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감귤을 도입, 재배한 세대에서 주도적인 노력을 했고, 그 이후에도 다양하게 상품성 있는 제주 개량 과일 개발에 전념한 허인옥 교수 ⓒSR타임스
▲제주도에 감귤을 도입, 재배한 세대에서 주도적인 노력을 했고, 그 이후에도 다양하게 상품성 있는 제주 개량 과일 개발에 전념한 허인옥 교수 ⓒSR타임스

◆ 홍용락 고문이 만난 '시대를 바꾸는 사람들' [27] 제주 감귤을 '대학 나무 신화'로 바꾼 선두 주자 허인옥(89) 제주대 명예교수

요즘은 사시사철 생산되는 과일이지만, 감귤은 겨울철 과일이다. 고마운 것은 제주도에 살고 있는 지인(知人)이 겨울만 되면, 감귤을 한 박스를 보내 줘서 감사히 먹고 있다.

 

얼마 전에도 감귤을 보내 줘서 감사의 전화를 드렸더니, 내가 쓰는 인터뷰 칼럼을 열심히 보고 있다고 한다.

 

덧붙여, 딱딱하지 않게, 그분이 우리 사회의 시대 변화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방송대본처럼 쉽게 써 줘서 부담 없이 읽는다고 격려까지 해 준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꼭 서울에 사시는 분만 선정하지 말고, 지방에 계시는 분도 그 지역의 변화를 주도한 분이 많다면서 한 분을 추천한다.

 

제주대학교 허인옥 명예교수를 소개한다. 

 

허 교수는 1960년대 초 제대로 된 농사 거리가 없는 척박한 제주 땅에 일본서 감귤 묘목을 사재를 털어 화물선에 싣고 와서 서귀포 등지에 이식(移植)시킨 감귤 1세대 선두 주자라 한다.

 

그 이후에도 농민으로서 감귤 농사를 지으면서, 또 대학교수로서도 평생 감귤 개량 연구를 해 온 분이라고 덧붙인다.

 

감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레몬 같은 감귤 대체 작물을 제주도에서 재배에 성공했다고 한다.

 

그와 같은 노력은 감귤 포화 상태에 이른 제주도에 기능성 대체 과일인 레몬, 유자, 키위 등으로 새로운 방향성을 주도한 역할이 되었다고 한다.

 

흥미는 갖지만, 자기 분야에 열심히 해 와서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렇게 경제 대국으로 이뤄놓은 기성세대가 한 두분인가? 하는 생각으로 잠시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인(知人)이 허 교수 같은 분이 감귤을, 제주도를 대표하는 자원으로 특화하지 않았을 경우를 상상해 보라고 한다.

 

제주에서 감귤 생산이 되기 전에는 제주도는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제주도에 부정적인 속담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시절이었다.

 

전체 제주도가 그 정도로 의식주가 궁핍한 시절이었는데, 감귤 농사가 확산됨으로써 제주도 전체 생활 환경이 성장하고 변화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제주도에 감귤 농사가 시작되면서, 당시 다른 지방에서는 자녀들을 대학 보내기가 쉽지 않았지만, 제주도민은 감귤 한 그루만 재배하면 자녀들의 서울 유학까지쉽게 시킬 수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한편, 감귤이 제주도를 상징하는 특산물이 안되었다면 오늘날처럼 제주도가 청정이미지를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80년대 들어 제주도가 천혜의 관광자원을 바탕으로 세계적 관광지가 되었을 때, 감귤 산업 특화가 먼저 되어 있지 않았다면, 미국의 라스베이거스, 동남아 마카오 같은 도박 등이 성행하는 환락(歡樂) 도시로 변할 수도 있었지 않았겠냐고 반문한다.

 

또 허 교수는 감귤 묘목을 제주도에 선도적으로 이식한 후에도, 녹차(綠茶) 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제주도의 특화 산업의 방향성도 획기적으로 제시했다 한다.

 

태평양화학과 협력하여 ‘오설록’을 조성하고 ‘설록차’ (雪綠茶)상품의 연구 개발을 주도하면서 제주도를 세계적인 한국 차(茶) 생산의 첨단 지역으로 만들었다.

 

지금의 ‘오설록’을 태평양화학 창업 회장인 서성환 회장과 같이 땅을 파며 조성했다고 한다. 보내준 태평양화학 서 회장의 자서전 내용 중 첫 리드(Lead)에는 ‘허인옥을 만나다’로 표기되어 있다.

