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지도를 바꾸는 노력은 50년 전 미국 MIT(매사추세츠) 공대와 하버드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부터 계획이었다고 말하는 곽영훈 박사ⓒSR타임스
▲한반도의 지도를 바꾸는 노력은 50년 전 미국 MIT(매사추세츠) 공대와 하버드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부터 계획이었다고 말하는 곽영훈 박사ⓒSR타임스

◆ 홍용락 고문이 만난 '시대를 바꾸는 사람들' [26] '한반도의 지도를 바꾸는 정책 건축가'- 곽영훈(79) 사람과 환경그룹 회장(박사)

수행한 국내 프로젝트로는 서울시 최초 도시기본계획을 시작으로, 88 서울올림픽공원 마스터플랜, 올림픽공원 내 '영원한 평화의 불 틀' 조각물 설계 및 제작, 우리나라 최초의 지하철 건설의 시작인 서울 지하철 2‧3‧9 호선 기본계획 등이 있다. 그 결과 한강을 중심에 두고 강남개발이 촉진되고, 오늘 서울 모습의 골격을 이루었다.

 

또 한강 종합개발계획 및 88 올림픽대로 계획, 특히 서울 대학로 도시설계로 우리나라 케이 컬츠(K-Culture)의 본산을 이루었다.

 

서울 외곽 신도시의 시작인 일산지구 도시설계 및 실시설계를 하였고 이를 계기로 킨텍스(KINTEX) 와 출판단지 등이 발전할 수 있었다.

 

대전 EXPO 마스터플랜을 하면서 대덕연구단지와 카이스트(KAIST)가 생겼고 유성·진잠지구를 한밭 도시의 골격으로 삼았다.

 

영종도 신공항과 주변 지역 개발을 통해서 동북아의 허브(Hub) 공항으로 자리매김 하게 하고 훗날 동북아는 물론 세계 시민이 어울려 사는 평화의 세계시(市) 계획을 입안했다.

 

이 외에도 대전시 도시기본계획과 성남, 춘천시, 여수 시청을 포함한 여수반도 종합 개발 기본계획 등등의 도시기본계획을 비롯해 1979년 구자춘(具滋春) 내무부 장관 시절에는 전국 모든 도시의 장기 종합발전계획을 수립해서 21세기 대한민국을 준비했다.

 

제주도 종합개발 계획과 제주도 자유시 계획을 통해 IUCN (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 . 세계자연보전연맹 총회)를 유치하고 자연 보전의 시금석이 되도록 했다.

 

기타, DMZ UN 평화 시 계획 등등까지 전국 곳곳의 도시 계획과 건축 정책을 제안하고 설계 및 마스트 플랜(기본 계획)에 참여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보스턴 재개발계획을 비롯한 캘리포니아주 Napa City, 매사추세츠주 Fall River City 를 비롯해 홍콩, 일본, 오스트리아의 도시 및 지역 종합개발에 참여했다. 또 필리핀 수빅 만(Subic Bay), 이집트 시나이(Sinai) 과학 문명 도시, 나이지리아, 알제리 (Algeria), 이란, 가나, 네팔 등의 테마 도시 건설 계획에 설계 및 마스터 플랜 등으로 대한민국의 해외 원조 사업에 기틀을 마련했다.

 

곽영훈 박사가 지금까지 국내·외 도시 건설 및 건설 테마 기획 활동을 한 것은 특징이 있다.

 

우선 양적으로 한 개인이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분은 과연 어떤 능력을 갖추고 계신 분일까? 이분을 이렇게 국내·외에서 선호하는 특별한 능력은 무엇일까? 그 점이 무엇보다 궁금하다.

 

일반적으로 건축 활동이란 의뢰 측으로부터 의뢰받아 설계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곽 박사는 고정 관념을 뛰어넘는 능동적인 그 무엇이 분명히 있을 것 같다.

 

1975년 서울대 환경대학원부터 홍익대, 고려대, 연세대, 하버드대학원, 제주대, 네팔 룸비니대학 등 후학들을 키우는 데 기여하면서 국가 전체의 발전을 위해 정책기획을 실현한 것은 어마어마한 비전과 실행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해 보인다.

 

국가정책 건축가라는 설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건설과 건축은 설계 때부터 인간의 생활 조건과 관련지어 역사, 문화, 생활, 자연환경 등을 고려한 공간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분 같다. 그는 국토연구연을 만드는 정책과 한국 종합조경공사 초대 상임고문 그리고 토지금고를 토지 공사로 설립하여 초대 고문을 역임한 바 있다.

곽 박사께서는 무엇 때문에? 왜? 그렇게 하는지가 더 궁금하다. [편집자 주]

 

- 1960, 70년대 미국 땅에서 젊은 애국심으로 계획한 한반도 미래 지도(地圖)가 50년 후 국토개발계획을 거쳐 현실로 이뤄짐

- 한반도 자연과 역사를 바탕으로 국토 개발 방향으로 활성 축과 녹지 축으로 나누고, 활성 축은 1988 서울 올림픽 같은 글로벌 이벤트를 접목해 개발

- 두 번의 올림픽(1988년 서울 올림픽.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과 두 번의 엑스포(1993년 대전 엑스포. 2012년 여수 엑스포)의 설계자로 50년 전의 꿈을 현실화

- 한강 종합개발, 대학로, 올림픽대로, 지하철 2호선, 인천국제공항, 청계천 복원 등등 서울 수도권 인프라 설계 및 제안자로 이 지역을 한반도와 동북아의 중심 지형으로 설계

- 대전을 확장한 행정수도 계획, 과학 엑스포 인프라와 신개념 인프라 고속철도 KTX 제안 등으로 대전 및 중부권 중심 한반도 허리 개발 계획 구상

- 낙후된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 지금도 진행 중인 여수 및 남해권 프로젝트(광양, 광주, 목포)로 해양 진출을 모색

