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셰린의 밴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 유머와 비극, 지성과 어리석음, 다정함과 폭력의 갤러리에 들어서다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이 리뷰에는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일랜드 내전이 한창이던 1923년 4월 1일, 외딴 섬 ‘이니셰린’에 사는 둘도 없는 친구 파우릭(콜린 파렐)과 콜름(브렌단 글리슨)이 절교한다.

일방적 절교를 선언한 것은 콜름. 둘도 없는 절친의 돌발 행동에 파우릭은 충격을 받는다. 파우릭은 실연보다 더한 이 절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를 좋아하지 않냐고 거듭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콜름의 대답은 “그냥 자네가 싫어졌어”라는 뜬금없고도 단호한 한마디.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그래도 파우릭은 절친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다. 달력을 보며 콜름의 만우절 장난일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일말의 희망도 품어본다. 하지만 평소처럼 농담을 건네는 자신을 바라보는 콜름의 굳은 표정에 절망한다. 

파우릭은 이 섬에서 가장 불쌍한 도미닉(배리 케오간)과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어디선가 주운 갈고리 막대기의 쓰임새를 궁금해하는 도미닉에게 파우릭은 매번 다정함을 보여준다. 도미닉은 자신이 파우릭과 죽이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파우릭 머릿속에 오직 콜름 생각만 가득하다. 눈치 없는 도미닉조차 이를 알아차리고 화낼 정도.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헤어진 애인의 마음을 되돌리려는 것보다 더 간절한 바람으로 콜름에게 매달리며 집착하는 파우릭. 콜름은 남은 인생을 사색하고 작곡하면서 알차고 생산적으로 보내고 싶어 했다. 파우릭이 지껄이는 한심한 이야기나 듣다 보면 죽을 때 남는 게 없다는 것.

둘은 오랜 세월 동안 오후 2시에 펍에서 술을 마시며 어울렸다. 그렇게 절친이라 믿었던 자의 입에서 난데없이 온기 없는 말이 쏟아진다. 그 긴 우정이 짝사랑만도 못한 관계였다니.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파우릭을 지탱해주는 세계는 이니셰린 섬, 반려 당나귀 제니 그리고 콜름이다. 그중 콜름이라는 기둥 하나가 순식간에 뽑혀나가자 파우릭의 세상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똑똑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케리 콘돈)은 오빠를 아끼기에 콜름의 태도에는 분통을 터뜨린다.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묻자 나온 대답은 ‘지루함’이다. 이제 인생에 지루함을 둘 자리가 없어진 콜름. 섬에서 유일하게 예술혼을 가진 이 지적이고 매력적인 남자는 이해를 호소한다.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때때로 파우릭은 도미닉과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의 모자람이 드러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시오반은 누나처럼 그를 다독인다. 다만 섬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자신의 처지를 공감하지 못하는 오빠가 한편으로는 야속하기만 하다. 사실 파우릭은 여동생보다는 당나귀 ‘제니’와 더 친밀해 보이기도 한다.
 
동생이 외롭건 말건 파우릭은 자신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한 줌의 평온함을 취하려는 콜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감정적이고 순수한 남자의 심연에서는 배신감이 검은 흙탕물처럼 꾸역꾸역 차오른다.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발 자기를 가만히 내버려 둬 달라는 콜름. 그는 절절한 부탁과 함께 이를 어길 경우 일어날 엽기적인 어떤 행동에 대해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파우릭은 포기를 모른 채 완고한 움직임을 이어나가고 결국 섬 전체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하는데…

‘밴시’는 사람의 죽음을 미리 알리고 애도하는 착하면서도 불길한 존재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이 요정이 통곡하면 반드시 누군가 죽는다고 믿는다. 밴시라는 존재가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외모의 맥코믹 부인은 항상 누구에게나 불청객이다. 

가상의 섬 ‘이니셰린’을 배경으로 하는 이 블랙코미디 영화에서 그녀는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 근처를 배회하며 각 장면에서 적절한 복선을 던진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아일랜드 내전을 인간관계에 비유하며 어리숙해 보이는 인물과 대사 속에 밀도 있고 예리한 메타포를 심어 넣는다. 아름다운 영상미 안에 녹아있는 관계의 어려움에 관한 담담한 우화적인 접근법에는 피부로 와닿은 현실감이 있다.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마틴 맥도나 감독은 전작 ‘쓰리 빌보드’처럼 평범한 이웃들이 등장하는 이번 작품은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관계 변화가 몰고 오는 뜻하지 않은 사건을 관객들이 천천히 따라가게 한다.

파우릭과 콜름, 파우릭과 도미닉, 파우릭과 시오반 그리고 시오반과 도미닉 관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유머와 비극, 돌발적인 사고와 아이러니의 나열은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키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지성과 어리석음, 예술과 현실, 다정함과 학대, 평화와 폭력의 일상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 그리고 세트 미장센과 어우러져 기묘한 불안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사람들은 각자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평범한 인생을 살다가 가면을 벗어던진 콜름. 그는 자신이 작곡한 곡에 ‘이니셰린의 밴시’라는 제목을 붙이려 한다. 파우릭이 이니셰린에는 밴시가 없다고 하자 콜름은 그들이 가만히 상황을 즐기고 있을지 모른다고 답한다. 영화 속에서 누가 밴시들인지 생각해보는 것도 나름의 감상 포인트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12일(현지시간) 개최되는 제9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콜린 패럴), 여우조연상(케리 콘던), 남우조연상(브렌던 글리슨), 남우조연상(배리 키오건), 각본상, 음악상, 편집상 등 9개 부분에 후보로 올랐다.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이니셰린의 밴시.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 제목: 이니셰린의 밴시
◆ 원제: The Banshees of Inisherin
◆ 감독/각본: 마틴 맥도나
◆ 출연: 콜린 파렐, 브렌단 글리슨, 케리 콘돈, 배리 케오간 외
◆ 수입/배급: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114분
◆ 국내개봉: 2022년 3월 15일
◆ 평점: 7.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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