 

감귤 이식과 녹차 개발은 제주도의 생활환경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근본적인 작물 역할을 했을 뿐아니라, 친환경 제주도의 청정 이미지로 돋보이는 데 분명히 기여되었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에, 제주 종합버스터미널로 마중 나온 허 교수의 아들 허재영(52) 교수(제주대 전자공학과)로부터 구(舊)시가지 허 교수 자택 서재로 안내받았다. [편집자 주]

 

- 불모의 땅 삼다도(三多島)에 귤과 녹차 등의 작물 이식(移植) 통해 풍요로운 제주로 변화 바람 주도

- 1960년대 일본 농업성 연구원 재직 시 사재로 감귤 묘목 1만그루를 제주에 이식 '감귤의 섬'으로 이끈 1세대 주역

- 온주(溫州:노지)감귤 선호가 한계에 봉착... 한라봉, 천리향 등 개량종 개발과 레몬 등 대체 특화 작물의 제주도 첫 시험 재배 성공

- 기업과 협력 녹차 단지 ‘오설록’을 자연 친화적 경관 설계해 제주도 첨단 6차 녹차 산업 모델로 제시

- 녹차 연구 바탕 제주 대표적인 녹차 브랜드 ‘설록차’를 태평양화학과 연구·개발한 주인공

▲녹차 산업 불모지 제주도에서 태평양 화학 고(故) 서성환 회장과 의기투합하여 ‘오설록’ 단지를조성한 직후, 서 회장과 허 교수 ⓒSR타임스
▲녹차 산업 불모지 제주도에서 태평양 화학 고(故) 서성환 회장과 의기투합하여 ‘오설록’ 단지를조성한 직후, 서 회장과 허 교수 ⓒSR타임스

Q. 반갑습니다. 2021년 9월 26일 제주 MBC에서 방송된 특집 다큐멘터리에서 교수님과 제주 출신 재일교포들이 일본에서 감귤 묘목을 이식해 오면서 제주도가 감귤의 섬으로 출발하였다는 내용을 봤습니다. 시작이 그렇게 되었나요?

== 맞습니다. 제 개인적인 시작도 그 시점이었지만, 그 당시 국가정책과 또 제주도 출신 재일교포들의 애향심도 제주도가 감귤 섬이 되는 데 영향이 컸었죠. 그 때 우리나라는 전체가 생활환경이 어려웠습니다.

특히 제주도는 정말 전통적인 어업과 밭작물 생산에 의존하며 살았기 때문에 더욱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농업 교사 국가시험에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합격해 1호 교사로 제주 농고 교사 발령을 받았습니다.

또 농산물 과수 분야 국가 검사원 1호로 막 만들어진 감귤 농협의 전체 업무를 추진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감귤 재배에 관심 있고 뜻이 있는 10명을 선발해, 자비를 들여 일본 농림성의 감귤 시험장에 한 달 연수를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1, 2개월 만에 비자가 만료되면 귀국했는데, 나는 일본 농림성 감귤 국립 시험장 연구원으로 2년을 더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귀국하면서, 그동안 내가 연구하면서 제주도 특성에 맞을 수 있는 품종 27종(種)을 선별해 묘목 약 1만 그루를 화물선을 빌려 서귀포까지 싣고 와서, 지역 농민들에게 나눠 심게 했습니다.

당시 개인적으로 묘목을 구입했기 때문에, 경비에 대한 보증을 제주도 출신 김평윤 한국일보 도쿄 지국장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개인적인 노력을 하는 시기에, 5.16혁명으로 들어선 박정희 정권이 재일 교포들이 고국에 있는 친척들에게 재산을 기증하면 관세를 물리지 않는 법을 제정했습니다.

재일 교포들의 국내로 재산 반입을 도와주는 일종의 특례법 조치였던 것이죠. 그때 제주도 출신 재일 교포 중 많은 분이 뜨거운 애향심으로 호응했습니다.

그 기회에 제주 출신 재일 교포들이 별도로 조직을 만들어 1970년대 말까지 약 400만 묘목을 제주도에 기증했습니다.

 

Q. 그때 교수님과 제주도 출신 재일 교포들의 헌신적 애향심, 박정희 정권의 제도적 후원 등이 종합적으로 오늘날 제주도를 감귤의 섬으로 만들어 놓았군요. 그런데, 많은 언론이나 정책 입안자, 또 재배 농민들이 교수님을 ‘제주도 감귤의 섬’의 주역으로 말하는 의미는 더 있을 것 같습니다.