- 도시 건설의 설계는 인간 생활 조건, 역사, 문화, 자연조건에 더해서 평화(peace) 환경 공간이 추가되어야 함을 강조

▲2007년 육십년 지기(知己) 반기문 당시 뉴욕 UN 사무총장과 곽박사 부부가 관저에서 기념촬영ⓒSR타임스
▲2007년 육십년 지기(知己) 반기문 당시 뉴욕 UN 사무총장과 곽박사 부부가 관저에서 기념촬영ⓒSR타임스

Q. 박사님 반갑습니다. 건축가 맞으시죠? 그런데 주위에서 건축 설계가로서 한반도 지도를 바꾼 분이라고 하는 이유가 우선 궁금합니다.

== 나는 공사를 해서 땅을 넓히는 사람이 아니고, 환경설계와 마스터 플랜(종합 계획)을 하는 사람입니다. 지도를 바꿨다는 얘기들을 하는 것은 대한민국과 해외에서 환경설계 와 마스터플랜 작업을 많이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관여한 일들이 자연조건을 바탕으로 그 시대에 적합하게 개발과 보존의 방향으로 이뤄지게 했다는 얘기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6,70년대 나는 MIT(매사추세츠) 공대에서 건축학과 도시계획학을 공부하고 하버드 대학원에서 정책학과 교육학 공부를 마치고, 그 당시 세계 최고의 조경 회사 SDDA에서 조경 실무를 담당하다 귀국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취업하고 있는 동안 1964년 뉴욕의 브루클린 Far Rockaway 세계박람회(World’s Fair)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 조국 한국에서도 이런 박람회를 하게 되면 한국 사람들도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나라 발전을 빠르게 할 수 있는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시기인 1964년 도쿄 올림픽을 미국에서 TV로 보면서, 올림픽 개최가 낙후되고, 위축된 한국 이미지에서 놀라운 국가 발전의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는 전략일 수가 있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글로벌 이벤트가 내 조국에서 이뤄지면 국내 인프라 구축을 위해 내 전공과 국가 발전을 위한 열정을 살려 국토의 개발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확신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글로벌 이벤트인 88 서울 올림픽과 1993년 대전 엑스포와 2013년 여수 엑스포의 밑그림은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구상한 것이었죠.

이후에 1971년 녹지 축‧ 활성 축 설정과 함께 글로벌 이벤트 주최 다섯 거점을 선정· 실행한 것입니다.

덧붙여,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도 내가 1968년 프랑스 그로노블 동계올림픽 방송을 시청하다가 대관령 근처에 동계올림픽을 유치해 보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때를 대비한 인프라 구축을 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지내며 유학 시절에도 가까웠던 작고(作故)한 전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에게 대관령 근처에 스키 리조트를 만들어 겨울 스포츠 대중화를 상의했습니다.

김석원 회장은 대관령 발왕산 100만 평을 저가로 구입하고, 외국 스키장 건설 노하우를 벤치마킹해 1975년 국내 최초의 스키장 용평리조트를 개장했습니다.

 

Q. 그럼, 박사님께서는 6.70년 미국에서 계실 때 대한민국 국토개발에 대해 계획을 세웠고, 1970년대 귀국해서 구체적으로 계획을 입안해서 실행하셨다는 것인가요?

== 그렇습니다. 미국에서 나는 고국에 돌아가서 할 일로 한반도 산세와 지형, 물의 흐름을 훼손하지 않는 자연환경을 고려해 마스터 플랜을 계획했습니다. 1971년 미국에서 공부할 때, 국가성장을 위한 한반도의 국토 개발을 활성 축과 녹지 축으로 나눴습니다. 활성 축은 그 위치를 중국의 광개토왕비가 있는 지안시(集安)로 시작해서 북한의 평양, 남한의 서울, 대전, 여수까지 직선(直線)으로 연결하는 거점지역을 나눴습니다.

이 다섯 지점은 남한 만을 생각하지 않고 통일 한반도를 생각하며 북한까지도 계획에 포함했습니다.

활성 축이 개발에 중점을 두는 계획이라면 녹지 축은 개발과 보존 사이에 균형을 두고자 하는 녹지공간을 확보하는 계획이었습니다. 무질서한 도시 확산 같은 개발 논리에 묻혀 녹지가 마구 훼손될 수 있는 것을 미리 예방하자는 취지에서 미리 설정해 놓자는 계획이었습니다. 녹지 축은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일직선(一直線)으로 그 범위가 설정 됩니다. 남한의 경우는 백두대간과 지리산 등이 중심 지역으로 해당한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위도 38선 위쪽은 북한이기 때문에, 활성 축 개발은 쉽지 않습니다. 남한의 경우는 내가 구상한 활성 축과 녹지 축을 기반으로 50년 동안 88 서울 올림픽, 2018 동계올림픽, 1993 대전 엑스포, 2002 한·일 월드컵, 2012 여수 엑스포 등의 다양한 글로벌 이벤트를 접목해 개발하고 있습니다.

▲ⓒ반도 녹지 축·활성 축 그리고 다섯 거점과 각각의 주제 개념
▲ⓒ반도 녹지 축·활성 축 그리고 다섯 거점과 각각의 주제 개념

Q. 곽 박사님이 위에서 말씀한 글로벌 이벤트 이외도 수많은 건설 계획을 주도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2012 여수 엑스포 유치위원장같이 직접적으로 활동한 것 외에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일반인들은 특정 개발계획이나 건축물 설립에 있어서 직접 건축한 건축가나 결정한 행정가들, 그리고 당시 대통령의 이름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은 김중업 작품, 올림픽 주경기장은 김수근 작품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시를 건설하는 등의 각 인프라를 건설할 때는 보통 5단계를 거쳐서 실행됩니다.

