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으로서 대한민국 의사고시 출신 1호 의사로서 사명감과 자긍심을 가지고 일한다는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인요한 소장ⓒSR타임스
▲외국인으로서 대한민국 의사고시 출신 1호 의사로서 사명감과 자긍심을 가지고 일한다는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인요한 소장ⓒSR타임스

◆ 홍용락 고문이 만난 '시대를 바꾸는 사람들' [21] “4대에 걸쳐 대한민국에 무한 봉사한 가문”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인요한 소장

인요한(64) 소장을 뵈러 갈 때 우선 궁금한 것은 이분의 정체(?)는 뭘까? 하는 호기심이 앞섰다.

 

우선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인이다. 그리고 한국 정치 현실에 대해서도 가끔 바른말로 ‘똑바로 들 하시오’하고 국민들 속을 시원하게 일갈(一喝)한다.

 

흔히들 말하는 국민들한테 호기심을 주는 외모와 언변으로, 외국인으로서 여론지도자(opinion leader) 중의 한 분인 것은 분명하다.

 

미국인 혈통인데도 한국말을 너무 유창하게 한다. 가끔 쓰는 전라도 사투리가 구수하기도 하다.

 

게다가 온 집안이 나서서 북한 주민 결핵 퇴치를 위해, UN기구 같은 거창한 국제기구도 하기 힘든 거대한 프로젝트를 몇십 년째 하고 있다고 한다.

 

인 소장 본인도 29번이나 북한을 다녀왔다. 인도적인 목적이 분명하지만, 또 다른 목적이 있을까? 궁금증이 더 하기만 했다.

 

현직이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의사인 것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연세대학교를 세운 언더우드 가문의 자손으로, 한국에서 선조의 유업을 이어받는 분일까?

 

그 같은 궁금증은 만나자마자 깨졌다. 만나자마자 “거시기 남의 족보를 그렇게 모르고 인터뷰해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타박을 하고, 집안 내력을 거침없이 설명해 준다.

 

외 증조부 유진벨은 1895년 미국 남 장로회 선교사로 입국해 먼저 입국한 북 장로회 언더우드 선교사와 선교지역 중복을 피해 호남 지방으로 내려가 선교활동과 교육사업을 벌였다.

 

조부 윌리엄 린튼은 유진벨 선교사의 딸과 결혼한 선교사로 3.1운동을 외국에 알렸으며, 신사참배을 거부해 추방당했다가 광복 후 귀국해 6.25 전쟁 이후 한남대학교 등을 세우며 선교와 교육사업을 했었다.

 

아버지 휴 린튼은 군산에서 태어나, 미국 해군 장교로 근무하면서 인천상륙작전에 직접 참전하고,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의 선교사업을 이어받으며, 부인과 결핵 퇴치 사업에 매진했다.

 

휴 린튼의 여섯째이자 막내아들인 존 린튼(한국명  인요한)은 낙후된 의료수송 수단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한 아버지 휴 린튼이 사망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후에 그는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하여 외삼촌과 함께 한국 119에 앰뷸런스 후송 교육을 하는 등 일찌감치 한국 의료계에 변화를 예고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형들과 한국 유진벨 재단 설립에 참여하여 북한 주민 결핵 퇴치 사업을 벌이면서 정치적 이념을 뛰어넘어 인술과 선교의 사명에 헌신하고 있다.

 

80년대 초 광주항쟁 때는 진압군의 검문소를 뚫고 사선을 넘어가서 외신기자 통역을 자원봉사 하며, 한국 역사의 현장에 동참도 했다.

