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트-하트 재단의 장애인 문화복지 모델이 사회복지기관의 변화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변화까지 앞당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오지철 회장 ⓒSR타임스
▲ 하트-하트 재단의 장애인 문화복지 모델이 사회복지기관의 변화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변화까지 앞당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오지철 회장 ⓒSR타임스

◆ 홍용락 고문이 만난 '시대를 바꾸는 사람들' [25] 정부·언론·학계·시민단체에서 불가사의한 리더십 발휘한 '하트-하트 재단' 오지철 회장

‘시대를 바꾼 사람들’ 인터뷰 칼럼 대상자로 오지철(74) 회장을 추천받을 때는 이해를 못 한 점이 있었다.

 

추천하는 사람이 오 회장은 능력, 국가관, 시대 흐름을 읽는 감각이 출중하다고 추천했지만, 행정고시 출신으로 좋은 학벌과 인간관계로 공무원으로서 갈 수 있는 자리까지 간 사람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지철 회장님에 대해 자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분은 단순히 운이 좋은 분만이 아닐 것 같다고 느끼게 되었다.

 

물론 어려서부터 착실하게 공부를 해 온 것은 분명한 것 같았다.

 

지금도 서울대 법대에 간다는 것은 그 세대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수재들이라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하물며 그 세대에서는 더하면 더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분은 내가 추측한 대로 행정고시에 합격한 분이 아니었다. 우연히 공무원으로 전직해서 공무원들의 로망인 차관까지 올라갔었다.

 

이 하나만으로도 이 글을 읽는 많은 공무원 출신은 오 회장님에 대해 인식을 분명히 새롭게 할 것 같다.

 

적어도 공무원 사회에서 이렇게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과 운이 좋아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아는 상식으로도 국장급까지는 어떻게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보직 차관까지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일 수 있다.

 

그 많은 행정고시 출신 속에서 차관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 첫 번째 불가사의(?)한 의문이었다.

 

두 번째 의문은 공무원과는 정서와 일의 분야가 분명히 다를 수 있는 TV조선 사장으로서 언론사 사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초대 사장으로서 방송계 출신 다른 종편 방송 대표들과 프로그램 제작 관리 능력에서 TV조선이 차이가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바꿔서 생각해 봅니다.

 

요즈음에도 공무원을 하다가 프로그램 제작 능력으로 자연스럽게 KBS 등 주요 방송사 사장을 할 수가 있겠는가?

 

특히, 재직한 방송사는 콘텐츠로 승부를 해야 하는 소위 종편 방송이며 사(私)기업(?) 아닌가? 방송 제작의 노하우에 버금가는 그 무엇(?)이 없으면 버텨낼 수 없는 자리였다.

 

그 외에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장을 역임했다. 물론 고위 관료와 언론사 사장을 해서 문화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분이기는 하다.

 

하지만 나름대로 최고의 전문적 지적(知的) 집단인 그 많은 교수 사이에서 어떤 능력과 자세와 인간적인 소양으로 해 낼 수 있었는지 또 다른 궁금 사항이었습니다. [편집자 주]

 

- 하트하트 재단서 정부, 언론계, 학계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콘텐츠로 사회 복지 기관의 방향성 보여줘  

- 1988년 서울 올림픽과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유치가 불가능한 상황서 대역전 전략으로 유치 이뤄낸 핵심 실무자 

- 나고야 세계 탁구 선수권서 남북단일팀 구성해 스포츠로 첫 남·북 교류 물꼬 튼  정부 실무책임자

- 1989 한민족 체전 개최 구소련과 동유럽 및 중국 등 일제강점기 이후 세계 각지 흩어진 동포 규합 통해 민족정기 고양

- 신문사 조선일보의 전통을 방송 콘텐츠로 바꿔서 새 종편 방송으로서 자리매김 한 초대 TV조선 방송사 대표

-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원장 역임...K문화콘텐츠를 예술 치료 분야로 응용해 이론을 실무 경쟁력으로 바꾼 분 

▲세계 자폐인의 날을 맞아 재단 발달장애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친선 대사 최수종 탤런트와 장애인 인식개선 캠페인을 하는 오 회장ⓒSR타임스
▲세계 자폐인의 날을 맞아 재단 발달장애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친선 대사 최수종 탤런트와 장애인 인식개선 캠페인을 하는 오 회장ⓒSR타임스

Q. 회장님 반갑습니다. 요즘 하트-하트 재단 회장으로서, 지금까지 사회 음지로 인식되어 온 사회복지 기관을 동등한 사회구성체로서 인식 전환을 시켜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얘기하는 것일까요?

