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 40주년을 맞은 요즘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자인 덩샤오핑(왼쪽)에 대한 시진핑 주석의 감정은 복잡하다.ⓒsr타임스
▲개혁개방 40주년을 맞은 요즘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자인 덩샤오핑(왼쪽)에 대한 시진핑 주석의 감정은 복잡하다.ⓒsr타임스

[SR(에스알)타임스 우태영 편집위원]

올해는 중국이 덩샤오핑( (鄧小平 등소평)의 지도 하에 개혁개방정책을 시작한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덩샤오핑은 1978년 미국 일본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하였으며, 국민들에게는 이른바 흑묘백묘(黑猫白猫)론과 선부론(先富論)을 강조하며 잘살기에 나서라고 독려하였다. 흑묘백묘론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으면 된다는 의미로 실용주의 정책을 상징하는 구호이다. 선부론은 누구든 우선은 부자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평등을 강조하는 공산주의 이념에 배치된다. 

중국은 1966~1976년 동안에는 문화혁명으로 폐쇄된 국가였다. 그러나 1978년 덩샤오핑이 과감한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한 지 4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미국에 이은 세계 제 2위의 경제대국으로 급성장했다. 중국은 지난 40년 동안 고속성장을 구가해 왔으며, 수억의 인구는 가난에서 벗어났다. 중국인들은 지금도 세계의 관광지를 흽쓸고 다니며 명품을 싹쓸이하고 있다.

중국은 지금 미국과 세계 패권을 놓고 다투는 입장에 올라섰다. 2018년 개혁개방 40주년이 되는 올해 중국인들이나 공산당이나 가장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 인물은 다름아닌 개혁개방의 설게자인 덩샤오핑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공산당 지도자인 시진핑(習近平 습근평) 주석은 덩샤오핑에 대한 일체의 기념행사를 불허하는 등 덩샤오핑 지우기 작업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한다.

 

베이징에 있는 한 대학교수는 최근 일본 니케이와의 인터뷰에서 “지난해부터 중국의 대학들은 개혁개방 정책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성대한 이벤트 개최를 검토하였다. 그러나 당국은 이에 대한 허가를 전혀 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니케이는 중국 당국의 메시지는 덩샤오핑을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니케이는 또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왕푸징 서점에서 책을 진열해 놓은 것을 보면 덩샤오핑을 보이지 않게 “숨기기” 위하여 노력한 듯한 흔적이 보인다고 보도했다. 개혁개방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마련된 특별 코너에 가장 눈에 띄게 진열중인 책은 시진핑과 문화혁명 초기에 사망한 류사오치(劉少奇 유소기)에 관한 책들이라고 한다. 정작 개혁개방의 설계자인 덩샤오핑과 관련된 책들은 서가의 아랫부분에 꽂혀 있어서 마치 개혁개방과는 무관한 인물로 보일 정도라고 한다.

국영 미디어들도 덩샤오핑에 대해 분명하고도 모욕적인 평가를 내놓고 있다고 언론들은 전했다.

덩샤오핑과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무언의 탄압도 진행되고 있다.

공산당 중앙위원화는 최근 민간 분야에서 일하며 ‘개혁개방’에 공헌한 기업인 100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알리바바의 마윈, 텐센트의 마 후아텡 등이 들어 있다. 그러나 완다그룹의 왕젠린(王健林 왕건림)이 빠졌다고 한다. 인민해방군 출신인 왕은 부동산회사에서 출발해, 쇼핑센터에서 엔터테인먼트 회사와 헐리우드 스튜디오, 극장 체인을 소유한 거대재벌로 성장했다.

그는 덩 샤오핑과 같은 쓰촨성(四川省 사천성) 출신이다. 왕은 덩샤오핑 가족들과 매우 친밀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완다그룹은 해외자산 취득과 관련, 중국정부로부터 엄밀한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시진핑이 덩샤오핑과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자신만의 중국을 만들겠다는 야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은 지난 해  중국 공산당전국회의에서 ‘시진핑 사상’으로 인도되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선언했다. 시진핑이 자신의 권력과 카리스마를 강화하기 위하여 덩샤오핑이라는 거인이 남긴 흔적을 지우려 든다는 설명이다.

시진핑 이전의 지도자들은 모두 덩샤오핑이 지명한 인물들이었다. 덩샤오핑은 자신의 후계자로 장쩌민(江澤民 강택민)과 후진타오(胡錦濤 호금도)를 직접 지명하였다. 이들은 모두 이미 은퇴하였다. 덩샤오핑이 직접 지명하지 않고 지도자가 된 사람은 시진핑이 처음이다. 자신만의 시대를 직접 만들고 싶어 하는 시진핑은 덩샤오핑을 능가하기 위하여 중국을 세계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과 대등한 나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후야오방(왼쪽)과 시진핑 주석의 이버지 시중쉰ⓒsr타임스
▲후야오방(왼쪽)과 시진핑 주석의 이버지 시중쉰ⓒsr타임스

시진핑이 덩샤오핑을 지우려는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의 아버지와 관련된 사적인 일 때문이다.

30년 전인 1989년에 일어난 천안문사태와 관련된 일이다. 그 전에 1987년 후야오방(胡耀邦 호요방) 공산당 총서기가 해임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후야오방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을 충실하게 추진하고 있었으며, 중국인들로부터 인기도 높았다. 그러나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시위사태는 2년 뒤인 1989년 천안문사태로 확대되었으며,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을 해임하기로 결정했다. 그 때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 (習仲勳 습중훈)은 정치국원이었는데, 덩샤오핑의 후야오방 해임 결정에 반대하였다.

시중쉰은 심지어는 덩에게 “후야오방 해임한다면 내가 공산당 총서기가 되어 그가 하던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도 거부되었다. 시중쉰의 만류 때문에 후야오방을 해임하려는 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도 지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야오방은 결국 1987년 1월에 해임되었다.

그 후 얼마 뒤에 시중쉰도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시진핑의 아버지는 건강이 악화되어 2002년에 결국 사망하였다.

시중쉰이 실각하였을 때 아들 시진핑의 나이는 30대였으며, 지방정부의 간부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의 아버지에게 닥친 일을 기억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덩샤오핑을 능가하려는 시진핑의 야망은 최근에는 뜻대로 진행되어가지 않고 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보복조치로 인해 중국 경제가 어려움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또 중국 경제에 그동안 쌓여온 과도한 부채 문제나 인구 고령화 등도 시진핑의 발목을 잡고 있다. 국내적으로도 시진핑 개인 우상화 정책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중국 경제에 닥친 어려움이 가중될수록 덩샤오핑에 대한 중국국민들의 향수가 강해질 수도 있다. 또 그럴수록 시진핑은 더욱 덩샤오핑 지우기를 노골화할 수도 있다. 

덩샤오핑에 대한 시진핑의 불편한 감정표현을 보면 중국 정치에서 중오심과 적대감정은 수십년이 지나도 결코 잊혀지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SR(에스알)타임스 우태영 편집위원]

저작권자 © SR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