 

이 집안의 4대가 조건 없는 한국 사랑을 베푸는 정신과, 그 공로로 한국에서 특별귀화 1호 한국인이 된 인요한 소장의 한국과 한국민들에 헌신과 행복에 대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편집자 주]

 

- 구한말 외세배격 운동, 일제하 독립운동, 자유수호 위해 6.25 참전한 선조를 둔 선교사 집안의 4대 후손

- 130년 가까이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교회, 학교, 병원설립으로 한국 사회 발전의 길라잡이를 한 린튼가(家)의 후손

- 서양 문화보다 한국문화가 신토불이 문화이고, 상대적으로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특별귀화 백인

- 영혼은 한국인이 분명하고, 고향도 전라도 출신 한국인임을 강조하며 신토불이 한국 정서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

- 선조들의 유업인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선교, 교육, 보건의료 봉사를 실천하고 행동하는 특별귀화 1호 한국 국적 취득

- 대한민국 의사고시에 합격한 외국인 1호 의사...한국형 앰뷸런스 만들어 119의 환자 수송교육 활성화

▲인 소장이 20대 때 아버지(휴 린튼)와 어머니. 두 분은 선교사업(한국에 20여 개 교회설립)과 당시 불치병인 ‘결핵 퇴치’ 의료봉사에 매진 했다.ⓒSR타임스
▲인 소장이 20대 때 아버지(휴 린튼)와 어머니. 두 분은 선교사업(한국에 20여 개 교회설립)과 당시 불치병인 ‘결핵 퇴치’ 의료봉사에 매진 했다.ⓒSR타임스

Q. 소장님은 쉬운 말로 한국 사람보다 한국이 더 좋다고 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 사회 어떤 면이 그렇게 좋으신가요?

== 나는 미국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서 한국교육을 받고 살아왔습니다.그래서 자연적으로 한국 사회의 어떤 점이 좋은지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지 않겠어요.

그것을 내가 좋다고 받아들이고 생활해 왔고요. 인류는 최근 50년 동안 급격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문명의 발달도 급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는 대한민국이 이 지구상의 어느 나라보다 더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그 변화가 발전적이고 바람직한 변화였습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어릴 때 비해서 얼마나 먹고살기가 좋아졌습니까? 경제적 측면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가치도 교육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지식수준도 높지 않습니까?지적 수준이 높은 것은, 사회생활도 편리해지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편리하고 정리된 사회변화에 비해 나는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온돌방 문화가 사라진 점은 참으로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사회적 네트워크가 발달하니까, 체계적 교육받을 기회가 높아져 지식은 많이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식을 남과 어울리며 살아가는 지혜로 접목하는 배움의 대책은 더 없어집니다.

전 시대 온돌방 아랫목에 구들을 끼고 앉아 노소가 어울리면서 사회생활에 대한 지혜와 도덕을 배우는 생활이 아쉽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내가 외국 사람이었기 때문에 막연히 감상적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지식으로 배우는 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스스로가 공감 못하는 지혜는 실제 활용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남과 또 다른 세대와 어울리면서 체험적으로 깨닫는 도덕심만이 자기한테 그 상황이 닥쳐왔을 때 내가 지켜야 할 도덕선(線)을 판단하고 거기에 맞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Q. 이전에도 사회지도층에 있는 분들이 많이 하는 얘기입니다만, 외국인이었다가 귀화한 소장님한테 들으니까 새롭게 생각됩니다. 이런 말씀을 서두에 꺼내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요?

== 한국 사회가 세계에서 가장 비약적인 발전을 한 국가입니다. 우선 경제적인 발전에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특히 성실하고 열심인 국민성 때문에 국가가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는 것은 두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 정치, 사회적인 면에서 혼란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가 국민들 수준을 못 따라온다고 하는 것은, 국민들이 생각하는 정도(正道)를 정치권에서 계속 어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사회구성원들도 그 정도(正道)가 무엇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사회구성원들의 가치 차이가 크기 때문에 같이 사는 사람들하고도 사회적 갈등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일 년에 소위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정원이 약 4만 명 정도 된다고 하죠. 이 가운데 4천명은 의대에 가고요. 또 서울대와 연대 의대에 갈 수 있는 인원은 약 400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이 세대에서 이렇게 지적 능력(I.Q)이 뛰어난 인물들의 많은 수가 남을 배려하는 능력과, 단체생활에서는 위, 아래를 조화시키는 감성지수(E.Q)가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식은 뛰어나지만, 지혜가 떨어지면 상대방과는 갈등이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거기에 도덕성까지 없으면 사회구성원끼리는 단절될 수밖에 없으며, 사회가 공감의 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이기적이고 무미건조한 사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2012년 대한민국 특별귀화 1호 인증증서를 받은 인요한 소장ⓒ방송화면 캡쳐
▲2012년 대한민국 특별귀화 1호 인증증서를 받은 인요한 소장ⓒ방송화면 캡쳐