== 사회복지기관을 NGO(비정부기관)와 NPO(비영리조직)로 부르기도 합니다.

엄격히 말하면 목적과 규정 등이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아직은 한국에서는 통상적으로 사회복지기관을 부르는 명칭입니다.

또 이 기관들이 추구하는 방향은 다양성이 더 커지는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층이 안고 있는 가난, 질병, 장애를 사회통합적인 측면에서 포용해서 다 같이 잘사는 복지국가를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사회복지기관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시기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 하나의 변곡점이 됩니다.

그 이유는 서울 올림픽 때 우리 사회는 자원봉사와 자원봉사자로서 조직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시민사회가 태동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시민사회의 기본은 구성원들이 서로서로 존중하는 풍토가 일반적입니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는 만원 지하철에서 아프리카 청년이 앉아 있으면, 그 옆자리는 아예 비어 있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목격했습니다.

하트-하트 재단도 이러한 분위기를 바꾸는 역할을 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이전의 우리 사회에서 일상화 되어있던 인종, 재산, 외모, 학력, 출신지, 장애와 비장애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줄여 주는데,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것이 재단 설립과 운영 취지였습니다. 

 

 Q. 말씀하신 점은 대다수 사회복지기관이 가지는 취지가 아닙니까? 이 취지를 살리기 위한 하트-하트 재단만이 갖는 특화되고 발전적인 방향성이 있었다면서요? 

== 그렇습니다. 하트-하트 재단은 지적장애와 자폐증 증상을 가지는 발달장애아들에게 음악 등의 활동을 통해 예술 복지를 이루는 것이 다른 복지 기관과 차별화되는 방향성입니다.

아시다시피 발달 장애아들은 초등학교 1학년에서 4학년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들이 가진 또 하나의 특성인 자폐(autism)는 타인과 비교해 사회성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이런 현상을 가진 발달 장애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트-하트 재단 설립자 신인숙 이사장은 발달장애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면서, 급기야 2006년에는 발달 장애아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연주단)를 창단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TV조선 대표 시절 자사 드라마 ‘최고의 결혼’ 시청률 증가에 도움이 된다는 제작진의 요청에 주저 없이 결혼식 주례역으로 카메오 출연한 오 회장ⓒSR타임스
▲TV조선 대표 시절 자사 드라마 ‘최고의 결혼’ 시청률 증가에 도움이 된다는 제작진의 요청에 주저 없이 결혼식 주례역으로 카메오 출연한 오 회장ⓒSR타임스

 

Q. 그렇군요. 궁금한 점은 지적 능력과 사회성이 결여된 아이들을 대상으로 정상적인 연주단 운영과 공연이 가능합니까?

==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소위 보여주기식이 그들만의 연주 행위 아닌가? 이렇게 편견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인숙 이사장께서는 각고의 노력과 집념으로 그런 단견을 불식시켰습니다.

우선 오케스트라(연주단)가 갖춰야 할 현악, 관악, 타악(打樂)으로 악기 편성을 제대로 했습니다.

그리고 재단에서 이 건물을 희사해서, 지상 4층은 사무실과 교육장으로 활용합니다.지하 3층은 아예 설계 단계부터 연습실과 공연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따가 보시겠습니다만 내부에 별도로 공연장의 규모가 예술의 전당의 한 단면과 비교될 정도의 규모와 시설입니다. 

