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절제된 감정으로 시간을 초월해 조각한 아름답고 애절한 기억의 필름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셀린 송 감독의 장편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는 서로에게 첫사랑이었던 두 사람이 24년 만에 뉴욕에서 다시 만나 끊어질 듯 이어져 온 인연을 돌아보는 이틀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아름다운 영상미와 음악, 감각적인 연출, 한국적 정서를 담아낸 이 로맨스 영화는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과 각본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다.

(이 리뷰에는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2살 초등학교 동급생 해성(임승민)과 나영(문승아)은 서로에게 첫사랑이다. 둘은 어른이 되면 결혼해 함께 가정을 꾸릴 것을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나영은 부모의 손에 이끌려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 그렇게 노벨 문학상을 타고 싶은 첫사랑 나영은 해성 곁을 떠나간다.

나영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시간과 노라(그레타 리)라는 새 이름으로 살게 된 세월이 서로 비슷해지는 동안 그녀의 꿈도 노벨상에서 퓰리처상으로 바뀌어 간다. 그리고 문득 이름도 희미해진 첫사랑 해성을 떠올린다. 서툴게 한글을 타이핑하며 해성을 찾아나가는 '노라'. 24살이 된 대학생 해성(유태오) 역시 '나영'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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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이 지나 어른으로 변신한 두 사람. 작은 노트북 화면 속 서로의 모습이 낯설다. 그래도 둘의 감정은 첫사랑 시절 그대로였다. 서울의 낮과 뉴욕의 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닿을 수 없는 거리에 놓인 두 사람의 감정은 애절하기만 하다. 하지만 공간을 뛰어넘을 용기가 없는 두 사람은 랜선 연애를 끝내고 다시 이별한다.

다시 12년이 흐르고 노라와의 인연을 잊지 못하고 지내던 해성은 용기를 내 뉴욕에 살고 있는 그녀를 찾아가는데...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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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환적인 사운드트랙과 아름다운 미장센 안에 담긴 동양 사상

셀린 송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패스트 라이브즈’는 기본적으로 이민자 소재의 디아스포라 영화지만, 기존 작품들과는 조금 결을 달리한다.

룰루 왕 감독의 ‘페어웰’(2019),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2020), 앤소니 심 감독의 ‘라이스보이 슬립스’(2022) 등의 작품은 이민자의 고단한 삶이나 고국을 떠나온 이들의 정체성을 주요 테마로 삼는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아련한 노스텔지어와 동양적 정서를 담은 로맨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로맨스물이라는 점에서 ‘패스트 라이브즈’는 피터 손 감독의 ‘엘리멘탈’(2023)을 연상하게 한다. 밑바탕은 이민자의 이야기지만, 인종과 문화를 넘어선 보편적인 소재인 로맨스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는 서로 닮아있다. 하지만, 연출의 방향과 뽑아내는 감정의 색깔은 다르다. 

이 영화의 가장 매혹적인 부분은 몽환적 사운트트랙이다. 음악을 통해 전달되는 감성의 울림이 정말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울러 모든 프레임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카메라 구도와 미장센, 섬세하고 정밀한 편집으로 감정의 폭발과 깊은 여운을 완전하게 완성된다. 유일한 단점은 한국에서 생의 대부분을 살아온 한국인만이 느낄 수 있는 ‘한국적인 것들’에 대한 미묘하고도 어색한 뉘앙스일 것이다.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서양권에서 이 작품에 크게 주목하고 있는 이유는 로맨스 서사 안에 깊게 담겨있는 동양 사상과 서로의 손가락조차 닿기를 망설이는 인물들의 순수하고 정적인 여백의 감수성 때문일 것이다.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한국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모든 만남과 헤어짐이 전생의 깊은 인연에서 비롯됐다는 불교의 타생지연(他生之緣)에서 유래된 말이다. 불교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을 겁(劫)이라고 한다. 서로 옷깃만 스치려 해도 500겁, 하룻밤을 같이 자려면 6,000겁, 부부가 되려면 7,000겁의 선한 인연을 쌓아야 한다. 동양권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내세의 안녕을 염원하려는 낯설지 않은 실천덕목이지만, 서양권에서는 신비롭게 느껴지는 부분일 것이다.

억겁의 세월 동안 숙명에 이끌려 살아온 사람들이 어색함과 설렘을 안고 새벽 4시 뉴욕의 술집이라는 중간계에서 만난다. 그리고 각자 자신이 가지 않은 길들을 떠올린다.

12살의 해성과 나영이 그대로 한국에 있었다면, 24살의 해성과 노라가 다시 만났다면 둘은 결혼했을까 아니면 헤어졌을까?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방해할 수도 들어갈 수도 없는 두 사람의 공간에서 밀려나 소외된 아서(존 마가로)는 술잔만 만지작거린다. 만약 노라와 만나지 못했다면 아서에게도 또 다른 인연이 찾아왔을 것이다. 부부의 내밀한 필로 토크 신과 대비되는 이 정서적 네토라레 장면에서는 미묘한 감정이 일렁인다.

셀린 송 감독은 절제된 감정으로 시간을 초월해 조각한 아름답고 애절한 이 기억의 필름 안에 현재의 사랑, 과거의 노스텔지어, 미래의 인연을 그려낸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 12살 해성과 자신을 남겨두고 다시 현재로 돌아온 노라는 오르지 못했던 계단을 오른다. 해성은 자신의 어깨에 기대었던 12살의 나영을 다시 만날 수는 없다. 그녀를 가슴에 묻어 봉인하고 미래를 향한다.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그렇게 24년 전 낮의 오르막 골목길과 24년 후 밤의 갈림길에서 이 플라토닉 러브는 드디어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억겁 후의 재회를 기약한다.

“잘 가 그리고 또 만나.”

P.S. 어쩌면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고 잊고 지내거나 혹은 완전히 잊고 싶었던 자신만의 ‘패스트 라이브즈’를 소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제목 :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

감독 : 셀린 송

출연 : 그레타 리, 유태오, 존 마가로

투자 : A24, CJ ENM

배급 : CJ ENM

개봉 : 2024년 3월 6일

러닝타임 : 105분

관람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스크린 리뷰 평점: 7.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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