Q. (공감합니다) 앞에서 잠깐 정치가 정도(正道)를 가지 못한다고 안타까움을 말씀했습니다. 소장님은 가끔 매스컴을 통해 정치 현실을 얘기하는 적도 있습니다. 혹시 기회가 되면 정치 일선에 나서서 한국 정치의 변화를 이끌어 볼 생각은 없는가요?

== 제가 세브란스병원 의사와 교수로서 정년이 1년 반 남았습니다.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계획은 아직 구체적으로 없습니다.

단지 주변 사람처럼 제가 순천 인 씨 1대니까, 고향으로 가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있습니다.

또, 박근혜 정부에서 동서 화합, 남북 관계, 다문화 문제 같은 내가 잘 알고 잘할 수 있는 부분은 일정 부분 정부에 기여했습니다.

그 정도가 정치라면 또 국가에서 필요하다면, 같은 시대를 사는 국민으로서 협조해서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 애국하는 자세 아닐까 생각합니다.

 

Q. 좀 더 구체적으로 현실정치에 입문하실 의향은 있는가요?

== 내가 할 수 있는 답변은 앞과 같습니다.

제가 잘 알고 할 수 있는 것을 제도권에서 해 달라고 하면, 정권의 정체성을 떠나 당연한 국민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순수한 마음으로 앞에서 말한 박근혜 정부 일을 했기 때문에 문재인 정권으로부터 가혹한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뭐, 공정거래위원회에 불려 다니면서 닦달당한 쓰라린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정치를 아무나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정치가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또, 직업 중에는 정치인, 배우, 목사가 제일 어려운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본인들이 아무리 잘해도 인기에 따라 능력이 인정되는 직업이니까요. 그래서 정치를 올바르게 하려면 힘이 많이 듭니다.

특히 올바른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는 때로는 여론에 역행해서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결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인기만을 위한 포플리즘 정치를 하면 국가와 민족을 망하게 하거나 해악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첫째, 나는 이런 분이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 하는 것과 둘째, 국민들도 정치하는 분들을 이렇게 봐줬으면 하는 부분 정도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Q. 먼저 소장님은 정치인 중에서 어떤 분이 정치해서 좋았다고 생각하는지요? 왜 그분이 좋았었나요?

== 나는 이승만 대통령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정치인 중 김대중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이렇게까지 일어나게 만든 초석을 닦은 분 아닙니까? “ ‘관(官)’을 앞세우지 않고. ‘일’을 앞세워 오늘날 우리 국민을 잘살게 해준 분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평화로운 정권 교체와 IMF(국제통화기금)를 극복한 대통령입니다.

그보다도 나는 그 분의 정치철학을 지금 정치인들도 배워야만 우리 정치가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운좋게 1994년 김대중 대통령을 대통령 되기 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분은 자기의 정치 철학이 ‘용서와 화해’라고 말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만델라 대통령이 30년 동안 자신을 감옥에 집어넣은 백인들을 정권을 잡은 후에 용서한 것 같이 자신도 그런 정치를 하겠다고 나한테 강조했습니다.

1998년 김 대통령 취임식 때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단상으로 불러 앉혔잖습니까? 김대중 대통령은 법은 집행하되, 보복은 끝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용서의 정치를 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때 나는 남아프리카 대통령이었던 만델라같이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상에 근접해 있다는 생각을 불현듯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에 김 대통령은 남북 화해와 평화의 길에 초석을 쌓았다고 노벨상을 받지 않았습니까?