시설이 이렇게 잘 갖춰져 있다는 것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수준 높은 연주단에 못지 않은 연주와 연습시설이기 때문에, 여기서 연습하는 발달 장애아들이 정상인과 같은 연주 능력을 갖춰간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단적인 예로 이 단원들은 주로 클래식 위주의 레퍼토리와 영화음악을 연주하는데, 이들이 한 곡을 연주하려면 보통 20분 동안 연주해야 합니다.

실제로 이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과 신체적 결함으로는 20분 동안 집중해서 연주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연습 때 한 곡을 천 번 이상씩 연습하면서 나 하나만의 연주가 아니라 같이 협동해야만 연주가 제대로 된다는 것을 인식시켰습니다.

이들에게 약간 부족한 주변과 같이 사는 사회성 훈련이 확실히 된 것이죠.

 

Q. 내부적으로는 그런 방향성을 가지고 있지만, 외부로부터 객관적인 평가는 어떻게 받고 있나요?

== 우리 재단에서는 교육을 바탕으로 다양한 국내 및 해외 공연도 계속되어 왔습니다.

2006년 창단 이후 지금까지 국·내외에 1,100회 정도 공연을 했습니다. 

최근에는 20대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 받아 공연 했을 뿐 아니라, 2018년 미국 워싱턴의 케네디 센터에서 관객과 함께 눈물과 환희를 이루는 공연이 있었습니다.

같은 해 미국 뉴욕 카네기 홀 공연, 또 2019년 일본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한일축제한마당 한국 대표로 공연했습니다.

이 외에도 캐나다, 미국 LA, 중국 공연도 가졌습니다. 국내외 공연을 통해 연주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2023년 4월에는 발달장애 개인 콩쿠르인 '하트-하트 음악 콩쿠르'를 창설해서 제1회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뤘고, 앞으로 이 대회를 국제 콩쿠르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입니다.

이와 같은 하트-하트 재단의 17년간 발달장애아들의 극복을 위한 음악 활동 노력한 결과, 2022년 한국의 노벨상이라는 호암상 사회봉사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하트-하트 재단 설립자인 신인숙 이사장은 물론 저까지 감격과 보람의 한순간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Q. 축하드립니다. 회장님이 발달 장애아들의 음악 활동을 위해 특별하게 중점을 두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 발달 장애아들의 음악 활동을 위한 시설 및 제도 등의 하드웨어는 이미 설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제가 합류했습니다.

하지만, 그냥 평범한 일반 아이들의 음악 활동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방향성을 꾸준히 유지해 나가는 것도,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어 일반적이지 않는 연주자들한테는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현상 유지도 어려운 형편에 차츰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더더욱 힘듭니다. 저는 저 자신이 같이한다는 사명감과 발전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동시에 가지고 같이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공동 연주에서 이제는 개인 연주 능력을 끌어올리는 데 중점을 둘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연주 능력뿐만 아니라 음악을 통한 교육 활동의 전반적인 부분이 한 단계 이상 업그레이드된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제가 그동안 가져왔던 국제적 안목을 활용해 국제 콩쿠르를 본격적으로 도입해서 세계적인 행사를 지향하고자 합니다. 

▲문화부 차관 시절 ‘모린다니’ 교황청 대사 환송 미사에 정부 대표로 참석해 화환 증정을 하는 오지철 회장ⓒSR타임스
▲문화부 차관 시절 ‘모린다니’ 교황청 대사 환송 미사에 정부 대표로 참석해 화환 증정을 하는 오지철 회장ⓒSR타임스

 

Q. 알겠습니다. 하트-하트 재단이 추구하는 음악 활동의 특화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고요. 이외 하트-하트 재단이 하는 주목할 만한 활동은 무엇이 있을까요?

== 우선 아프리카와 남아시아를 대상으로 ‘안(眼)보건 증진 사업’을 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와 같이 실행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 말라위 와 남아시아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등은 식수 및 화장실 위생 보건시설 등이 좋지 않아 백내장 발생 빈도가 높으며, 실명까지 연결된다고 합니다.

