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망각을 인지하는 엔딩에 이르러 빠져드는 끝 모를 심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순간을 장악하는 제목과 음악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마침내 또 다른 낯선 땅 오클라호마에 이르렀다. 낮에는 기근에 시달리고, 밤에는 굶주린 늑대가 배회하는 땅. 이 그림에서 늑대들을 찾을 수 있는가? 

- ‘플라워 킬링 문’(2023) 중 ‘오세이지족의 문화와 역사’에서 -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스카 수상작 ‘드라이브 마이 카’(2021)에서 음악을 맡았던 이시바시 에이코의 퍼포먼스 영상 의뢰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이 리뷰에는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쿠미(오미카 히토시)는 8살 된 딸 하나(니시카와 료)와 단둘이 산골 마을에 살고 있다. 주민들을 도와주는 심부름 일을 하는 그는 오늘도 하나를 데리러 학교 가는 걸 잊고 있었다. 최근 들어 건망증이 심해진 듯하다. 저녁에 마을 사람들과 글램핑장 조성에 대한 모임이 있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마을 회관에서 열린 글램핑장 조성 주민설명회를 진행하던 회사직원 타카하시(코사카 류지)와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는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들은 회사 편에 서서 자신 있게 설명을 이어 나가보지만, 깨끗한 물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주민들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주민들은 순박한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들이 발붙이고 사는 터전에 관한 완벽한 전문가들이었다. 필사적으로 땅을 지키려는 그들은 어설픈 감언이설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무분별한 개발이 가져올 재앙들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미사여구로 치장된 글램핑장 조성 설명회는 사실 허울에 불과했다. 정부 보조금이라는 눈먼 돈을 빼먹기 위한 회사의 얄팍한 꿍꿍이였음은 진즉 간파당한다. 소란스럽게 감정이 끓어오르던 설명회는 냉정한 해결사 타쿠미와 사무적이지만 예의 바르고 정중한 태도의 마유즈미 덕분에 일단락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회사와 마을 사람들 사이에 끼어 이리저리 치이던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이 일을 계기로 대자연과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받게 된다. 탐욕스럽게 이익만을 추구하는 대도시 생활에 지쳐있는 자신들을 되돌아보게 된 것. 한편, 회사의 지시로 다시 마을로 향하게 된 두 사람은 타쿠미와 하나에게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사건을 함께 하게 된다.

◆ 비어있는 곳을 가득 채우는 상상과 은유 그리고 단절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서사는 단순하다. 대신 많은 공간을 상상과 은유로 채워 깊은 맛을 낸다. 그 채움을 담당하는 것은 카메라의 앵글과 전위적인 음악. 이 두 가지는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이 작품이 가진 끝 모를 깊음은 ‘악은 존재한다’(파란색)와 ‘존재하지 않는다’(빨간색)로 제목을 알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빗방울처럼 흩어지는 스플래시와 귀를 파고드는 일렉 기타 소리를 지나 미궁에 들어선 듯한 현악 연주가 흐른다. 다층적 음악과 동시에 극단적인 로우 앵글로 하늘에 뿌리내린 나무를 올려다보는 오프닝은 몽환적이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여러 번 등장하는 이 롱테이크 신에는 누군가의 발소리 혹은 호흡이 섞여 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과연 누구의 시선일까? 하마구치 감독은 많은 장면에서 시선을 카메라로 대체하지 않는다. 덕분에 관객들은 상상력을 무한 확장할 수 있다.

그 의도는 타쿠미가 하나의 학교로 찾아간 신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차 뒷좌석에서 실려 후방을 찍는 카메라는 ‘이것은 영화’라고 관객에게 말은 건다. 촬영대상이 지금 어디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무엇을 하는지 스크린에 재현해 주는 도구 역할에 충실하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오롯이 관객의 몫.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숲속에서 하나를 찾아내는 타쿠미의 시퀀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언덕에 가려져 사라진 순간부터 다시 하나와 함께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관객은 스스로 카메라가 되어 머릿속에서 부녀의 변신을 상상해 그려낸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성실한 관찰자다. 하나가 꾸는 사슴의 꿈조차 세심하게 관찰해 선명한 문양으로 베어낸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롱테이크로 그려내는 이 기묘한 단절의 몽타주는 강렬하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 터전을 침범당한 사슴은 어디로 가야 할까?

마을 사람들은 상류에 사는 이들의 책임감에 관해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들 역시 문명을 버리고 야생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공생보다는 기생에 근접한 안락한 삶을 영위해야 하기 때문이다.

1급 청정수에 의지해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이 자연에 보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의 균형이 깨지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라는 외지인들이 벌이는 소동은 마을 사람들 처지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영역에 침범해 그들을 몰아내고 질병을 안겨준 백인들의 침략행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원주민이든 새로 정착한 이주민이든 마을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영역을 잘 지키고 있다. 마을회장인 스루가의 아들이 쳄발로에 플라스틱 대신 전통에 따라 깃털을 사용하는 것을 고집하듯 이 공동체가 일궈낸 삶의 방식은 견고하다. 

타쿠미도 마찬가지다. 사진으로만 남아있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홀로 딸 하나를 키우고 있는 아버지로서의 타쿠미, 사슴이 어디로 쫓겨날지 걱정하는 마을의 든든한 심부름꾼 타쿠미, 능숙하게 장작을 동강 내는 나무꾼 타쿠미의 위치는 단단해 보인다. 하지만 외지인 타카하시가 타쿠미를 모방하기 시작하면서 균형이 깨지고 균열이 일어난다. 영역을 침범당한 사슴은 어디로 가야 할까? 막다른 벼랑에 몰리면 무엇을 해야 할까? 

새로운 삶을 만나 마냥 들떠있는 것은 외지인 타카하시. 그런 타카하시를 보면서 조금씩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는 관객들. 그 순간 관찰자인 카메라는 건망증에 걸린 관객들에게 앞서 보여줬던 타쿠미와 마을 사람들의 입장을 다시 전달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이 작품에는 스태프 출신인 오미카 히토시처럼 연극적이면서도 연극적이지 않은 듯한 날것의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의 톤앤매너가 치밀한 감독의 연출 설계와 결합해 있다. 장작을 패며 활짝 웃는 빨간색 계열 옷을 입은 타카하시를 제외하면 파란색 옷을 입은 타쿠미, 하나, 마유즈미는 사슴처럼 무표정하게 연기한다.

관객들은 엔딩 시퀀스를 마주하는 순간, 다양한 해석과 상상을 펼칠 수 있다. 레이어를 차곡차곡 잘 쌓아올린 다층적 영화의 여운은 잠에서 깬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지곤 한다. 명작은 망각을 초월한다.

P.S. 자연에서는 죽음의 살이 삶의 양분으로 이어진다. 이 순환에 선과 악은 없다. 감독이 의미 없이 지었다는 제목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역설적으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순간을 장악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린나래미디어

제목: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Evil Does Not Exist)

연출&각본: 하마구치 류스케

음악: 이시바시 에이코

출연: 오미카 히토시, 니시카와 료, 코사카 류지, 시부타니 아야카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공/공동배급: 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공동제공: 키노라이츠

러닝타임: 106 분

국내개봉: 2024 년 3 월 27 일

상영등급: 12 세 이상 관람가

스크린 리뷰 평점: 8.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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