▲틈만 나면 젊은이들을(2021년 대구 영남대 학생들) 대상으로 강연하며, 한국에 대한 바른 애국과 애국심을 강조하는 인 소장.ⓒSR타임스
▲틈만 나면 젊은이들을(2021년 대구 영남대 학생들) 대상으로 강연하며, 한국에 대한 바른 애국과 애국심을 강조하는 인 소장.ⓒSR타임스

Q. 그렇다면 국민들이 정치하는 분들을 합리적으로 평가해 줘야 할 부분에 할 말씀이 있다면, 어떤 점인가요?

== 예를 들면서 말씀드려 볼까요. 현재 한국의 현역 정치인 중에서 예를 들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른 분야 앞선 분들이나 미국 정치인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백선엽 장군 잘 아시죠? 6·25 때 이 나라를 지켜낸 영웅 아닙니까?

그런데 일부 국민들은 일본 사관 학교를 나왔고, 또 일제강점기 장교를 했다고 친일파 군인이라고 깎아내립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장군도 원래는 영국 장교였습니다. 미국이 영국의 지배받고 있다가 독립한 것 아닙니까? 그때 영국 장교를 한 것이죠.

그렇지만 미국인 누구도 조지 워싱턴을 미국 나라를 세우는 데 공헌한 대통령으로 평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친영(親英) 장교라고 비난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미국인들이 백선엽 장군을 평가하는 기준도 말씀드리면 더 확실한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백선엽 장군이 6.25 발발 전 지리산에서 남로당 빨치산 토벌 대장을 해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습니다.

같이 협력한 미국당국의 군사 서류에는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의 작전명을 “operation baek(작전 백)”이라고 명명하여 백 장군의 공로를 높일 뿐이지, 그가 친일한 장군이라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예는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헌법을 76번이나 어겼지만 미국을 통일한 것 하나로 미국인들이 존경하는 대통령 우선순위로 꼽지 않습니까?

몇 분들 예를 들었습니다.

정치인도 평범한 인간이고 시민입니다. 그가 윤리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하면 당연히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그의 정치적 업적이 크면 그것은 분명히 인정해 주는 풍토가 필요합니다. 그런 풍토가 조성되어야만, 정치인들도 잘하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 아닙니까?

 

Q. 소장님의 정치에 관한 말씀을 듣다 보니까, 아직도 소장님의 가치가 보수 쪽인지?아니면 진보 쪽 생각을 가졌는지? 판단이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그건 나도 가끔은 판단이 안 됩니다. 또 내가 한 행동도 그렇지 않습니까? 집안 사업으로 북한에 29번이나 왕래하면서 북한 주민 결핵 퇴치 사업을 했습니다.

우리한테 커다란 이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일방적으로 필요한 앰뷸런스와 약품을 구입해서 북한 주민들 보건 건강을 위해 가져다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이 일은 북한 정권과 전혀 결탁할 일도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인도주의적 차원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념적인 문제가 개입될 소지도 없었죠.

같은 맥락에서 나는 광주항쟁 때 진압군의 포위를 뚫고 광주 시내에 가서 외신기자들 통역을 자원봉사 한 적이 있습니다.

순천인 고향인 내가 연대 의대 1학년 때 휴교령이 나서 고향 집에 가 있었습니다. 그때 광주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이 진압군과 대치하며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본능적으로 의대생 입장에서 도울 일이 없을까 해서 광주로 갔습니다.

도착 후 상황이, 단지 거기서 외신기자들과 시민군들 사이에 통역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초에 목적한 의료봉사는 내가 할 입장이 못되었습니다.

다시 개교되어 학교로 돌아오니까 미국대사관, 경찰, 학교 등에서 나의 사상을 불온 분자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미국대사관에서도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으니까,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순수한 애국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용단을 내렸습니다. 그 당시 대학생들은 1학년 때 군사교육 과정의 하나로 육군 행정학교에 한 달 동안 입소해서 군사교육을 의무적으로 받았습니다.