== 아마도 내가 그 이후에 대학에 있으면서 감귤 연구기관이 자리잡기 전부터 감귤 연구를 지속해서 해 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또 시대가 변하면서 대표적인 노지(路地)감귤인 온주밀감(溫州蜜柑) 등에 대한 개량종으로 한라봉, 천리향 등을 시험 재배해 왔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감귤의 포화상태가 되면서 농가의 새로운 대체 작물로 레몬, 키위, 유자 등 특용작물을 제주도에서 시험 재배에 성공하고 보급하는 데 노력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굳이 내세울 게 있다면, 1960년대에 감귤 묘목을 일본으로부터 이식해 와서 수확하는데 걸리는 연한이 8년 내지 10년이 걸리는 것을 3년 안으로 수확이 가능하게 바꾼 재배 방법인 ‘밀식 재배(密植栽培)’로 성공시켜 보급한 것도 한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그 당시는 감귤 묘목을 심어 수확하는 데 10년 가까이 걸리는 것이 일반적인 얘기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 가지 실험을 한 결과 감귤 묘목을 5미터 이상 거리를 두지 않고 가까이 빼곡하게 심으면 3년 안에 수확이 가능하다는 조기 결실법(밀식재배)을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처음에는 재배 농가들이 믿기지 않아 했습니다만, 제가 직접 실험해 본 결과이기 때문에 따라 한 분들이 실제 그 결과를 내서 입증하였습니다.

 

Q. 당시 감귤이 제주도에 많이 재배되면서 제주도가 어떻게 변했습니까?

== 감귤이 생산되면서 제주도에 기여한 것을 굳이 공치사(功致辭) 한다면, 한마디로 한 시대의 발전을 앞당겼다고 거창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역민의 어려운 살림살이가 다각도로 나아지게 기여한 것은 물론입니다.

한때 먹고 지나가는 과일이 아니라 감귤이 제주도를 대표하는 생활 상품이 되었습니다. 상품이 되었다는 것은 다른 물건과 대등하게 교환할 수 있는 매개물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다 보니까, 주민들 개개인의 재원으로 제주도에 초가지붕이 개량됩니다. 물이 귀한 제주도였습니다만, 주민들 자본으로 상수도 개량 사업이 완성됩니다. 물론 학교시설도 국가가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도민들의 손으로 개선됩니다.

서울 등 육지로 제주도 출신 유학생이 급증합니다. 당시 인구 대비해서 어느 지방보다 제주도 출신 서울 유학생이 많았다는 통계도 있었습니다.

감귤 재배가 천재지변에 크게 영향받지 않는 비교적 안정적 생산의 특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제주도민의 생활이 급격하게 질서를 잡는 안정적 분위기가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2010년 제주도에서 국내 최초 레몬을 시험 재배한 뒤 KBS의 ‘6시 내 고향’ 프로그램에 출연해 알리고 있는 허 교수 ⓒSR타임스
▲2010년 제주도에서 국내 최초 레몬을 시험 재배한 뒤 KBS의 ‘6시 내 고향’ 프로그램에 출연해 알리고 있는 허 교수 ⓒSR타임스

Q. 제주도로서는 1960, 70년대 감귤 재배가 시작된 이후 풍요로움이 계속 유지될 뿐만 아니라, 지금도 다른 지역보다 물질적, 정신적 여유가 있는 주민 생활로 비치고 있습니다. 감귤 재배가 제주도의 풍요로움을 유지하는 견인차 구실을 계속하기 때문이겠죠?

== 그럴 수도 있습니다. 감귤 재배가 없던 시절을 살아본 나로서는 그나마 감귤이 없었다면 제주도는 물질적, 정신적으로 얼마나 피폐해졌을까? 하는 염려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감귤만을 놓고 보면 이제는 한계점에 다다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통계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작년에 제주도 감귤의 총생산량이 1조 원을 넘었다고 합니다. 단일 농산물 생산량이 1조 원이면 어마어마하게 큰 액수입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살펴보면 이 액수만을 보고 감격할 수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제주도 감귤 농가가 3만 호에 가깝습니다. 1조 원을 3만 농가의 생산량으로 나눠보면 한 가구당 3300만원꼴입니다. 가구당 생산 재료비(농약, 비료, 노임 등)를 40% 정도 감안한다면 실제로 한 가구당 2000만 원 정도 수입이 됩니다.

또, 부부 합산인 이 액수를 부부 별개로 나눠보면 각 농민당 월 70만~80만 원 수입이 됩니다.   

 

Q. 듣고 보니 제주의 감귤 산업이 전 시대처럼 황금알을 낳는 품목만은 아니군요. 현재의 현상을 이제는 고소득 농산물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어떤 문제가 있나요?

== 제주 감귤 산업의 문제점에 대한 이해를 위해 한마디 덧붙이면, 제주 감귤이 제값을 받고 재배 농민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서는 연간 감귤 생산량의 적정선은 30만 톤 정도가 맞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과일 가격의 기준과 소비자 선호도와 생산량 조절의 기준이 되는 과일은 사과입니다.