첫 번째가 기본구상(Schematics)입니다. 흔히 컨셉(concept)을 잡는 단계이며, 개략적으로 어떤 도시를 어떤 인프라로 만들 것인지 계획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설계(Design development)입니다. 개략적인 구상을 구체화하여 설계도를 그립니다. 그 개발계획의 마스터 플랜(master plan)을 제시하는 단계로 기본이 되는 계획 과 설계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실시 설계(Working drawing / Construction document)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공사에 필요한 도면을 만드는 단계입니다.

넷째는 건설 및 감리(Construction and supervision) 단계입니다. 건설을 진행하고 그 현장을 감리하는 일이죠.

다섯째는 운영관리(Management) 단계입니다.

나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인 정책 계획을 세우는 일을 하면서 개략적인 설계도까지 만드는 일을 주로 해 왔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설계를 한 건설 계획을 내가 실제로 시행하며 경제적 이득을 보는 것은, 나의 도덕적 가치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몇몇 예외적인 일은 있었습니다. 서울지하철 2.3.9호선을 내가 설계했습니다. 지하철 1호선은 기존 경부선의 서울역과 기존 중앙선의 청량리역을 지하로 단순히 이은 노선을 명명한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지하철 개념의 1호는 현재의 2호선입니다. 그 당시는 지하철 역사(驛舍) 등에 대한 기준과 건설 선례가 없어서, 내가 당시 서울시장의 요청을 받아 내 회사에서 시범적으로 설계한 적이 있습니다.

한 가지 에피소드로는, 서울시장실에서 구 시장과 둘이 마주 앉아 지하철 노선 구상안을 놓고 얘기를 하는데, 제가 설계한 2호선 둥근 노선의 계획안을 보고 구 시장이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아니, 노선이 시작이 있고 종착점이 있어야지 이렇게 빙글빙글 돌면 어떻게 하지요?’ ‘선진국 다른 나라의 도시도 그렇게 한 예가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Metro 도시 지하철이 완전히 순환선은 아니지만 비슷한 선형입니다. 구 시장님이 세계 최초로 만드는 역사입니다.’라고 저는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울지하철 2호선이 둥근 순환형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한강을 중심에 놓고 둥그렇게 계획한 서울지하철 2호선 노선도
▲한강을 중심에 놓고 둥그렇게 계획한 서울지하철 2호선 노선도

지하철 역사 시범 설계 과정에서는 무엇보다 이용자들의 편리와 안전 그리고 관리의 용이성을 생각하였습니다. 디테일을 중요시하였죠.

사람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계단 경사도를 약 30도 정도로 기존 1호선의 계단보다 낮췄습니다.

그리고 계단과 벽 사이에 두 손가락이 들어갈 만큼 3~4cm 정도 간격을 두어 청소하기 쉽고, 비가 올 때 물이 잘 빠지도록 설계하였습니다.

기존의 계단은 모두 판석이었는데 자주 부서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단을 모두 가로 : 세로를 2대1 비율로 화강석 통석으로 깎아서 만들었습니다. 계단 끝부분은 뾰족하지 않게 갈아 놓았죠.

또 장애인을 고려한 에스컬레이 터 시설도 계획하였습니다.

이외에도, 파리 지하철의 개찰구 형식을 벤치마킹하였고, 미국 보스턴의 지하철을 보고 참고하여 지하철 노선에 녹색, 빨간색, 파란색 등 호선별 로 고유의 색깔도 지정하였습니다.

모두가 쉽게 기억할 수 있고 편하게 구분이 가도록 색깔로 지정한 것이죠. 지금처럼, 서울지하철 2호선은 녹색으로, 3호선은 주황색으로 표시한 것은 그때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서울 여의도의 63빌딩과 L.G의 쌍둥이 빌딩, 잠실의 롯데 빌딩 같은 경우 소유주인 재벌 회장들의 요청으로 설계 단계에 참여했습니다. ‘쌍둥이 빌딩’은 그 이름 을 내가 직접 작명(作名)까지 했습니다만, 실제 공사 설계는 SOM, Skidmore, Owings & Merrill 같은 세계적인 설계회사들을 소개해 줬습니다.

내가 계획한 프로젝트에 건설 작업에 직접 참여하면서 시간을 뺏기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많은 양의 일을 할 수 있었고, 다양한 건설에 대한 정책적 신념을 실행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개발 계획이나 건축물은 설계자와 실제 제작자, 관련 공무원뿐만 아니라 직접 일한 인부 한 사람까지 같이 만들어 내는 소위 종합예술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는 직접 시공한 회사나 개인의 이름을 얘기 하면서 그 사람들이 주요하게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풍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지난 50~60년 동안 ①최저개발국(least developed country)에서 시작해서 ②후진국(underdeveloped country) ③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y) ④개발국(developed country)을 거쳐, 지금은 최종 단계인 ⑤ 최고선진국(most developed country)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2022년 11월, 미국의 권위있는 매체 U.S뉴스& 리포트 (US News & World Report)는 대한민국의 국력을 세계 6위로 평가하기도 했죠.

세계는 이러한 대한민국의 빠르고 눈부신 발전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기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그 시대 대한민국 국민이 휴일없이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빨리빨리’ 열심히 역할을 한 것이 모인 결과입니다.

또 하나, 활성 축·녹지 축과 글로벌 이벤트 다섯 거점 선정 등 국가 발전 청사진 M.V.I.P(Master Vision and Implementation Plan)이 미리 준비되어 있어 가능했다 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이렇게 국민의 피와 땀(Perspiration)과 청사진(Inspiration)이 상호 복합 작용한 결과입니다. 결코 어느 한 대통령이나 정권의 업적이 아닙니다.

오늘날 국력 세계 6위의 한강의 기적은 바로 온전히 대한민국 국민의 노고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50년간 미래와 나라, 세계를 보며 기회를 운명으로 개척해 왔다고 홍용락 고문과 대담하고 있는 곽영훈 박사ⓒSR타임스
▲50년간 미래와 나라, 세계를 보며 기회를 운명으로 개척해 왔다고 홍용락 고문과 대담하고 있는 곽영훈 박사ⓒSR타임스

Q. 곽 박사님의 국가적인 이벤트 설계 작품인 두 번의 올림픽(1988 서울 올림픽. 2018 평창 동계올림픽)과 두 번의 엑스포(1993 대전 엑스포, 2012 여수 엑스포)를 짚어보면서 주변적인 것을 정리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1988 서울 올림픽 개최 제안을 어떻게 하게 된 것인가요?

