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인
▲고은 시인

- 재판부, "최영미 시인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되며, 허위라 의심할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

[SR(에스알)타임스 심우진 기자] 최영미 시인(58)이 제기한 고은 시인(86 본명: 고은태)의 성추행 의혹은 사실로 인정된다고 법원이 판단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4부(이상윤 부장판사)는 15일 고은 시인이 최영미 시인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이같이 판결했다.

고은 시인의 성추행 논란은 최영미 시인이 2017년 겨울에 발간된 문학지 ‘황해문화’ 97호에 기고한 시 '괴물'에서 그를 암시하는 원로 시인의 과거 성추행 행적을 고발한 사실이 지난해 2월 알려지면서 확산되었다.

시 '괴물'은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라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시에 표현된 ‘En선생’은 고은을 지칭한 것이었다.

 

최영미 시인은 시 ‘괴물’과 관련 고은 시인의 성추행 논란이 확산된 이후에도 방송 뉴스에 출연해 원로 시인의 성추행이 상습적이었다고 주장했다. 한 인터뷰에서는 “그가 술집에서 바지 지퍼를 열고 신체 특정 부위를 만져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고은 시인의 성추행 논란이 확산되자 지난 해 2월 서울시는 서울도서관 내 고은 기념공간으로 조성되었던 ‘만인의 방’을 철거했다.

고은 시인은 이 같은 의혹을 부인하며 10억여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당사자들의 주장과 증인들의 진술, 증거 등을 검토한 결과 최영미 시인이 "1994년 한 주점에서 고은 시인이 부적절한 행위를 했다"고 폭로한 내용은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최영미 시인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되며, 제보한 동기와 경위 등을 따져보면 허위라 의심할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최 시인은 고은 시인의 문단 내 지위와 폭로 후 불이익 등이 두려워 알리기를 주저하다가, 다수의 목격담이 나오고 기사화가 이뤄졌음에도 원고가 별다른 자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자 제보를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당시 최 시인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고, 주변 사람들 사이에 고 시인의 기행을 어느 정도 묵인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그날 사건 이후 최 시인이 관계를 단절하지 않고 술자리에 합석하거나 통화하는 등 관계를 유지했다고 해서 진술 신빙성을 배척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그러나 박진성 시인이 자신의 블로그에서 "2008년 한 술자리에서 고은 시인이 동석한 20대 여성을 상대로 성추행을 했다"고 주장한 내용은 허위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박진성 씨가 법정에 나오지 않고 진술서만 제출했는데, 당시 동석한 여성을 특정하지 못하는 점 등 사정을 종합하면 이 주장이 허위라고 하는 원고 측의 주장은 수긍할 만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허위 주장으로 원고가 사회적 평가가 저하되고 정신적 고통을 받은 점, 블로그에 올린 내용과 표현방법 등을 고려하면 원고가 청구한 금액 1천만원을 전부 인정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최 시인과 박 시인이 주장한 내용을 보도한 언론사와 기자들에게는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저명한 문인으로 문화예술계에 영향력 있는 인물인 원고에 대한 의혹 제기는 국민의 관심사로 공공 이해에 관한 사안"이라며 "위법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페이스북에 올린 최영미 시인의 입장문
▲페이스북에 올린 최영미 시인의 입장문

선고 후 최영미 시인은 페이스북에 올린 입장문을 통해 "이 땅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준 재판부에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최 시인은 "성추행 가해자가 피해자를 뻔뻔스럽게 고소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면 안 된다"며 "진실을 은폐하는 데 앞장선 사람들은 반성하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최영미 시인이 올린 글의 전문이다. 

"원고 고은태의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한다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제가, 우리가 이겼습니다! 이 땅에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재판부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진실을 말한 대가로 소송에 휘말렸습니다. 다시는 저와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성추행 가해자가 피해자를 뻔뻔스레 고소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면 안 됩니다.

진실을 은폐하는데 앞장선 사람들은 반성하기 바랍니다.

저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문단의 원로들이 도와 주지 않아서, 힘든 싸움이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제보해준 사람들, 진술서를 쓰고 증거 자료를 모아 전달해준 분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지지가 없었다면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미투시민행동을 비롯한 여성단체들 , 그리고 사명감과 열정이 넘치는 훌륭한 변호사님들을 만난 행운에 감사드립니다.

저를 믿고 흔쾌히 사건을 맡은 여성변호사회의 조현욱 회장님, 준비서면을 쓰느라 고생하신 차미경 변호사, 안서연 변호사, 장윤미 변호사, 서혜진 변호사님. 참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은 시인의 성추행 폭로의 발단이 된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을 다시 올린다.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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