우리 재단은 ‘open your eyes(눈을 떠요)’로 캠페인을 명명하고 이들 지역에서 눈 보건 증진 사업을 주력하고 있습니다.

또, 필리핀의 섬 주민과 소수인종 들을 주요 대상으로 ‘모자(母子)보건 사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필리핀은 어린 산모들이 많고, 불필요하게 다산(多産)인 사회 풍조로 인해 산모와 어린 생명들에게 건강 보호가 절실한 곳입니다. 또, 기간적으로도 오랜 기간 이런 현상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보호가 필요하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기관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제가 해외를 자주 다녔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지구촌 모두가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가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트-하트 재단 같은 NGO 조직이 나서서 본인과 가족의 행복을 찾아 변화를 불러올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사업도 치중하고 있습니다.

 

Q. 재단에서 하는 사업과 그 의미를 들어 봤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이 재단에서 하는 사업인 발달장애 예술복지를 하나의 추구 이념(?)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언뜻 듭니다. 왜 그런 생각으로 일을 하십니까?

== 저도 이 일을 해 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발달장애 예술복지를 추구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반인이 아닌 장애인 그것도 발달 장애인을 대상으로 예술을 가지고 복지를 실행하는 것 자체가 모험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재단에서는 발달장애인 평생교육센터를 서초구와 강동구로부터 의뢰받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재단이 있는 송파구가 아닌 다른 지역의 구청에서 의뢰하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우리 재단은 발달장애인을 단순한 보호 차원이 아닌 음악, 미술, 서예 등의 확실한 콘텐츠를 배우고 기능 습득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중증 발달 장애인이라 할지라도 예술 콘텐츠를 실행해 보게 하는 노력과 지식 습득을 통해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발달장애 예술 복지를 통해 발달 장애인 본인과 가족 및 주변 사람들 모두가 행복감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이유가 있다면,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가 장애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개선을 자연스럽게 가져올 수 있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죠.

 

Q. 분위기를 바꿔 보겠습니다. 그동안 정부, 언론계, 학계 등에 몸담으면서 그 조직에서 리더로 활동할 수 있었던 리더 십(leadship)의 본질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 나는 거창하게 '이것이 나의 국가관이고 가치관의 철학입니다' 라고 얘기할 게 없습니다.

주변에서 대한체육회 국제과장으로서 서울올림픽 유치에 핵심 실무자 역할을 했다고 추켜세우기도 합니다.

또, 2002 월드컵축구유치(1996년)를 할 때 문화체육관광부 국제체육국장으로 실무책임자 역할을 한 것을 두고 내 역할을 크게 얘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외에 세 번의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경쟁 때는 문화부 차관으로서, 또 유치위원회 부위원장과 대통령 특보로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적 행사 유치사업이 한 개인의 능력만을 가지고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국내적으로도 관계가 될 만한 인력 구성원, 국가 재원 및 투자 능력 등이 총동원되는 국가 능력의 동력화(mobilization)가 이뤄지는 가운데 진행과 성사에 이를 수 있습니다.

나는 그 가운데 내가 맡은 역할에 주저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시도했을 뿐입니다.내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맡은 것에 대한 책임 의식이 남들보다 조금 강해서 주변에서 보는 분들이 내가 다 했다고 얘기들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서울 올림픽 유치 때는 이연택 당시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 행정조정관이 정부 측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거기에 외교부의 해외 공관과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재계와 조상호 대한 체육회 회장을 비롯한 체육계가 총동원된 유치단 활동이었습니다.

내가 그때 해야 하는 것은 윗선에서는 외교적인 접근이 중요하지만, 실제 투표하는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들의 투표 행위로 결정된다는 사실에 우선적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위원들의 신상 파악은 물론이고, 우군화(友軍化)하는 방향, 다양한 대안들을 계획하고 그 계획서(road map)를 실제로 접촉하는 분들에게 전해서 전략화하게 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대비가 있었기에 실제 투표 행위에서 우리측에 유리하게 되었다는 분석이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항상 느끼는 점이지만 국가적인 일이나, 사회에서 역할 및 개인적인 일을 할 때는 용기와 책임감을 가지고 하는 것이 근본이 아닌가하고 생각합니다.

