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정근 변호사 ⓒ SR타임스
▲ 황정근 변호사 ⓒ SR타임스

살다보면 억울한 일이 많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대법원 판례가 변경된 경우일 것이다. 과거에,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임무에 위배하여 본인을 기망하고 착오에 빠진 본인에게서 재물을 교부받은 경우, 사기죄만 성립하고 배임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판례가 있었다(1983. 7. 12. 선고 82도1910 판결). 이 판례는 판례공보에도 실려 있는 중요판결이다. 사법연수생 시절에 자치회 차원에서 판례공보를 책 형태로 복사 제본한 것으로 공부하였다. 1년 치 판례공보를 두 권 정도로 합치면 두툼한 책이 된다. 형사재판실무 시험에서 죄수(罪數)를 물어보는 것은 변별력도 있어 당연히 예상문제였다. 그러니 1984~1985년에 연수원을 다닌 필자 기수에서는 1983년의 위 대법원 판결은 시험에 나올 가능성이 높은 판례였다.

실제로 위 판결이 형사재판실무 시험에 출제되었다. 그런데 공부가 소홀했던 나는 법조경합설을 취한 판례가 있다는 것이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판례를 모르는 나는 용감하게도 뭐 이렇게 쉬운 문제를 다 냈나 하고 생각하면서 ‘사기죄와 배임죄의 상상적 경합’으로 판결문을 써냈다. 시험을 보고 나서 동료들과 대화하다가 판례가 있는데 그것도 몰랐냐는 핀잔을 들었다. 친구의 말을 듣고 찾아보니 과연 1983년 판례는 법조경합이라고 판결했다. 최신 판례를 미처 공부하지 않았던 내가 부끄러웠다. 당연히 나의 답안은 오답(誤答)으로 처리되어 감점을 받았다.

나는 판례를 못 외운 것이 부끄러웠지만, 그 판례의 법리는 도저히 수긍이 가지 않았다. 1개의 행위에 대하여 사기죄와 배임죄의 구성요건이 모두 구비된 경우는 당연히 상상적 경합이지 어떻게 법조경합이란 말인가? 대법원 판례가 있다손 치더라도 반대의 다른 법리도 가능하다면 모두 정답으로 처리 되어야 하지 않을까? 판례 암기식 출제는 지양하고 리걸 마인드를 테스트하는 시험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식의 자기합리화를 아무리 해본들 이미 오답 처리된 것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세월이 흘러 2002년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할 때다. 당시 재판연구관들은 점심 식사 후 12층 휴게실에 삼삼오오 모여 각자가 고민하고 있는 각종 현안을 토론의 시장에 내놓는다. 동료 연구관이 위 1983년 판례가 잘못되어서 상상적 경합으로 판례를 변경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연수생 시절 판례를 몰라 시험에서 틀렸던 나는 그러면 그렇지 하고 맞장구를 쳤다. 대법원 2002. 7. 18. 선고 2002도669 전원합의체 판결은 13인 전원일치로 상상적 경합설을 취하여 위 1983년 판결을 변경하였다. 나는 비로소 명예회복이 되었다.

변호사와 검사가 잘못된 판례의 변경을 과감하게 주장하고, 판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판례와 다른 판결을 용기 있게 선고하는 것은 법률가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법률문화는 그렇게 발전하는 것이다. 

<바른선거문화연구소장. hwang08442@daum.net>

 

[황정근 변호사 경력]

2015.03 ~             황정근법률사무소 변호사
2004.03 ~ 2015.02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2002 ~ 2004         대법원 재판연구관 부장판사
2000 ~ 2002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 부장판사
1998 ~ 2000         서울고등법원 판사
1996 ~ 1998         법원행정처 송무심의관
1996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 판사
1993 ~ 1996         대전지방법원 서산지원 판사
1991 ~ 1993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판사
1989 ~ 1991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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