== 앞에서 이미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1964년 도쿄 올림픽을 TV로 시청하면서 느낀 점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내가 귀국하면 한국에서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내가 건축 등의 올림픽 인프라 설계에 정책적으로 관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970년대 초에 귀국해서 올림픽 개최의 필요성을 당시의 대한적십자사 최두선 총재와 서영훈 사무총장 등에게 강력하게 피력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올림픽을 개최해야 한다는 저의 주장은 좀처럼 주위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오죽하면 “서울올림픽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나라를 망치게 하려는 역적이다.”라는 말까지 당시 국무 회의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정치권에서는 올림픽 개최가 유신 정권과 군사정권을 연장하기 위한 기만정책이라고 해서 또 반대가 심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막 고도성장을 시작한 나라가 올림픽에 돈을 탕진하면 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컸었죠.

그런 세월을 겪다가 1981년 당시 정부와 재계, 국민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서울이 24회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었습니다.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나의 회사인 '사람과 환경그룹' 이 올림픽 공원의 조경·토목 분야 실시설계를 맡고 현장 감리를 수행하였습니다.

당시 잠실 78만 9천 평의 체비지에 몇 개의 경기장과 선수촌‧기자촌을 모아 지으면 이동 문제와 올림픽 후에 주택문제를 일시에 해결하여 일석이조(一石二鳥) 가치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체육 중·고등·대학교를 세우면 시설이 낭비되지 않고 오랫동안 활용될 수 있다는 점도 제시했고요. 한강과 몽촌토성, 남한산성과 성내천변을 체육과 휴양의 제대로 만들면 아름다운 대한민국의 자연을 소개하는 데에도 좋은 소재가 될 것이라고 당시 주무장관인 노태우 내무부 장관에게 얘기했습니다.

 

Q. 당시에 20여 년 전부터 희망해 오던 올림픽이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것에 많은 감격이 있었겠습니다. 거기에, 올림픽 공원 조성의 설계까지 직접 맡았으니 매우 뜻깊었겠습니다. 문제는 없었나요?

== 국가 이벤트 개발에 문제는 항상 있었죠. 첫 번째가 몽촌토성을 없애자는 것이었어요. 그 자리에 경기시설이나 TV 중계 타워를 세우자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10만 평 정도의 백제시대 유적지가 단순한 흙더미 취급을 받아 없애자는 것이었죠.

당시는 흔히 말하는 개발독재(?) 시대이기 때문에, 국가가 필요하면 뭐든지 양보해야 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 아닙니까?

하지만, 나는 여러 가지 예를 들어가며 ‘국가 행사도 국가가 발전하기 위한 것이다. 과거를 보존 못하고 발전한 모습은 후대에 큰 본이 안된다’고 설득을 거듭한 끝에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몽촌토성을 그대로 살린 국립경기장 최초 스케치(1976)와 활용 구상도(1981)
▲ⓒ몽촌토성을 그대로 살린 국립경기장 최초 스케치(1976)와 활용 구상도(1981)

또 다른 문제는 소위 신군부 집권 후에 국내정세가 극도로 혼란스러웠습니다. 급기야 서울 올림픽에 불참하겠다는 외국 선수가 많아졌고 IOC(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는 한국의 혼란스러운 국내정세를 언급하며 올림픽 불가(不可) 경고까 지 나왔습니다.

 

Q. 그때 그랬군요. 그러나 올림픽은 개최되고, 회장님도 올림픽 공원 조성과 이어지는 한반도 중심 프로젝트인 한강 개발 계획과 서울 및 수도권 프로젝트를 계속할 수 있지 않았나요?

== 그 당시에 올림픽이 정상적으로 개최되기 위해서는 국내정세가 안정되어야 했습니다. 먼저 신군부에 반대하는 민주화 시위를 진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평민당 김대중 총재를 찾아뵙고, 올림픽이 우리의 경제성장은 물론이고, 신군부가 좀 더 민주화 추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김대중 총재는 국가적인 관점에서 깊은 생각을 하다가 내 의견에 동의해 줬습니다.

또 하나는, 이번 기회에 이념과 인종, 종교를 둘러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서울 올림픽 성공과 세계 평화를 위해 활동하는 기구가 필요한 시기라고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WCO(World Citizens Organization. 세계시민 기구)가 그때 탄생하고, 산하에 서울 올림픽 평화위원회(Seoul Assembly of Olympeace. SAO)를 만들어 함석헌 선생, 윤보선 전 대통령, 한경직 목사, 김옥길 전 문교부 장관, 서영훈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 윤석중, 이강훈, 강영훈, 문태갑, 구상, 이태영, 김성진, 설창수, 이홍구, 이한빈, 남덕우, 이윤구, 민관식, 전숙희, 손인실, 정근모, 구자경, 최종현 님 등을 모시고 ‘서울올림픽 평화대회 추진 위원회’ 활동을 내가 부위원장으로 하게 된 것입니다.

 

Q. 위원회 면면을 보면 우리 사회정신 지도자들 대부분이 같이 활동했는데, 실제로 어떤 활동을 했으며, 결과는 어땠나요?

== 전 세계에 올림피스(Olympeace) 정신을 알리기 위해서 ’평화 올림픽을 위한 우리의 염원 (Our Appeal for Olympeace)이라는 호소문을 만들어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해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에게 보내고 서명하게 했습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 영국 총리, 서독의 슈미트 수상 등을 비롯한 세계 각국 지도자와 극작가 아서 밀러, 테레사 수녀, 투투 주교 등 세계 종교 사회 지도자들에게도 서명을 받아냈습니다. 결과적으로 서울 올림픽은 거의 모든 국가가 참여해서 성공리에 끝마치지 않습니까?