▲2003년 문화부 차관으로 구세군 행사에 참석해 당시 서울시장 이명박 전 대통령과 함께한 오 회장ⓒSR타임스
▲2003년 문화부 차관으로 구세군 행사에 참석해 당시 서울시장 이명박 전 대통령과 함께한 오 회장ⓒSR타임스

 

Q. 제가 오면서 무척이나 궁금했던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회 각 분야에서 책임질 자리를 다 경험해 보신 것 같은데, 왜 정치 입문은 한 번도 관심이 없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 제가 정치하면 잘할 것으로 보이나요? (한참 빙긋이 웃으면서 생각한다)

나도 권유받은 적이 꽤 여러 번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저는 제가 한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살려고 했습니다.

문화부 차관 때 어쩔 수 없이 그만둬야 할 때도 구구한 변명 없이 제가 책임을 졌습니다.

그때도 가톨릭 신자인 나는 일요일마다 청계산 매바위로 새벽 등산을 하면서 “공직을 무사히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냈고, 특별하게 논란하지 않고 책임을 졌습니다.

차관으로 공직생활을 할 때,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주재한 장관회의에서 차관으로 대신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대통령이 유한킴벌리 문국현 사장이 근로자의 권리를 존중하여 3교대로 공장을 운영하는 사례를 들며 문화부의 박물관도 그렇게 전일제로 운영해 볼 것을 권유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타당한 이유를 들어 박물관은 현실적으로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강하게 진언했습니다. 장관을 대신해서 나간 차관이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은 행동입니다.

나는 평소 내가 생각해 온 것에 대해 주저 없이 용기를 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제가 정치를 해서 보람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노 대통령께서도 그 이후에 나를 불러서 자기가 하는 정치에 같이 동참하면 좋겠다는 얘기를 한 적도 있습니다.

세월이 가면서 정당에서 구체적으로 나의 아버지 고향인 경남의 한 지역에 공천을 주겠다고도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와 조상들의 고향이지 내가 태어난 곳이 아니라고 하니까, 서울 강남에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공천을 보장해 주겠다고 권유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더 생각되는 것이 체육청소년부 차관을 했고, 대학 선배인 고(故) 이해봉(李海鳳) 4선 국회의원이 생각났었습니다.

지난 2012년 돌아가시기 얼마 전 나한테 ‘정치는 해보니까 해서는 안 될 일을 할 수밖에 없고, 또 한 것 같다’고 한 말이 생각났었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정치풍토는 본인이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본인 뜻과 다르게 바뀌고 의미 없이 시류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저런 이유로 나는 이 나라 정치가 가야 할 길은 알고 있지만, 내가 정치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 듯합니다.  

 

Q. 앞에서 큰 틀에서 국가, 사회 개인의 변화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정부 조직, 언론사, 학계, 사회단체에서 중추적인 위치와 역할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한 것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이 관여한 부분 중 가장 중점을 뒀던 부분을 먼저 든다면요?

== 누구든지 살아오면서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할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죠.

특히 대한민국 현대 스포츠사(史)에서 기억될 커다란 국제스포츠 유치에 직접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88서울올림픽 유치에 관여가 되었습니다. 나는 유치 시작 초기부터 대한체육부에서 과장으로 역할을 했습니다.

88올림픽이 유치 되고 노태우 정부 때는 체육부가 만들어지면서 국제체육 국장으로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또 여러 국제 스포츠 행사 유치에 관여하게 됩니다.

물론 몇 번 말씀드리지만, 대한민국이 이렇게 굵직한 국제대회를 유치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와 재계(財界)가 모두 나섰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소위 민·관 및 기업이 총동원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노력에 저도 같이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올림픽 유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호실장을 지내다 1979년 대한체육회장을 지낸 박종규 회장의 아이디어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가 있으면서 추진계획이 잠시 잠복하게 되었죠.그 당시 88년 올림픽은 일본의 나고야가 유치하기로 거의 확정된 상황이었습니다.