사과의 국내 생산량은 50만 톤입니다. 그런데도 감귤의 생산량은 일반 온주밀감 50만 톤과 한라봉, 레드향, 황금향 등 개량종 20만 톤을 합하여 70만 톤에 이릅니다.

사과보다도 훨씬 많이 생산됩니다. 이렇게 과잉생산을 함으로써 감귤 농가가 생산하는 감귤이 제값을 못 받은 적은 벌써 여러 해 전부터였습니다.

 

Q. 생산 과잉이 제주 감귤의 현재 문제점인 것 같군요. 그렇다면 큰 소득을 못 보면서도 감귤 생산이 계속되는 감귤 농업의 구조적인 문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 제주도 감귤 재배면적이 2만헥타르(ha) 정도 됩니다. 과잉 생산이 되면서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온실재배(하우스 재배)와 레드향 등으로 품종 개량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온주밀감으로 대표되는 노지 감귤은 특징이 다른 과일 작물에 비해 재배가 쉽다는 것입니다. 감귤나무는 특이하게 다른 과일나무들이 생산량 개선을 해야 하는 수목 전정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또, 비옥한 토양 조성을 위한 비료 및 거름 작업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별하게 신품종으로 묘목을 교체하지 않아도 60~70년 수확하는 데 큰 지장이 없는 묘목입니다.

현재 제주 노지 감귤은 제가 70년 전에 가져와서 심은 27종이 대부분 밭에서 재배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한번 묘목을 심어서 특별하게 관리하지 않으면서도 수확 시기에 매년 비슷한 수확을 한다는 것이죠. 굉장히 편한 농업 종목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각 농가는 소득이 낮아도 재배가 쉽기 때문에 재배를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초기에 감귤 묘목을 심었던 많은 분이 이제는 고령이기 때문에, 비닐하우스 재배 등 투자비가 많이 드는 농업을 하지 않고, 한라봉 등 개량종 감귤로 종(種)을 바꾸지 못하는 것도 개선되지 못하는 한 이유입니다.

덧붙여 외부적으로도 제주도의 땅, 즉 지가(地價)가 농사를 지어 고소득을 내는 것보다 더 급속도로 상승하기 때문에 감귤 농사 변화에 대한 의욕이 크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됩니다.

 

Q. 교수님 말씀을 들어 보면, 이대로는 제주도 감귤 산업은 사양길로 내려갈 것만 같습니다. 개선 방향은 없을까요?

== 정책과 행정기관에서 농민들과 접촉하며 구체적인 개선책을 제시하고 협조해 나가리라 기대합니다.

평생 제주 감귤을 연구하고 개선해 보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으로서 큰 테두리에서 개선 방향을 몇 말씀 드릴 것 같습니다.

우선 60~70년 전에 심었던 감귤 묘목은 이제 그 묘목에 적합한 토양에 맞춰 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때 적합지(地)가 아니어도 소득이 높으니까 심었지만, 감귤도 그 묘목에 맞는 토양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 가려 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묘목에 맞는 토양에서 좋은 과일이 나오고, 더 좋은 값을 받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는 차별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대가 감귤이 비싸면, 정부에서 무관세로 오렌지를 싸게 수입해서 판다고 애국심이 없는 정책이라고, 항의할 수 없습니다. 정책입안자는 더 많은 소비자 입장을 의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식은 쌀입니다. 그리고 부식은 채소이고요. 과일은 간식입니다. 간식이란 것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찾아 먹는다는 말입니다.

또 간식 중에서도 지금 통계로는 사과가 가장 선호하는 과일입니다. 그러므로 사과를 뛰어넘는 과일로서 감귤이 자리매김해야 합니다.

이렇게 될 경우 가장 필요한 간식이 되는 것이죠. 사과를 뛰어넘는 과일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차별화, 특산화, 고급화가 되어야 합니다.

현실은 사과보다는 언제, 어디서 쉽게, 아무렇게 먹을 수 있는것이 감귤입니다.

상대적인 고급화가 떨어지는 과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한라봉, 레드향 등으로 맛의 차별화가 시도는 되고 있습니다. 