▲ⓒ평화호소문과 서명한 지도자들
▲ⓒ평화호소문과 서명한 지도자들

호소문을 보낸 분 중에는 그 당시 수교가 안 된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에게도 유럽 출신 대사에게 부탁해서 두 번 호소문을 보냈습니다. 그 당시 북한은 안 오지만 공산권 국가들의 참여가 절실한 시기 아니었습니까?

고르바초프 서기장에게는 ‘건축가인 내가 당신을 환영하기 위해 올림픽에 오면 머물 수 있게 남산 자락에 ‘평화원(Olympeace House)’을 짓고, 출입할 별도의 도로도 당시 서울시장에게 개설했다 하며 소련의 참가를 부탁했습니다.

소련 고르바초프는 서울 올림픽 때 오지 않았지 만, 소련이 참가함으로써 동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 공산국가들이 서울 올림픽에 대거 참가했습니다.

그 후 1994년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세계 평화 지도자 회담’에 참여해서 고르바초프를 별도로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고르바초프가 편지 잘 읽었다고 하면서, 당시 북한의 김일성이 1988 서울올림픽의 참가를 같이 보이콧 하자고 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지만, 당시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소신으로 주장하는 사람으로서 거절했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나의 편지가 김일성에 대한 거절에 조금은 영향이 있었다는 뜻을 전하는 것 같았습니다.

 

Q. 1988 서울 올림픽 개최가 곽 박사님이 20대부터 구상한 대한민국 국토개발계획 ‘활성 축’의 수도권 핵심 인프라 구축의 계기가 되었지만, 한강을 중심으로 한 개발 계획은 그 전부터 진행되었다면서요?

== 1977년 6월에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한강 종합개발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제 계획은 첫째, 한강에 댐을 지어 호반 도시로 지어 강 양쪽을 균형 있게 발전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덧붙여, 한강 양안(兩岸)을 시민의 여가 활동 공간으로 제공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둘째, 한강은 서울의 남쪽 경계부가 아니라 서울의 중심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한강 양안의 부지에 업무, 상업, 문화, 체육 기능을 배치하는 구상입니다.

그 때는 서울 이 강북의 사대문 안 위주의 도시였기 때문이죠. ‘강남’은 허허벌판에 가까웠습니다.

셋째, 서울의 녹지체계는 동서로 흐르는 한강의 녹지 축과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북한산, 남산, 용산, 국립묘지, 관악산으로 이어지는 녹지 축을 골격으로 하자는 구상이었습니다.

또한 탄천, 수색 천, 중랑천, 청계천, 안양천 등의 지류를 한강에 연결해 보행자 전용도로의 맥을 살리자는 제안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강의 홍수 범람을 막기 위하여 충주댐 건설도 제안하여 건설되었습니다.이런 제안에 대해, 물론 계속 갑론을박의 논의가 계속되었죠.

저는 장충동에 있는 개인 사무실에 두 쪽 벽과 천정까지 덮는 1/5,000 한강 종합계획 도면을 붙여 놓고 계속 연구하며 언젠가는 이루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꿈을 이룰 수 있었던 요인은 1988 서울올림픽 때문이었습니다. 인천국제공항이 없던 시절, 서울올림픽공원의 위치가 송파구에 있고, 김포국제공항이 강서구에 멀리 떨어져 있어 외국 관람객들이 다니려면 당시 좁은 흑석동 뒷길 등을 이용해야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저는, 김재익 경제수석에게 외국인들이 강서구의 김포국제공항에서 송파구의 올림픽 경기장에 갈 수 있는 길의 어려움을 얘기하며, 올림픽 도로를 건설하기를 제안했습니다.

 

Q. 수도 서울이 1988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정비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군요. 곽 박사님께서는 그 전에 서울 도심 정비를 위해 ‘대학로’를 설계했다고 들었습니다?

== 현재의 대학로에 1970년대에 정부에서는 아파트를 짓기 위해 공사를 막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 자리는 원래 서울대학교 본부, 문리과대학, 법과대학, 미술대학, 의과대학 등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1975년, 정부는 의과대학을 제외한 모든 기관을 관악구 신 림동으로 이전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정부의 계획은 그 자리에 대규모 주택과 아파트 촌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당시 서울시의 구자춘(具滋春) 시장에게 연락해서 대학로를 공연과 예술의 메카로 만들 것을 건의했습니다.

내가 서울 도심 개발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는 의견이 맘에 들었는지, 구 시장은 공사를 중지하고 내 설계에 동참해 줬습니다.

그때부터 전체적인 컨셉과 공간 배치를 건물 건축설계를 하는 김수근 선배와 호흡을 맞추면서 내가 계획하는 대로 진행되었습니다.

대학로 설계 컨셉의 특징적인 것은 건물 가운데 큰 구멍을 뚫어 주변 경관을 가리지 않는 건축기법으로 설계하는 것입니다.

이 기법은 그 후에 내가 직, 간접으로 설계에 참여한 예술의 전당, 용산 국립박물관, 광화문 세종 문화회관에도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진행 과정에서 내가 원래 설계를 계획했던 학술원과 예술원이 들어오지 못해 지금도 안타깝습니다.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도시설계도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도시설계도

Q. 이 시기를 조금 지난 2001년에 개항한 인천국제공항도 크게 보면 곽 박사님의 확장된 수도권 개발 계획 영역 아닌가요?

== 그럴 수도 있죠. 당시에 김포국제공항이 있는데, 또 다른 국제공항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나라 수도권에 국제공항 하나를 더 만든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중국의 북경과 일본의 동경 사이에서 중심이 되는 중경(中京), 즉 동북아시아의 허브(Hub) 공항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하여 인천국제공항을 계획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허브(Hub) 라는 개념이 ‘중심적’이란 말인데, 사람들은 ‘허브(Hub)가 무슨 뜻이야?’라고 반문 할 때였습니다.