대한체육회 과장이었던 나는 1979년부터 올림픽 유치를 위해 실무를 전담하다시피 맡아 했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대한민국은 올림픽을 유치하기에는 재정적으로 불안한 국력이라는 것이 많은 해외 국가들에게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대한 체육회에서 올림픽 유치를 위해 실무를 맡은 이후, 대한 체육회 회장들과 세계를 다니면서 올림픽유치를 위해 발 벗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 시대 일본으로부터 차관 60억 달러를 받아오는 상황인데, 일본의 나고야와 유치 경쟁을 한다고 하면 어느 쪽을 지지해 주겠습니까? 

심지어 우리 실무진 쪽에서도 88올림픽 유치가 힘들 수가 있다고 생각해서, 86 아시안 게임이라도 유치하려고 일본과의 협의를 위해 비공식적으로 특사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나고야 출신 '키요카와 마사지' IOC 부위원장이자 일본 올림픽 유치위원회 부위원장을 만나 타진 한 결과, 단칼(?)에 거절당하는 무시를 당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유치신청서는 1981년 2월에 접수했지만, 대통령의 재가가 8월 1일에 난 88서울 올림픽 유치 계획이 단 두 달 후인 9월 30일 ‘바덴바덴’에서 기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유치경쟁에서 일본은 국가가 나서지 않고 나고야(名古屋)와 아이치현(愛知県)을 중심으로 경쟁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얕잡아 본 결과라고 얘기도 합니다.

그것보다는 유치를 위한 우리의 총력 시도와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들에 대한 맞춤형 접근이 주효했다고 판단됩니다.

▲사회복지기관이 특화되고 변화할 수 있는 것은 기업, 정부, 개인들의 적극적인 관심이 우선이라는 오지철(사진 왼쪽) 회장ⓒSR타임스
▲사회복지기관이 특화되고 변화할 수 있는 것은 기업, 정부, 개인들의 적극적인 관심이 우선이라는 오지철(사진 왼쪽) 회장ⓒSR타임스

 

Q. 88년 서울 올림픽 유치를 위해 핵심 실무자로 역할을 하셨는데, 또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위해서도 노력하셨다면서요?

== 1993년 들어선 김영삼 정부에서 그 전부터 알고 지내던 정몽준 축구협회장이 회장 당선 후 인사를 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을 개최해 보자고 했습니다.

나도 동의는 하지만 아직 여건이 충분치 않아, 협력하자는 선에서 대담이 끝났습니다. 그 이후에 김영삼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내가 문체부로 소속이 새롭게 되어 타 부서 국장을 하고 있을 때, 김영삼 정권에서 월드컵 개최를 추진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1993년 3월 체육부가 문화체육부로 통합된 이후 두 번째로 국제체육 국장을 하면서 당시 김영수 장관을 모시고 월드컵 유치를 위해 FIFA(국제축구연맹) 집행위원들을 상대로 치밀하게 추진해서 확정된 것입니다.

정몽준 축구협회장의 집념 어린 추진력과 정부, 기업, 국민이 똘똘 뭉쳐서 만들어 낸 결과였지 않나 생각합니다.

전략적으로도 일본이 일본 축구협회와 한 광고업체를 앞세워 쉽게 접근했지만, 우리는 온 나라가  혼연일체가 된 것이 가장 큰 승리 요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88올림픽 유치 때와 같이 FIFA(국제축구연맹) 집행위원들을 상대로 개개인의 기호에 맞게 일대일 맞춤형 접근도 큰 효과를 또 발휘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Q. 한 세대 우리나라 국제 스포츠 대회 유치를 생각하려면 오 회장님을 빼놓을 수가 없군요. 그 외에 또 어떤 대회를 유치했습니까?

== 그 전에 일본이 도와주지 않던 86 아시안 게임 유치도, 이후에 내가 실무적으로 총괄하면서 유치에 기여했습니다.

또, 북한과 아홉 차례 접촉해서 포르투갈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 남북단일팀을 만들어 출전시킨 기억도 새롭습니다.