일반 감귤부터 사과 선호를 뛰어넘는 고급화가 되는 차별화가 필요합니다. 맛, 가격, 과일로서 위치가 사과를 상품적으로 이기는 차별화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수시로 일본 감귤 업계와 제주 감귤 업계의 교류를 주도했던 허 교수가 2004년 전(全) 일본 감귤 대회 세미나에 참여해서 한. 중. 일 대표와 함께 주제 발표를 하는 허인옥 교수. ⓒSR타임스
▲수시로 일본 감귤 업계와 제주 감귤 업계의 교류를 주도했던 허 교수가 2004년 전(全) 일본 감귤 대회 세미나에 참여해서 한. 중. 일 대표와 함께 주제 발표를 하는 허인옥 교수. ⓒSR타임스

Q. 현실적으로 그런 노력을 정책 입안자나 생산 농가에서 고민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더 조언하실 말씀이 있는가요?

== 이대로 지구 온난화가 진행되면 2050년에는 주요 감귤 생산지가 강원도로 바뀐다고 얘기를 하는 미래학자들이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제주 감귤 농가는 지금부터라도 생산량을 줄여야 합니다. 소비 능력에 맞게 규모화해야 한다는 것이죠

소비 능력에 맞는 감귤로 생산량을 맞출 때, 생산 농가가 적정한 가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에 10킬로그램에 5,000원 하는 감귤을 선물했을 때, 받는 사람이나 선물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감귤 농가 스스로 감귤은 재배 시 크게 관리하지 않아도 수확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무턱대고 생산 판매하는 자세는 이제는 농가 스스로 지양해야 할 때입니다.  

한라봉만 하더라도 제주도에서 일본의 5~6배가 생산되었기 때문에 과일로서 희소성이 줄어든 것이 아닙니까?

제값도 받지 못하고요. 한마디 더 고언 한다면, 이제는 감귤의 생산과 판매를 명실상부하게 시스템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농민들이 감귤을 생산하면 판매는 농협이라는 조직에서 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농민들 각각의 생산품에 대한 평가는 시스템에 따라 객관적으로 하면 됩니다. 우리나라도 농협 등이 이런 일을 시스템으로 해야 합니다. 농협이 은행으로서 역할에 치중해서는 안 됩니다. 

일본의 경우 생산 농가에서 배추 한 포기라도 아침에 집 앞에 상품으로 내놓으면 농협에서 거두어가서 판매하고, 저녁에 통장에 입금해 줍니다.

이런 시스템이 감귤 농업에 있어서 바람직한 시스템(System)화입니다.

농민은 품질 좋은 생산품을 만들어 내고, 농협은 시스템으로 판매를 책임지는 이런 시스템이 있을 때, 감귤 농민들은 우등 품 생산물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도 농산물 판매 촉진을 위해 로컬푸드(Local food)제도를 각 지역에서 시험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도시 근처에 농민 생산자의 판매 박스를 설치해서 그 농민들이 자기 생산물을 비치해 놓고 판매하는 곳을 운영하는 것 같습니다.

새롭게 변형된 농산물 판매 시스템 같습니다. 일본의 지산지소(地産地消)와 같은 운영 방식입니다.

감귤 농협도 농협을 통한 판매가 30%가 안 되는 현재 상황입니다. 여러 가지 시스템 판매 제도를 적극적으로 보완해야 할 시점 같습니다.

 

Q. 감귤 생산과 유통 등에 대해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얘기를 하셨는데, 자료를 찾다 보니까 90년대 언론 기사에 북한에 감귤 보내기 운동을 수년 동안 앞장서서 하셨다고 보도됐습니다. 흔히 말하는 남북한 통일문제 같은 것에도 관심을 가졌습니까? 

== 그런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내가 연구하고 재배하는 감귤이 1990년대 후반에 과잉생산되어 사료로 사용해도 남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얼마 전에 작고(作故)한 신구범 제주도지사가 땅에 파묻기까지 하며 처치 곤란할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할 수 없어서 하는 매몰 처리도 환경문제로 논란이 되었습니다. 나는 당시 사회활동의 하나로 제주 경제정의실천 시민연합(경실련) 대표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중앙에서 경실련 사무총장을 맡고있던 서경석 목사께서 제주도에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서 목사에게 제주에서 남아도는 감귤을 남북통일의 시발(始發)이라는 거창한 명분보다 북한 주민들, 특히 어린이들의 비타민 결핍을 보충하는 뜻에서 북한에 보내는 루트를 알아봐 달라고 했었죠.

같은 시기 제주영락교회는 교회 차원에서 100톤을 북한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100톤 정도야 사회단체에서도 할 수 있지만 1000톤 이상 대단위로 보내는 것은 정부가 나서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때 도지사를 만나 우선 제주도에서 남는 감귤 처리를 할 수 있는 선의의 방향이라고 강조하고, 남북 교류 차원이 아니라 인류애(愛) 차원에서 감귤을 북한에 보내자고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한 5년 동안 한 번에 1000톤 정도 5~6회 북송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지속하지 못 한 것은 감귤을 정부에서 구입하는 비용, 운송 경비 등이 부담이 되어 중단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이 때 입맛은 어른이 되어도 기억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때 그 감귤을 먹은 어린이들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 제주도 감귤을 맛본 것에 대한 추억을 얘기할 때가 분명히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회활동을 하면서 그 일을 연결한 것을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Q. 교수님 감귤이 제주도 정착에 큰 몫을 하셨고, 한편으로 교수님이 제주도 녹차 산업 활성화에 많은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녹차 재배는 언제 시작하셨나요?