김포공항만으로는 동북아 중심 공항으로 역할을 못할 것으로 미리 생각했었습니다.

 

Q. 이것도 먼저 제안하셨나요?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까?

== 항상 그렇듯이 문제점을 들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북한과 가깝다, 안개가 많이 낀다, 조수간만(潮水干滿) 차이가 많다, 철새 이동기에 항공 참사가 우려된다, 서해안 생태계가 우려된다’ 등등 이견(異見)이 많았습니다.

예산도 빠듯했습니다. 특히 신설 고속도로 건설 비용은 마련하기가 쉽지 않아, 주요 기업들이 컨소시엄을 결성해서 인프라 건설 후 일정 기간 운영수익을 건설비용으로 확보한 후에 정부에 인프라를 넘기는 소위 BOT(Build-Operate-Transfer) 방식으로 설계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인천공항 고속도로 요금소 징수(徵收)비용 문제가 언론에 회자되는 이유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Q. 인천공항 건설이 업계에서는 '단군 이래 최대의 건설 작업이다' 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곽 박사님은 인천공항 건설 작업에서 어느 부분에 참여하셨나요?

== 나는 정책 제안과 마스터 플랜 단계까지 직, 간접 참여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내가 제안한 정책에서 파생되는 사업에는 웬만해서는 참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국가 발전 정책구상으로 제안해서 파생되는 설계 등 작업에는 제안 의도의 순수성이 훼손될까 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또, '설계라는 일감을 받기 위하여 정책 제안을 한다' 라는 오해를 주기 싫었던 것이지요.

▲ⓒ서울·인천은 동북아시아의 중경(中京)
▲ⓒ서울·인천은 동북아시아의 중경(中京)

Q. 그럴 경우 금전적인 이득이 많지 않을 수 있지 않습니까?

== 나도 여느 사람처럼 돈이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돈보다 더 지키고 살아야 할 명분이 나한테는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세상 하직했을 때 돈 등의 문제로 사람들한테 손가락질당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덧붙여서, 기왕에 세상을 사는 동안 언제나 나라를 위해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요즈음 젊은 분들은 고리타분한 생각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고 살아가는 인생살이입니다. 부모님 말씀이 맞으니까 지키고 살고 싶습니다.

 

Q. 이외에 청계천 복원과 서울시 버스 중앙차선제도 곽 회장님이 제안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 내가 국토 건설 계획에 대해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직접 관련 있는 대통령을 만나서 일한 분이 여덟 분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청계천 복원 문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현대건설 사장을 하다가 정치인으로 변신해 종로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때 내가 미국 보스턴을 관통하던 고가도로 ‘Route 95’를 철거하고 지하도를 건설한 ‘빅 딕(Big Dig)’ 프로젝트를 참고해 청계천을 살릴 것을 권유했습니다.

이명박 의원은 서울시장에 당선된 후 즉각 청계천 복원 사업에 착수했습니다.

청계천 복원 사업을 마친 이명박 서울시장은 관사에서 개최했던 한 모임에서 ‘곽영훈 박사가 아이디어를 주고 제안한 것을 나는 단지 실행만 시켰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울의 산맥‧강맥‧문맥의 제모습 찾기의 일환으로 청계천 살리기를 제안했는데, 저의 이러한 의지와 노력이 부분적으로나마 결과를 얻어 참 좋았습니다.

서울시 버스 중앙차선 제도인 버스전용차로를 만드는 것도 브라질 쿠리치바시(Th)의 잘 된 버스전용차로 제도를 벤치마킹한 것을 당시 이명박 서울 시장께 건의해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평소 가지고 있는 도시계획에 대한 생각을 쿠리치바에서 본 것이죠.

도로 중앙의 버스전용차로, 승하차 시간을 단축하는 원통형 정류장, 승객을 대규모로 수송할 수 있는 굴절 버스, 지하철이나 경전철을 대신하는 ‘땅 위의 지하철’로 불리는 세계 최초의 간선급행버스(BRT, Bus Rapid Transit) 시스템 등도 인상 깊게 보고 와서 버스전용차로를 제안한 것이죠.

 

Q. 수도권을 떠나서, 곽 회장님이 설계한 우리나라 ‘활성 축’의 또 다른 중부지역 활성 축의 설계를 위해 1993년 대전 엑스포 유치 제안과 엑스포의 마스터 플랜을 수립하셨지요?

==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후에 청와대 김재익 경제수석에게 우리나라에서 엑스포를 유치해 보자고 건의했습니다.

순조롭게 진행되다 김재익 수석이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사망 후 유야무야되는 듯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대회를 성공한 노태우 정권에 의해 새롭게 추진되어 1990년 국제박람회기구 총회에서 대전이 엑스포 개최지로 확정되었습니다.

나는 엑스포 주제부터 대회장 마스터 플랜까지 설계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대전 엑스포 주제는 ‘새로운 도약의 길’ 부제는 ‘전통 기술과 현대 과학의 조화’와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재활용’이었습니다.

나는 대회장 설계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대회장을 둥그런 방사형을 만들어 세계(World), 인간(Humanity), 환경(Environment) and 미래(Future) 4단지(cluster)로 건축물(pavilion)을 배치하고 관람객이 모든 시설에 쉽게 접근할수록 만들었습니다.

즉,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이 편리하게 하고 주인공도 되게 한 것이죠.

대전 엑스포 때 요즈음 많이 사용하는 ‘도우미’라는 말도 제가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1972년 뮌헨 올림픽 행사 진행 요원인 ‘캠페니언(companion)’ 들의 의상과 동작의 통일성을 인상 깊게 봤습니다. 대전 엑스포 때 이들을 선발해서 명칭도 ‘도우미(道友美)’로 정했습니다.

‘남을 돕는 이’라는 뜻의 ’도움이‘의 소리 나는 대로의 연음(連音)표기이기 도 했지만 ’길을 찾아 주는 아름다운 친구‘라는 뜻도 담아 엑스포 주제에 맞춰 고안한 것이었습니다.