흔히들 우리 세대는 다 알고 있는 ‘문무대 입소’라는 것이죠. 당연히 외국 학생들은 입소할 의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체제 순응자(?)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자원해서 입소했던 것입니다.

일련의 살아오는 과정의 나의 행보를 보면서, 내 스스로는 사상적으로 쉽게 말해서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며 나름대로 균형 있게 역사를 보고 살려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앙에 기초하여 옳은 일에 대해서는 옳다고 하고, 불의한 일은 어떤 식으로든지 작은 저항이라도 하고 산 것 같습니다. 이해되십니까?

▲2023년 순천만 국제 정원 박람회 홍보대사로 위촉받음. 순천시장(노관규) 등과 함께 한 인요한 소장. ⓒSR타임스
▲2023년 순천만 국제 정원 박람회 홍보대사로 위촉받음. 순천시장(노관규) 등과 함께 한 인요한 소장. ⓒSR타임스

Q. (단시간 만남으로 확실하게 동의하기가 어렵네요) 우리 사회 현안에 대해 한, 두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소장님이 하는 말씀에 따라 독자들이 소장님을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 그 문제에 대해 나는 정치적인 주장에 대해서는 왈가불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의사니까, 모르는 분에 비해서는 과학적 판단이 조금 더 있을 것 아닙니까? 그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세상 이치를 상대적으로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한국이 정말 치안이 잘 잡혀 있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1987년에서 1991년까지 미국 가서 미국병원에 연수 겸 근무를 하고 있을 때, 미국에서 범죄 발생률이 높은 ‘할렘가’에 거주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미국의 치안과 한국의 치안을 비교해 보면, 한국은 치안 일등국일 뿐 아니라 치안 질서를 잘 맡고 있는 한국 경찰들에게 무한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과학과 세상 이치를 가지고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로 인한 우리 국민이 입는 피해 여부를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본이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엄격한 실사와 관리·감독하에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방류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먼저, IAEA(국제원자력기구)는 1957년에 창설된 국제적인 원자력 기구입니다. 이 기구는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연구와 집행을 하는 최고의 권위가 공인된 국제기구입니다. 또 원자력과 관련된 세계의 모든 국가가 다 가입되어 있죠.

그러므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문제도 IAEA(국제원자력기구) 검사 결과에 따라야 합니다. 그게 문명국인 한국국민의 자세 아닐까요?

만약에 IAEA가 문제가 있다 하면, 일본 정부가 먼저 방류하지 못합니다. 방류하는 물이 일본 근해를 거쳐 다른 쪽으로 나가니까, 먼저 일본 국민들한테 피해가 올 수 있는데 일본 정부가 무리해서 방류할 수 없는 것이 이치 아니겠습니까?

또 하나는 주변의 상황적인 문제도 거론 안 할 수 없습니다. 내가 구체적인 수치는 그 문제의 토론장이 아니니까 밝히지 않겠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죠.

지금까지 구(舊)소련부터 러시아가 원자력 실험 후 유출수가 우리 동해에 흘러 들어오지 않았다고 장담이 가능한가요? 또, 남태평양에서 미국과 프랑스가 핵실험을 한 것은 수도 헤아릴 수 없다고 하지 않나요?

덧붙여, 중국의 핵발전소는 중국영토지만 우리 서해 쪽으로 다 건설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만약에 중국이 핵 오염수를 방류한다면 우리 서해가 가장 직접적인 피해 권역 아닐까요?

그러므로 일본의 오염수 방류도 국제 공인기구인 IAEA의 유·무해성 판정에 따르는 것이 합리적 자세이고 선진국 대열에 있는 우리 국민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Q. 이명박 정부 때 소위 촛불시위의 실마리가 되었다는 광우병 파동에 대해서도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은데요?