== 내가 제주대학교 2학년에 다닐 때인 1950년대 중 후반쯤 서귀포 제 고향 산간에 약 1000평 정도 녹차밭을 만들었습니다.

나름대로 차나무 번식도 하고 연구도 하면서 녹차 사업을 제주도 국책 과제로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그 당시 전통적인 방법으로 차를 계속 재배하고 생산했었습니다.

녹차에 대한 관심과 재배는 계속 이어 갔었죠.

▲FTA 등 감귤의 정책적 문제점을 현장에서 파악하기 위해 감귤 생산 농민들과 현장을 다니면서 동고동낙(同苦同樂) 하는 허인옥 교수ⓒSR타임스
▲FTA 등 감귤의 정책적 문제점을 현장에서 파악하기 위해 감귤 생산 농민들과 현장을 다니면서 동고동낙(同苦同樂) 하는 허인옥 교수ⓒSR타임스

Q. 개인적으로도 녹차 재배를 일찍 하셨군요. 현재는 제주도 녹차 사업은 태평양화학 창업주 고(故) 서성환 회장의 주도로 ‘오설록’이란 대단위 차밭을 만들면서, 또 그 회사에서 ‘설록차’ 제품을 생산하면서 시작된 것이라고 알고 있지 않나요?

== 그 회사 입장에서는 맞는 말이죠. 나는 1950년대 중반부터 녹차 재배를 시작했었고요. 제가 녹차 재배와 생산은 가능하지만, 가공과 판매는 여의찮은 상황이었습니다.

1960년대 초 서 회장께서는 그때 화장품의 원료인 향료, 라벤더등을 우리나라가 외화가 부족한 상황이니까 외국에서 사 올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나를 만나 대체 화장품 원료가 될 수 있는 품목 재배와 구입을 타진할 때였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만난 나는 서 회장께 제주도 녹차 산업 활성화를 위해 태평양 화학이 녹차 단지를 조성하는 문화산업을 해 보기를 권유했었습니다.

서 회장께서는 주변에 사업적인 효과가 없다고 많이 반대했지만, 회사의 이미지 증진 등을 고려해서 내 주장을 받아들여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녹차 재배를 시작한 것은 50년대 중반인데, 서 회장을 만나 ‘오설록’ 단지가 조성된 것은 70년대였습니다.

지금도 만난을 무릅쓰고 제주도 녹차 산업 발전을 위해 녹차 단지를 결행해 준 서 회장께 감사한 맘입니다. 결과적으로도 현재는 제주도가 녹차 산업에 있어서는 세계적인 산지가 되었습니다.

 

Q. 제주도가 태평양 화학의 ‘오설록’ 녹차 단지 조성으로 세계적인 녹차 단지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느끼기에는 국내에서도 보성녹차 단지나 지리산 녹차와 비교해 크게 알려지지는 않은 것 같지 않습니까?

== 일반적으로 그렇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보성이나 지리산 하동 같은 곳은 그 지역을 특별하게 부각해야 할 것 같아, 지방정부나 지역산업으로 홍보를 크게 하는 편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 차 생산량이나 품질에서는 단연 제주도가 우위이고,고급스럽고 수량도 훨씬 앞서 갑니다

특히 ‘오설록’ 같은 경우는 단순한 차(茶) 생산지가 아니죠. 당시 쓸모없는 불모지를 차밭으로 경관을 갖춰서 개발한 곳 아닙니까? 그냥 놔뒀다면 지금도 제주도 산중 오지일 뿐이었겠죠.

이 땅을 사람들 생활 편리를 위해 개발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연 친화적인 차밭 경관(景觀)지역으로 설계한 것입니다.

이 차밭에서 차를 생산하고 가공도 하며, 구경꾼이 차밭 경치 구경도 하고 차 판매까지 하는, 인간과 자연환경이 친화적으로 어우러지는 6차산업의 모델을 만들지 않았습니까?

 

Q. 제주도 ‘오설록’ 녹차 단지 조성에 허 교수님은 어떤 역할을 하셨나요?

== 태평양화학 선대 회장께서는 주변의 사업성이 떨어진다는 반대에도, 문화사업 차원에서 자연친화적인 녹차 사업을 해 볼 것을 권유한 나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나도 내가 평소 해보고 싶은 녹차 재배를 대신 해 주는 것이니까, 선대 회장과 같이 땅을 파고 돌을 같이 나르며 조성했습니다.