그 전에 나고야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남과 북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단일팀을 만들어,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같이 입장했습니다.

그 대회에서 한국의 현정화, 북한의 이분희 선수가 복식조로 맹활약을 한 것이 나중에 영화화 되기까지 했습니다.

체육부 시절을 생각하면 그래도 가장 기억 나는 것은 지금도 규모 등을 바꿔서 유지하고 있는 한민족 체전(1989년 첫 개최)을 만들었던 경험이 인상 깊습니다.

당시는 88서울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난 시점이었습니다. 서울 올림픽 성공을 통해 이뤄진 자부심을 가지고 시작된 나름대로 국가적 이벤트였습니다.

당시 북한 참여 없이 남한만의 올림픽을 치러 성공했습니다. 성공한 쾌거에 민족적 자부심이 한껏 들뜨기도 했었죠.

이런 민족정기를 드높이고 완전하게 이루기 위하여 구소련 영향권에 있었던 우즈베키스탄 및 동유럽 국가와 중국의 조선족들을 한국으로 초청하여 체육대회를 치르는 계획이었습니다.

내가 기획했지만, 국회 예산배정이 끝난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기획예산처 차관과 3선 국회의원을 지낸 당시 기재부 예산실 문화, 교육, 체육 담당 김광림 과장의 협조를 얻었습니다.

김광림 과장을 비롯한 관계 부처 공무원들과 제가 그 당시는 외교관계가 없었던 구소련의 심장부 모스크바로 날아가 체육부 국제국장  '코슬로프스키'를 만나 담판을 지었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 지역에 산재하여 있는 동포 200명을 KAL(대한항공) 전세기 협조를 받아 입국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후 한민족 체육대회를 매년 개최하게 되면서 올림픽 이후 동유럽 및 중국의 한민족들과 연결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국가와 사회 변화의 원동력에 대해 홍용락(사진 오른쪽) 고문과 대담하고 있는 오지철 회장ⓒSR타임스
▲국가와 사회 변화의 원동력에 대해 홍용락(사진 오른쪽) 고문과 대담하고 있는 오지철 회장ⓒSR타임스

 

Q. 체육부에서 이런 활동을 하다가 문화부 차관으로 간 것은 정무직 발령을 받아 간 것입니까?

== 아닙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정부 조직이 바뀌었습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체육부가 없어지고 문화체육관광부로 바뀌어 졌습니다.

당시 문화부는 아시다시피 할 일이 많았습니다. 체육과 관광뿐 아니라 방송과 신문, 출판 지원까지 했습니다.

제가 문화정책국장 재직 시에, 통상적인 행정업무도 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이, 당시의 라이샤워(Reischauer) 로마자 표기법을 현재의 로마자 표기법으로 바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주’의 표기법을 ‘라이샤워(Reischauer) 로마자 표기법 ‘cheju’에 ‘jeju’로 바꿨다는 겁니다.

그 당시의 로마자 표기법은 영어 표기법과 혼동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표기법이었지만 실제적이고 편리함을 내세워 의지를 가지고 현재의 표기법으로 잘 해결한 것 같습니다.

또, 출판시장이 IMF(국제통화기금) 위기 때 개별 출판사가 열악한 자본력으로 인한 구조적인 문제로 도산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때에 문예진흥기금을 일회성 지원이 아니라 7년 거치 분할 상환 방식으로 출판사에 대여 형식지원을 했기 때문에 출판시장이 일시에 붕괴하지 않고 소생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그 당시는 SM엔터테인먼트 같은 대형 연예기획사와 엔씨 소프트 같은 게임업체가 막 태동하는 시기였습니다.

그 때는 음반 및 게임업체가 방송사 등 클라이언트(client : 의뢰자. ‘갑(甲)’)에 일방적으로 귀속 받는 저작권 문제가 심각했었습니다.

이 문제를 제가 여러 쪽 의견을 들어 제작사 쪽이 어느 정도 불리하지 않게 조율해 줌으로써, 이 업체들이 고속 성장하는 시대 조류를 잘 맞춰준 것 같습니다.

