 ‘지리멸렬’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지만 JTBC 같은 종편이나 대안방송의 활약은 언론의 사회적 책임이란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워싱턴 포스트의 전 발행인 유진 마이어가 기초한 워싱턴 포스트 보도원칙은 “진실로서 확인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진실(the truth as nearly as the truth may be ascertained)”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보도는 물론 진실도 ‘버전’을 고려해 보도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 언론에 주어진 사명이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국가, “이게 나라냐”라며 울부짖는 국민 앞에서도 저널리즘의 본령을 망각하고 정파적 이해에 몰두한다면 그건 이미 언론이 아니다. 일부 그런 ‘유사언론’이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언론이 최소한 정치권력에 복무하지 않겠다는 결의만 분명히 해도 언론의 존재가치는 충분하다. 지금이야말로 언론의 사회적 사명에 주목하고 또 주목할 때다.

저작권자 © SR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