그때부터 수십 년 동안 녹차 재배와 생산, 가공 판매에 대한 방향을 나는 논문과 현장 기술지도로 조언했습니다.

가시적으로 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태평양화학과 협력하여 ‘설록차(雪綠茶)’란 상품도 개발 했었습니다.

당시 태평양의 녹차 전문 기업인 장원(粧源) 산업 김의광 사장(현 목인박물관 관장)과 협조해서 한국 녹차로서 제대로 된 상품명을 걸고 개발했습니다.

또, 서 회장께서는 같이 연구하던 내 제자들 수십 명을 직접 취업시켜 현장에서 녹차 개발사업을 돕게 했습니다.

이 제자들이 그 이후에 태평양그룹의 중역이 되어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니까, 교수로서 보람도 크게 가질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녹차 개발사업을 태평양 화학과 같이 노력한 결과, 지금도 연간 200만 명이 방문하는 세계적인 자연 친화적 차밭 명소 ’오설록’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보람도 가지게 됩니다.   

▲2010년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에 전후(前後) 100년간 한.일 교류 측면에서 상호 가장 호혜적인   관계를 맺은 ‘감귤 교류’를 주도한 인물로 기사화된 허 교수. ⓒSR타임스
▲2010년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에 전후(前後) 100년간 한.일 교류 측면에서 상호 가장 호혜적인 관계를 맺은 ‘감귤 교류’를 주도한 인물로 기사화된 허 교수. ⓒSR타임스

Q. 열성적으로 일해서 태평양화학 선대 회장과 함께 ‘오설록’으로 대표되는 제주도 녹차 산업을 일궜습니다. 녹차 산업의 대중화가 지속해서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연간 6조원 규모의 커피산업이 우리 차 문화를 지배할 것으로 생각해서 그런 질문을 하는 것 같습니다. 먼저 내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우리 녹차 문화가 모든 차보다 앞서 대중화된다고 장담하지는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서구문화의 전파력이 급속도로 빠르니까요. 하지만 우리 녹차 문화도 폭발적 증가는 없지만, 잠재적으로 지속적인 확장력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도 매일 새벽 ‘오설록’ 앞에는 신선한 녹차를 마시기 위해 몇 백 분이 줄을 선다고 합니다. 

상대적인 증가 속도 차이가 있어서, 부정적으로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도 꾸준히 녹차 마니아들이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경관도 즐기고, 맛도 체험하는 6차산업 모델의 방향성이 될 것 같습니다.

 

Q. 제주도 녹차 산업을 일으킨 드러나지 않은 주인공 중 한 분인데, 사실은 태평양 그룹(화학)의 창업주 서성환 회장의 공로로 많은 분들이 인식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 그 점에 대해서는 나는 큰 불만이 없습니다. 

먼저, 내가 50년 중반부터 녹차 연구와 시험 재배를 했습니다만, 가공과 판매까지 지금처럼 융성한 제주도 녹차 산업을 이끌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것 같이 60년대에 제주도에서 화장품 재료 생산 여부를 나와 상의하던 태평양화학 창업주 고 서성환 회장을 만나 제주도 녹차 산업 정착을 위해 협력한 것입니다.

사업가인 서 회장께서는 본인 사업의 발전 기지로 제주도의 가능성에 대한 애정을 남다르게 가진 분이었습니다. 바나나, 레몬, 유자 등에 대한 제주도에서 실험 재배와 상품화에 대한 나의 주장에 동의하고 투자를 한 분입니다. 

그런 분이어서 녹차에 대한 나의 그동안의 실험적 연구를 전적으로 수용했습니다. 당시 그의 주변에서는 제주도에서는 녹차를 산업화할 수 없다는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설록’으로 대표되는 '녹차 산업'에 수십억이란 큰돈을 투자했습니다. 

녹차 단지 조성 단계부터 나하고 같이 상의했으며, 직접 같이 흙을 파면서 조성했습니다. 그때부터 작고(作故)하기 전까지 50년 가까이 녹차에 대한 나의 연구를 높이 수용했으며, 연구실 제자들 취업도 적극 수용하면서 협조와 협력을 통해 제주 녹차 산업 발전에 같이 매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번은 ‘오설록’ 단지 조성 후 서 회장께서 단지 근처의 토지 수만평을 제 이름으로 등기해서 보내 줬습니다. 그러나 제가 받지 않고 다시 돌려드렸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하고 싶었지만 혼자 할 수 없는 녹차 개발 사업을 같이 했는데, 사업가가 아닌 대학교수로 내 연구를 전적으로 수용해 준 것에 만족해야지, 사업가가 투자해서 가공과 판매를 한 이익을 나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주도의 의식주 향상을 위해 감귤 재배를, 청정 제주 만들기에 도움이 되는 녹차 산업 활성화에 매진한 허인옥 교수를 자택 정원에서 대담하고 있는 홍용락(사진 왼쪽) 고문.ⓒSR타임스
▲제주도의 의식주 향상을 위해 감귤 재배를, 청정 제주 만들기에 도움이 되는 녹차 산업 활성화에 매진한 허인옥 교수를 자택 정원에서 대담하고 있는 홍용락(사진 왼쪽) 고문.ⓒSR타임스