▲ⓒ1993 대전엑스포 대회장 마스터플랜
▲ⓒ1993 대전엑스포 대회장 마스터플랜

Q. 1993년 대전 엑스포가 성공한 것은 사실 곽 박사님께서 이전에 대전을 과학기술 집약 단지로 미리 사전 설정한 기여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무슨 얘기인가요?

== 내가 우리나라 발전을 위해서 엑스포 유치를 유학 시절부터 꿈꿔 오지 않았습니까?

특히, 대전을 과학 발전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는 계기 가 있었습니다.

과학자이자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이상희 의원이 나한테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미래에 관해 물어왔습니다.

나는 그동안 내가 그려 왔던 테크노밸리(Techno-Vally), 테크노포트(Techno-port) 등의 과학기술도시 개념과 전국 과학기술 지대망(網)(Techno -network) 계획을 설명하며, 기회가 닿으면 실행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다음 해 그분이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가면서, 대전, 대구, 광주를 중심으로 과학기술 지대 망을 확장해 나가는 실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교통이 편리한 대전 중심이 되어, 내가 미리 조언해 두어 확보된 대덕 부지에 KAIST(한국과학기술원) 등의 과학 연구 단지가 자리 잡게 되면서 더욱 활성화되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상희 장관의 형님인 이진희 문화공보부 장관에게는 문화예술을 위하여 1983년, 서초동에 ‘예술의 전당’ 건설을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19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세종문화회관을 제외하고는 서울에 마땅한 문화공간이 없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1983년 이진희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예술의 전당 건립을 건의했었습니다.

서울의 타워호텔에서의 만남에서 이 장관은 예술의 전당을 건설할 장소로 남산 언저리 국립극장 근처 등 강북을 원했으나, 저는 강북보다는 서울의 균형발전을 위하여 강남 우면산에 위치할 것을 제안했었고 그대로 위치가 확정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공교롭게도 이상희, 이진희 두 분 형제와 함께 우리나라 과학기술과 문화예술과 분야에서 역할을 한 셈입니다.

 

Q. 곽 박사님이 일찌감치 그어놓은 남한 지역의 활성화 지역 중 서울 중심의 수도권과 대전은 국토의 중앙이어서 납득이 되지만, 여수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뭔가요?

==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경제개발을 시작했던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발전 상황을 보면 서울‧수도권, 대전‧중부권, 그리고 부산‧동남권으로 치우쳐 이루어져 왔습니다.

반면에 호남지역은 상대적으로 산업화에서 소외되었죠. 국토계획이나 도시계획을 할 때 여러 가지 목표와 방법이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낙후된 지역(lagging region)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수를 중심으로 호남권 발전에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우선 저는 1977년에 한옥으로 여수시청사(廳舍)를 설계·건설하였고, 여천 신도시를 설계했으며, 1986년에는 여서·문수 지구 등을 설계했습니다.

우선 한옥 여수시청사에 대해 말씀드리면, 여수에서 엑스포 같은 글로벌 이벤트(Global Event)를 유치해야겠다는 꿈을 가지고 1977년 여수시청사 건물을 나무로 짓는 전통 한옥으로 설계해 주었습니다. MIT를 졸업한 제가 초현대식으로 설계할 줄 알았는데 왜 구태의연하게 한옥으로 짓느냐고 많은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저는 먼 훗날 이곳에 세계시민들이 방문할 때 개성 없이 국적 불명의 도시가 아니고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 양식으로 만든 시 청사와 신도시를 보여주자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산림녹화에 국가적으로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죠. 결국 당시 최규하 총리의 만류로 시청사는 콘크리트 건물로 변형됐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나무는 안된다며 광화문이나 한국 정신문화원 건물처럼 콘크리트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무가 귀하던 그 시절, 저는 한국조경공사 초대 상임고문으로 있었기 때문에 이해는 바로 했지만 참 아쉬웠습니다.

여수시청사는 현재 국내 몇 안 되는 한옥 청사로 남아있습니다.

여천 신도시 개발은 제가 홍익대학교 도시계획과 교수로 있으면서 국가균형발전과 여수‧광양지역의 발전을 위하여 수립한 프로젝트입니다.

1977년 여천시에서는 신도시 설계를 저에게 완전히 맡겼습니다.

당시 여수에는 비행장이 없었기 때문에 고건 전라남도지사와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며 여천 신도시의 입지 적정성을 검토하였습니다.

원래 제가 여천시를 설계할 때는 아파트 단지, 고층 건물 등은 없었고 주택단지라야 3~5층의 전원주택으로 지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설계도는 임의대로 변경되고 뜯어고쳐져서 원형이 몰라보게 바뀌었습니다.

이외에도, 2012 여수 엑스포 여수시 유치위원장직을 수행했습니다.

유치위원장직을 맡은 경위는 2005년, 류중구 ‘아름다운 여수 21 실천협의회’ 대표 등 시민단체 대표들과 여수시민이 여수와 아무 연고도 없는 저를 여수 엑스포 여수시 유치원장에 추대했습니다.

여수시민들이 유치위원장으로 추대하기 위하여 연판장을 돌리는 등 저에게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여수 시민들의 진심에 결국 유치위원장직을 수락하고 2005년 4월, 여수시 유치위원장에 취임했습니다.

이외에도 포항제철에서 새로운 제철소 부지를 물색할 때 광양을 강력하게 추천해서 광양제철소가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1986년경에 한국 정부의 차관 요청에 따라 컨테이너부두 건설을 위한 경제 타당성 분석 차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세계은행(World Bank) 책임자들이 내한했을 때, 낙후된 전라도 지역의 균형발전을 이유로 세계은행의 책임자를 설득하여 광양에 컨테이너 항구가 들어서게 하였습니다.

