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의 해부'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추락의 해부'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냉정하게 난도질하는 승자 없는 슬로우 버닝 스릴러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추락의 해부’는 제76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으로,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 감독상(쥐스틴 트리에), 여우주연상(산드라 휠러), 각본상, 편집상 후보에 올라 크게 주목받고 있는 웰메이드 영화다. 

특히 주연을 맡은 독일 출신 배우 산드라 휠러는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음향상,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른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도 출연했다. 그녀가 참여한 두 작품 모두 아카데미 주요 부문에서 강력한 수상 후보로 발표되어 경쟁을 벌이게 된 상황이다.

‘추락의 해부’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인 산드라 휠러에 의해 대부분의 플롯이 견인되는 영화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살인 용의자로 지목되는 작가 산드라의 내외를 치열하게 연기해 낸다.

▲'추락의 해부'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추락의 해부'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이 리뷰에는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래퍼 ‘50센트’가 2003년 발표한 ‘P.I.M.P.’(이 곡에서 Pimp는 바람둥이, 멋쟁이를 의미한다.)는 허세와 자의식이 지나칠 정도로 충만한 가사와 카리브해 음악 감성의 스틸 드럼 연주가 곁들여진 강렬한 리듬감을 가진 곡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난 죽여주는 멋쟁이’라는 후렴구가 반복되는 이 곡은 자존감 높은 갱스터 라이프 스타일을 칭송한다. 래퍼 ‘스눕 독’(이 영화에 나오는 개의 이름도 스눕이다.)이 피처링에 참여했다.

멀리서 자신을 찾아온 학생과 교감을 나누던 작가 산드라(산드라 휠러)는 위층에서 들려오는 짜증이 날 정도의 소음에  인터뷰를 중단한다. 남편 사뮈엘(사뮈엘 테스)이 집이 들썩일 정도로 스피커 볼륨을 잔뜩 올려  ‘P.I.M.P.’ 연주곡 버전을 틀어놨기 때문이다. 

▲'추락의 해부'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추락의 해부'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사뮈엘은 도입부에서 조금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고로 시각장애를 갖게 된 아들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라너)이 반려견 스눕(메시)와 함께 눈밭 위에 추락해 있는 그의 시신을 발견하기 전까지 사뮈엘의 존재는 완전히 베일에 싸인 채 관객의 상상력 안에 머물러있다.

차디찬 검시대에 오르고서야 사뮈엘은 아내와 아들 그리고 주변인의 입을 통해 유령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의 죽음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이 영화는 한때 서로를 절실하게 사랑했던 국제결혼 부부의 관계 변화, 가족 해체 과정을 관객들이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매우 현실적이고 건조한 형태의 다큐멘터리 앵글을 택한다. 특별한 미장센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보이는 그대로를 카메라에 담는다. 음악 역시 현장 안의 음향을 사용해 현실 요소로 스며들도록 인위적인 부분을 최소화했다. 

▲'추락의 해부'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추락의 해부'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영화의 전반부에서는 과연 산드라가 남편 사뮈엘을 살해한 것인지 아니면 사뮈엘 스스로 추락해 자살을 선택한 것인지 열띤 추궁과 의심, 반박과 변호가 오간다. ‘12인의 성난 사람들’(1957)과 같은 법정물 장르로서 매우 절제되고 정적인 앵글의 법정 시퀀스를 담아 방청석에 앉아있는 듯한 몰입감을 준다. 하지만, 관객은 이내 사뮈엘의 죽음이 자살인가 타살인가 진실을 밝히려는 이 법정 공방에 큰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야기가 종극을 향해 갈수록 가족 구성원 각자의 입장과 감정을 살펴보는 것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추락의 해부'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추락의 해부'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사뮈엘은 교수가 아닌 작가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집필 작업은 지지부진했다. 다양한 문제를 스스로 끌어안고 있던 그는 집필할 시간이 없다며 고민을 토로해보지만, 아내 산드라는 핑계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이미 작가로 성공한 아내 앞에서 자존감은 심하게 쪼그라들어있으며, 양성애자인 그녀와의 불화 원인에 대해서는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들에 대한 죄책감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다. 홈스쿨링을 자청한 것도 그러한 이유였을 것이다.