== 이 문제도 내가 과학에 근거한 논리적 규명을 전에도 몇 번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정치적 이용을 위한 괴담으로 기획되었다는 실체가 거의 밝혀지지 않았나요? 더 이상 거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인터뷰 도중 순천에서 온 환자가 진료 일정 연기를 부탁하자, 고향 분 부탁은 거절 못 한다고 껄껄 웃는 인요한 소장 ⓒSR타임스
▲인터뷰 도중 순천에서 온 환자가 진료 일정 연기를 부탁하자, 고향 분 부탁은 거절 못 한다고 껄껄 웃는 인요한 소장 ⓒSR타임스

Q. 현안에 대해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소장님은 고향이 전라도임을 밝히면서, 우리 사회에 잠재된 지방색 타파에 대한 노력을 많은 자리에서 역설하십니다. 그 사이에 어느 정도 성과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전에는 노골적으로 경상도 대(對) 전라도 사람들이 드러내놓고 대립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나 자신도 어릴 때는 경상도 사람들이 일본 사람보다 조금 덜 나쁜 사람들로 알고 자랐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사회의 네트워크가 발달했기도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이런 부분이 엷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는 점점 더 그렇게 느끼는 것 같고요. 영·호남 대립의 지역감정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하루아침에 없어질 것도 아니죠.

역사적으로 멀리는 삼국시대부터, 지금은 근,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사회적으로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먹고 사는 경제적 혜택이 정치적으로 배분되는 근대사로 인해 더 간극이 커질 때도 있었습니다. 깊은 얘기는 이 자리에서 내놓고 할 수 없지만, 토지 개혁 문제와 경제개발 계획 등의 경제 정책에 따라 양쪽 주민들의 감정적인 대립(對立) 골은 더 깊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나는 집안 형제들과 1997년 유진벨 재단을 설립해서 북한 주민들의 결핵 퇴치를 위해 인도주의적인 사업을 했습니다. 나도 북한을 29번 다녀왔고요.

그때 북한 사람들 하고 협상을 수시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 강하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나는 우리나라 지방색에 대해 다시 생각할 계기가 되었습니다.

즉,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가 각각 감성과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북한 사람들이 강해서 불편했지만, 고구려 후손 격인 북한 사람들이 뼛속 깊이 간직한 고집 센 유전자(DNA)가 우리나라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된 긍정적인 부분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을지문덕, 연개소문으로 대표되는 고구려 장군들과 그 당시 고구려 주민들이 없었다면, 당시에 당나라로부터 침략당해 패할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역사가 없었다면, 현재는 우리나라가 중국의 속국도 되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호남이 대립하는 지방색 타파를 위해서는 지방색을 가진 주민들이 진심으로 상호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물론, 정치적, 정책적으로도 상대를 위한 배려가 지속되는 노력이 계속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노력이 계속될 때, 지금의 남의 나라 사람처럼 대하는 지방색으로 인한 갈등이 조금씩 완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2012년 우리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특별귀화자 1호 인증서를 받으셨잖아요? 원하셨나요?

== 그때는 원하기도 했지만 조금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귀화하게 되면 내가 이중국적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당장, 우리 애들이 한국이나 미국에 있는 외국인 학교 다니는데 제한이 있습니다. 정부도 이런 법을 만들어 놓고서 시행을 못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향이 한국 사람인 내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인증서 받는 날에도 자격을 받았는데도, 뭐 좀 쭈뼜거리고 서 있었나 봅니다. 그랬더니 모 일간지 기자가 태극기를 주면서 흔들면서 찍자고 해서, 그 사진이 다음날 37개일간지에 전부 나갔습니다.

다음날부터 사람들한테 축하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도 나 스스로 아주 잘된 일이라 생각합니다.

요즘은 내가 1호 귀화자로서 매년 귀화식 때 참석해서 축사로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Q. 늦었지만 저도 축하드립니다. 인터뷰 말미에 좀 예민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지금 우파(?) 진영 모 인사께서 광주항쟁은 북한군이 참여해서 확대되었다고 합니다. 현장에서 외신기자 통역을 자원하면서 참여한 분으로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 나는 단정합니다. 사실무근입니다.