 

Q. 대담 중에 막연한 관리자로서 업무 변화를 추진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면서 항상 새롭게 시도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창의적인 능력은 원래부터 간직한 것인가요?

== 과찬입니다. 내가 원래 그렇게 출중한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봐주니까, 여러 가지 경험을 가지면서 국가나 조직의 일을 할 때 잘하려는 책임감을 가지고 새롭게 용기를 가지고 시작한 것이 그렇게 보이나 봅니다.

내가 문화부 근무가 끝나고 2007년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했습니다. 그 당시도 관광의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을 높인다는 구호는 많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경쟁을 높일 만한 제도적 정비가 국가적으로 잘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고이즈미 총리 때 ‘ 웰컴 투 저팬’을 국가 관광 진흥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며 비자 발급 문제를 간소화하는 등 일련의 국가 정책 사항으로 뒷받침했습니다.

나는 관광공사 사장을 하면서 관광경쟁력이 국가경쟁력을 높인다는 소신과 일본에서 시행되던 지역 관광 활성화를 유심히 보면서 우리도 지역 관광 진흥이 지역의 균형 발전을 가져온다는 소신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지역과 국가의 관광 발전은 국민과 지역주민이 얼마나 관광 친화적이냐? 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는 판단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앙과 지방의 공무원 조직과 협회 등을 통해 강연을 통해 국민과 주민들이 관심을 가지도록 하는 데 열중했습니다.

그래서 지방 군 단위나 지방의 작은 협회 요청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니면서 강연을 통해 관광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안내, 위생, 친절한 마음 전달 등을 강조했습니다. 

그 당시는 국가 간, 지역 간 관광 경쟁력을 논하기 전에 먼저 기존의 관광을 할 수 있는 볼거리 등의 인프라가 구비 되어 있어야 가능하다는 고정관념이 컸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보다 국가와 지역주민들의 관광 친화적인 자세와 행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했습니다.

나는 관광공사 재직 내내 국민과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이 고정관념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 과거에 한국에서 유럽으로 가면서 태국을 경유할 경우 태국 정부는 태국에서 일박을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선례도 얘기하면서 국가의 크고 작은 관광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제도도 새롭게 해야 한다고 주문했습니다. 

내가 그 조직에 몸담고 있을 때는 뭔가를 새롭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한테는 습관적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장 때도 저는 새로움에 도전한 기억이 있습니다. 나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단기 연수를 하면서 논문 준비를 해서 서울대학교에서 형법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에, 제가 단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있을 때 문화예술대학원장 직을 맡겨 주었습니다.

거기서 나는 예술 치료학과를 어렵게 학교와 협조해서 신설했습니다. 공직 생활이나 그 외에 경력으로 내가 문화와 관계는 있지만, 치료 분야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지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예술이 이제는 단지 감상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실제 우리의 생활에서 활용 되어야 한다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지금 내가 있는 하트-하트 재단의 일과 연결되는 접점이 된 것 같습니다.

 

▲ⓒ홍용락 논설고문
▲ⓒ홍용락 논설고문

(문화부 차관, TV조선 초대 대표이사, 단국대학교 문화예술 대학원장, 한국관광공사 사장. 이외에도 대통령 문화 특보,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부위원장 등... 열거할 수 없는 국가와 사회의 기관 및 단체의 책임자를 지내온 분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회복지기관 하트-하트 회장의 일에 가장 만족하고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인터뷰를 통해 오늘을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미래가 어떻게 될 수 있다는 것도 판단 할 수 있는 인생 자세를 보여 주는 분이다.

그리고 미래가 두렵지 않은 것은 희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분이라는 느낌도 들게된다.

숱한 국제 스포츠 대회 유치로 국가 경쟁력과 이미지 제고와 변화에 기여한 분이었다.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와 사회와 자신에 대한 책임지는 자세로부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또 무슨 일을 하든지 온 몸을 던졌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래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 같았다.)

저작권자 © SR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