▲'추락의 해부'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추락의 해부'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극 중 내내 사뮈엘은 자승자박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때때로 서서히 침몰해가는 망령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마초이즘으로 충만한 ‘P.I.M.P.’를 들으며 젊고 자유롭고 패기 넘치던 옛시절의 자신을 수없이 회상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가족 안에서 반려견 스눕보다도 순위가 낮은 건 아닐까?' 그는 전기톱을 켜기 위해 다락방 위로 한 발 한 발 오를 때마다 자괴감을 느끼며 정신적 심연 속으로 반복해 추락해갔을 것이다.

산드라를 관통하는 단어는 고립감이다. 독일 출신인 그녀는 고향을 떠나 런던에 머물던 시절이 가장 좋았지만, 어쩌다 보니 프랑스인 남편을 따라 외딴곳에 자리를 잡았다. 한때 남편을 열렬히 사랑해 결혼을 했고, 소중한 아들 다니엘도 낳았다. 하지만 둘 사이는 다니엘의 사고 이후 크게 달라졌다. 부부는 자주 다퉜고 식사조차 한 테이블에서 하지 못할 사이가 됐다. 

▲'추락의 해부'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추락의 해부'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그래도 그녀는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양보하고 배려해왔고 하자는 대로 따랐다. 언어적인 어려움도 감내하며 지냈다. 그러나 마치 촌구석 감옥에 수감된 이방인이 된 듯한 불만에 가득찬 결혼 생활만 남았다. 모두 남편 때문이었다. 봉합할 수 없는 부부 관계의 간극 사이에서는 끝없는 증오와 분노가 스며 나와 계속 곪아가고 있었다. 

산드라는 언제나 진실과 허구를 섞어 작품을 발표해 왔다. 법정에서 검사(앙투안 레이나츠)는 그녀의 작품 중 일부 내용에 남편에 대한 적의가 있어보인다는 점에 주목한다. 표절 문제로 계속 다퉈왔다는 점 또한  불리한 정황으로 다뤄진다. 모든 것을 종합해 봤을 때 사건 당일 정황은 우발적인 살인의 가능성도 충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불균형했고 불행했다. 이 이야기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비극적인 부분은 아들 다니엘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진실이 무엇이든 결론이 어떻게 나든 다니엘은 해체된 가정의 최대 피해자로 남게 된다. 죽은 아빠에게는 원망과 그리움을 동시에 느끼게 될 것이며, 엄마의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그녀를 죽을 때까지 평생 의심해야 할지도 모른다. 

▲'추락의 해부'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추락의 해부'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산드라는 변호사 뱅상(스완 아를로)과 법정 밖에서 이따금 미묘한 감정을 보이지만, 로맨스로 향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가 죽은 남편과 너무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추락의 해부’는 가정불화가 극단적인 형태로 발화해 그 불꽃이 서서히 가족 상호작용과 신뢰 관계를 소각해나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다룬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인 부부 관계가 타인의 도덕적 판단과 사법적 틀 사이에 놓였을 때 어떻게 발가벗겨져 가는지 그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한다. 가족의 해체를 냉정한 난도질로 회피 없이 발골해 관객 앞에 펼쳐내는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연출은 승자 없는 슬로우 버닝 스릴러의 정점을 보여준다.

P.S. 프랑스어와 영어로 번갈아 나오는 대사의 양이 상당하다. 자막만으로는 모두 전달되지 않는 영화적 체험이 있을 수 있다. 훌륭한 감정 연기로 이루어진 한국어 더빙 버전으로도 만나보고 싶은 영화다.

▲'추락의 해부'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추락의 해부'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목: 추락의 해부(Anatomy of a Fall)

출연: 산드라 휠러, 스완 아를로, 밀로 마차도 그라너, 앙투안 레이나츠, 사뮈엘 테스, 메시

연출: 쥐스틴 트리에

각본: 쥐스틴 트리에, 아서 하라리

수입: 그린나래미디어

제공/배급: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공동제공: 키노라이츠

러닝타임: 151분

국내개봉: 2024년 1월 31일

상영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평점: 8.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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