▲ⓒ4 벨트(Belts) 비전 플랜
▲ⓒ4 벨트(Belts) 비전 플랜

Q. 여수지역 활성 축 중심 지역과 함께 인접권의 광주와 목포의 개발 계획도 세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1983년 광주 무등산 도립공원 장기 종합개발 계획을 설계하면서 광주를 빛나는 도시로 만들려고 계획했습니다.

광주지역 발전을 위해서는 기존 광주 도심과 송정리, 상 무대 지역 등을 합쳐 좀 더 큰 그림으로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계획대로, 1987년 11월 송정리 등이 광주에 편입된 후 1988년, 저는 광주 도심+송정리+상무대+ 과학기술단지+문화예술단지들을 합쳐 광주 장기 종합발전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목포를 동북아시아 해상무역의 중심도시로 성장시키기 위해 전라남도 도청을 무안 옥암지구로 이전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제가 전남도청을 이전시키는 계획을 할 때, 목포‧ 무안이 전라남도의 중심이라고 하니까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목포 앞바다와 홍도, 신안군도, 진도, 흑산도, 거문도 등 수많은 섬도 전라남도입니다.전라남도는 3/4이 바다이고 1/4이 육지입니다.

바다와 육지를 함께 보면 목포권이 전라남도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국역(國域:국토(國土)+해역(海域))계획을 할 때면 늘 바다를 같이 보고 계획하였습니다.

국토계획이 아니라 반드시 ‘국역계획’이라고 하며 해양의 중요성을 강조했죠.

여수를 우리나라 ‘활성 축’의 꼭짓점으로 삼아 광주와 목포를 같은 지역권으로 발전 축을 삼은 것은, 이 지역들이 낙후된 정도가 크다는 것을 먼저 고려했습니다.

그래서 1986년 저는 여수‧광양 지역의 자원을 내륙과 해양 그리고 그 연결부분으로 크게 보고 4 Belts (공업, 휴양, 환경, 해양) 비전 플랜을 세웠습니다.

내륙은 광양만을 중심으로 한 환형의 산업벨트, 바다는 가막만을 중심으로 바다와 섬을 연결하는 휴양 벨트, 연결부분은 산업·휴양 벨트가 중첩되게 하면서 풍부한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여자만 환경 벨트와 남해 해양 벨트로 계획했습니다.

즉, 여수 반도는 여천시와 여수시를 축으로 광양만권을 산업 벨트로, 또 경도를 중심으로 다도해와 돌산을 여가 벨트로 묶는 개발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Q. 여수지역 개발을 할 때 다른 곳과 비교해 특별한 것이 있었나요?

== 여수시와 여천시 두 지역 사이에 있는 여서·문수 지구를 신도시로 개발하는 도시계획을 구상할 때 당시에 처음으로 여수시에서 ‘공영 개발’을 시행했었습니다.

국가 단위도 못하는 공영 개발을 지자체가 처음 시행하는 것은 당시 송재구 여수시장은 직(職) 을 내놓고 할 수밖에 없는 모험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신중하게 마스터 플랜을 짰습니다. 토목공사를 최소화하기 위해 지형지물을 훼손하지 않게 설계하고, 기존 주민들의 거주지는 그대로 유지하게 했습니다.

개발 후에 조성될 땅을 미리 매각해서 개발 비용을 충당해 결과적으로 여수시는 사업 후 400억의 이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여서·문서 지구 개발이 모범이 되어 전국에서 벤치마킹해서 신도시 개발은 공영개발 방식으로 하는 것이 표본처럼 되었습니다.

여수지역을 비롯한 광주, 목포 등의 주변 지역 설계는 50년을 함께 하는 아직도 진행할 ‘활성 축’ 지역입니다. 지금은 조금 더 완성한 후에 평가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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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서·문수지구 도시계획
▲ⓒ여서·문수지구 도시계획

 

(인터뷰 시 처음에는 곽 박사님은 꿈을 꾸는 몽상(夢想)가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너무나 진지하게 자기가 해 온 일을 설명한다. 귀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그 당시의 관련된 사람 이름뿐만 아니라, 사실관계에 대한 인과관계가 진지하게 들어보면 전.후.좌.우가 맞고 공감이 된다.

특히 50년 전에 계획한 것이, 지금에 와서는 차곡차곡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몽상이 아니라, 우리 생각으로는 미처 생각 못 한 것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이렇게 엄청난 양의 국토개발과 도시건설 분야에서 일을 한 사람을 우리는 왜 익숙하지 않지? 반문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두 가지일 것 같다.

첫째는 우리 사회에서 건설과 건축을 말할 때는 직접 건설하는 사람 또는 건설 기업만 관심이 있지, 개발 계획을 세운 사람에게는 직접적인 관심을 두지 않는 풍토 때문인 것 같다.

다른 하나는 이분은 순수하게 하는 일에 열정이 클 뿐이지, 그것을 본인의 저명(著名) 성과 경제적 이득으로 증폭시키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홍용락 논설고문
▲ⓒ홍용락 논설고문

인터뷰 후 집무실 이층으로 안내하며, 전시되어 있는 지금까지 수행한 국내외 건설에 대한 조감도, 마스터 플랜, 보고서, 언론 기사 등을 보여주었다.

이미 이루어진 과거 프로젝트,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 앞으로 수행할 미래 프로젝트가 무수히(?) 전시되어 있다.

이분의 관심은 이제는 대한민국 땅은 넘어서는 것 같다.

현실적으로 실행이 여의찮은 DMZ(비무장지대) 평화 시, UNDP(국제연합개발계획)에서 공동으로 추진하는 두만강 국제연합 도시와 백두산 관광종합계획 같은 앞세대를 내다보며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열중하고 있다.

곽영훈 박사님의 몽상(夢想)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 것 같다.

이집트 시나이반도 신도시, 매사추세츠주 Fall River City, 알제리 테마도시 건설 계획, 네팔 룸비니(Lumbini) 세계평화 시(市) 등등의 세계 국토 및 도시 건설에 목표가 맞춰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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