이런 얘기를 자꾸 하면 할수록 우파 진영 사람들을 불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당시 시민군 대표들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두 가지 섭섭함을 토로했습니다.

하나는, 북한군과 싸워야 할 국군이 시민군을 향해 총을 쏘는 것과, 두 번째는 자기들은 아침마다 반공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를 부르고 있는데도 빨갱이로 매도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직접 목격하고 들었지 않습니까? 광주 시민들을 두 번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파 인사(?)가 말하고 있는 참여했다는 인민군은 그 당시에 전부 16세 정도이기 때문에 따져보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이분이 응한다면 언제든지 언론 앞에 공개토론 할 의향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130년 가까이 한국과 한국인을 위하여, 선교, 교육, 의료 활동을 한 린튼 가(家)의 4대 후손인 인 요한 소장과 대담하는 홍용락(오른쪽) 고문ⓒSR타임스
▲한국에서 130년 가까이 한국과 한국인을 위하여, 선교, 교육, 의료 활동을 한 린튼 가(家)의 4대 후손인 인 요한 소장과 대담하는 홍용락(오른쪽) 고문ⓒSR타임스

Q. (예민한 문제여서 공개토론을 한번 해서 걸렸으면 좋겠습니다) 의사 입장에서, 앞으로 우리 의료계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많이 있죠. 있다마다요. 많습니다만 핵심적인 것 하나만 말씀드립니다.

간단히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의료산업화와 의료글로벌화에 정부 정책이 빨리 나서기를 바랍니다.

철강, 반도체, 조선산업만이 국민소득을 세계 5위권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우리나라 의료인들의 기술집약 능력은 세계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수준입니다.

특히 외국인들의 진료는 해마다 한국을 찾는 수요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내가 있는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 진료가 매년 9만 명 정도입니다. 그리고 세브란스병원 로봇 수술 회수가 거의 4만 회가 되어 갑니다.

한 단위 병원이 이 정도면 전체 수요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 가실 겁니다. 이제는 병원을 제도적으로 영리 병원 등을 허용해 외국인 환자 진료 수요를 끌어들여야 합니다.

국내 의료진의 수준과 장비는 이미 다 준비되어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정책 전환으로 빨리 부응해서 의료도 외국인 환자들을 끌어들이는 K-산업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아야 합니다.

 

▲ⓒ홍용락 논설고문
▲ⓒ홍용락 논설고문

(인요한 소장께서는 성격과 생활 방식은 서양인과 한국인의 장점만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일 뿐 아니라, 솔직하고 담백하다.

이것이 서양인들의 특징이라면, 직선적인 성격이면서도 정이 많은 특징은 한국인들의 특징일 수 있다.

인터뷰 중 찾아온 환자 한 분이 다음 진료 시간을 앞당겨 줄 것을 원했다. 순천에서 왔다고 하니까, 고향 사람이어서 거절 못 한다며 고민을 해 보자고 한다.

다른 하나의 특징은, 인 소장께서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가치나, 말과 행동의 사회적 판단 기준은 신앙심에 바탕을 두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작은 부분에서까지 상대를 배려하면서 대화를 진행하는 배려심도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힘든 부분이다.

특히, 이제까지 해온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인 소장 개인의 활동은 본인의 이해관계를 먼저 따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대한민국과 한국인에게 도움이 되는 공의(公義)면 거침없이 진행하는 것 같았다.

의료계 활동과 선교뿐만 아니라, 한국의 격변기 역사 현장인 광주항쟁 참여와 북한 주민 폐결핵 치료 등이 한국과 한국인의 이해를 우선하는 신앙심에 기반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활동이 한국에 건너온 서양인(미국) 한 가문의 한국에 대해 4대째 이어져 온 유전자가 계승된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의무, 책임감)를 실천하는 한 표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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