Q. 감귤과 레몬, 제주도에서 생산할 수 있는 녹차 개발과 연구 이외의 사회적 활동은 어떤 것이 있었나요?

== 감귤, 레몬, 유자, 키위, 녹차 등 내 전문 분야에 있어서는 현장에서 농민들과 함께 재배 생산 기술 지도를 제 나이 20대부터 지금까지 해 오고 있습니다.

또 대학 교수를 하면서, 1970년대부터 ‘자원 식물학’ ’식물 영양학’ 같은 강좌를 전국에서 최초로 제주대에서 개설해 이론과 현장을 보완하며 연구개발을 했습니다.

물론 교수 신분이다 보니까 제주도의 감귤, 녹차, 레몬 같은 특화 작물의 정책적 방향성에 대해서도 평생 정책 자문을 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전공과 직접 관련 없는 시민단체 활동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 같이 제주 경제정의실천 시민연합(경실련) 대표를 10년 한 적이 있습니다.

경실련은 권력과 사회적 불의에 맞서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시민사회 봉사 단체입니다. 1990년대 말부터 한 10년 동안 5차례 대표를 맡아 봉사했습니다.

시민단체이기 때문에 1년에 제 주머니에서 많은 돈을 단체에 적립하면서 봉사했습니다만, 바른 주장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방송사의 시청자 위원(장)으로 40~50년 이상 봉사해 왔습니다. 3년 전인가요? 제주 KBS 방송 시청자 위원장을 자진해서 그만두었습니다. 언론이 사회적 공기(公器)가 되어야 함은 모든 분이 원하는 것입니다.

특히 제주도민의 공적인 이익과 객관성, 타당성을 위한 언론의 역할을 비판도 하고 주문도 많이 한 시간이었기에 나름대로 보람도 컸습니다.

 

(제주에서 태어나 한 세기 가까이 제주도를 위해 살면서, 제주지역의 궁핍한 의식주를 개선 하기 위해서 감귤과 녹차 재배로 제주의 생활과 이미지를 변화시킨 주역을 만나본 시간이었다.

허 교수 개인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살고 있는 터전을 위해 진정성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 궁극적으로는 보람 있는 인생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분이라고 보였다.

또 한 개인이 이러한 보람을 가지기에는 본인의 욕심부터 절제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도 이 인터뷰를 통해 배웠다.

▲ⓒ홍용락 논설고문
▲ⓒ홍용락 논설고문

제주도 녹차 산업 발전을 위해 본인이 잘할 수 있는 생산과 개발 분야 이외의 가공과 판매를 통한 이익 창출의 몫은 동역(同役)한 기업인 태평양화학과 창업 회장 몫으로 흔쾌히 양보했다.

결과적으로 당시는 녹차 재배지로는 가망성이 없는 평가를 받은 제주가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고급 녹차 생산 지대가 되었다.

허 교수는 고(故) 김종필 국무총리가 1960년대 말부터 제주도에 만든 대단위 감귤 농장에 기술고문으로 참여하면서도 같은 역할이 반복되었다.

즉 ‘제주 운정(雲庭) 농장’에 관여한 것도, 당시의 최고 권력자를 통해 제주도 특산물인 감귤에 대한 정책적 확장성을 높이는 계기로 활용했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범인(凡人)들 같으면 권력자를 통해 본인의 현실적 욕심 추구를 우선 했을 것이다.

허 교수는 1980년 10.26 후 만들어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불려 가 6개월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조사 결과 생산성 높은 감귤 단지 조성을 위해 노력한 것 이외에 개인적 이익을 사취한 부분은 전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다.

오히려 ‘제주 운정 농장’ 등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운정(雲庭)장학회를 통해 제주도 출신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선해서, 미래의 제주도 발전을 위한 인재 육성에 기여한 점이 조사관들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말한다.

허 교수가 마련한 장학금으로 어려운 가정형편에서도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진홍기 변호사(전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허 교수님이 장학금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웠던 내가 공부를 할수 있었고, 오늘날 사회적 역할도 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또 진 변호사는 "허 교수 본인은 관심 있는 제주 생태계에 적합한 식물 연구와 교육활동의 본분에 충실한 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세대에서는 제주도의 정신적 지도자 몇 분 중에 한 분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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