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슬립' 김태훈 감독. ⓒ찬란
▲'빅슬립' 김태훈 감독. ⓒ찬란

 

“영화 속 모든 인물에게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봄날은 간다’, ‘8월의 크리스마스’ 느낌의 로맨스 영화 구상 중”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김태훈 감독은 단편 ‘물수제비’(2006)로 데뷔한 이후, '인디포럼 2014' 폐막작으로 선정된 ‘명희’(2014)를 선보여 영화계에 이름을 알렸다. 22일 개봉하는 신작 ‘빅슬립’은 그가 작업한 첫 번째 장편 데뷔작으로, 10대들을 대상으로 한 예술강사로 일하던 당시의 경험을 녹여낸 영화다.

SR타임스는 최근 서울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김태훈 감독을 만나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터뷰에는 영화의 내용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Q. 제목을 ‘빅슬립’으로 정하신 이유가 궁금하다.

이 영화의 시작이 제가 가르친 한 아이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친구에게 영화를 빌려 잠이라는 선물을 해야겠다라는 게 첫 취지였고 그래서 잠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올랐어요. 그리고 어떤 잠이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불현듯이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제목이 마음에 끌리더라고요.

근데 그 소설의 제목이 죽음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이 영화가 가는 방향이 그냥 단순히 위로를 전한다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의미 확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제 입으로 말하면 뭔가 의미가 희석되는 것 같아서 계속 한 번도 얘기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시사회 때 관객 한분이 잠든 두 사람 모습에서 위안을 받지만, 사회적으로는 이 두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시스템에 대한 문제점을 짚고 있는 듯한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그런 의미적 확장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 영화에 가지고 오지는 못하기 때문에 영화적인 세계관을 구상할 때 폭력적인 기영(김영성)과 길호(최준우)의 아버지가 만든 세상을 영화적인 세계로 그리자고 최초에 생각했습니다.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회라는 건 이 영화 속 세상을 뜻하기도 합니다. 

Q. 폭력적인 아버지의 세계 속에 나오는 공장 사장은 어떤 존재인가.

폭력적인 아버지가 만든 이 세계관의 끝에 폐기물이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반장과 사장 등등 모두가 기영에게 또 다른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이라고 상상하면서 썼던 것 같습니다. 

기영도 길호를 따뜻하게 품고서 아버지가 되려 하지만, 벽에 부딪혀 실패하면서 친구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각본 쓸 때는 그랬는데 관객분들은 아마 각자 다르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빅슬립' 김태훈 감독. ⓒ찬란
▲'빅슬립' 김태훈 감독. ⓒ찬란

Q. 까칠한 기영과 적극적인 초은(이랑서)의 관계가 알콩달콩한 로맨스로 느껴졌다.

기영은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 하지 않고 여성성이 결핍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초은이라는 여성을 만나면서 아버지와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극복하느냐하는 게 하나의 테마였던 것 같아요. 초은과 기영을 연인으로 그리지 않더라도 동료로 그려지기를 바랐었습니다. 

그런데 배우들에게는 우리가 아무리 동료애라고 해도 관객분들은 사랑이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어쨌든 우리 안에서는 동료애라고 생각하면서 가봅시다라고 했죠. 

Q. 앞으로 로맨스 영화를 연출해볼 의향은 없으신지.

제가 만든 모든 영화의 기본 베이스가 사실은 로맨스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서로가 서로를 걱정해 주거나 애잔하게 생각하는 그런 마음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꼭 로맨스 영화를 한번 찍어보고 싶습니다. 현재 어느 정도 트리트먼트로 써놓은 것은 있어요. 허진호 감독님의 ‘봄날은 간다’,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느낌인데 기회가 된다면 열심히 해보려고 합니다.

Q. 앞서 이번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힘들었다고 밝히셨다.

이 영화의 시작은 아이들과의 만남이었고 저 자신을 많이 반추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의 어린 시절이나 저 자신의 위치를 늘 확인하고 있었죠. 그런 과정에서 만약 영화를 그만둔다면 언제 그만둬야 될까하고 고민하고 있던 차에 그만둘 거면 마흔을 기점으로 깨끗하게 포기를 해야겠다 했죠. 나중에 그냥 그만뒀을 때 저 자신에게 좀 미안할 것 같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장편 영화를 한번 도전해 보자했습니다. 

운이 좋게도 영화진흥위원회와 경기영상경기콘텐츠진흥원에서 지원을 해주셔가지고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2019년에 코로나가 터졌어요. 영화를 엎어야 된다라는 의견도 있었죠. 하지만 저는 지금 우리가 멈추면 앞으로 이 영화는 세상에 없을 거다. 용기 내서 그냥 한번 부딪혀보자하고 영화를 시작하게 된 겁니다.

결론적으로 굉장히 힘들었죠. 코로나 때문에 일단 지자체에서 협조받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심지어 촬영분 배경에 일반분들이 찍히면 전부 마스크를 쓰고 있으시니까 다 폐기해야 될 정도였어요. 어떤 배우분은 코로나 밀접 접촉자 판정으로 앞부분 촬영을 못쓰고 다른 분을 다시 캐스팅해서 재촬영해야 했습니다. 그런 과정이 계속 겹치다가 보니 제작비도 후반 촬영에 가서는 다 소진됐어요. 은행대출을 받고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고 수업을 하면서 비용 충당을 했어요. 그리고 마지막 촬영 이틀 뒤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시기를 굉장히 힘들게 보냈습니다.

기자간담회 때 굉장한 고립감을 느꼈다고 말씀드렸었는데 정신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쉽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두문분출했었죠. 스태프들, 배우들 그리고 지인들에게 연락하기가 너무 미안하더라고요. 그 상황들이 지나고 부산영화제 상영 소식을 듣고 뭔가 벅차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도 할 수 있었습니다.

▲'빅슬립' 김태훈 감독. ⓒ찬란
▲'빅슬립' 김태훈 감독. ⓒ찬란

Q. 많은 분들이 ‘빅슬립’을 봐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클 것 같다.

시나리오를 처음 썼을 때 이 영화가 실제 개봉되리라고는 상상 하지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 그리고 제가 만나왔던 아이들에 관한 생각을 표현하고 싶었죠.

그래서 관객분들을 직접 만나뵙고 정말 진심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어떤 생각을 했고 이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런 의미와 감정들을 진심으로 나누고 싶다.

Q. 극중 몇몇 캐릭터에 관해서는 전사 설명이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다고 본다. 특히 기영의 새어머니 캐릭터 설정이 궁금하다.

새어머니는 아버지가 만든 세상의 최대 피해자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짧게 등장하죠. 어떻게 하면 이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짧지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입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을 했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어떤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시나리오를 썼어요. 새어머니 경우는 스스로 이곳을 떠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그리고 기영이라는 인물이 여전히 아버지와 같은 행세를 하죠. 그래서 새어머니의 뒷부분에서만큼은 기형에게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Q. 새어머니는 충분히 떠날 수 있는데 다시 돌아왔다. 폭력에 길들어져 새장의 새처럼 도망가지 못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게 정확한 해석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툼이 있지만 결국에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그곳에 늘 있었던 존재이기에 그것이 더 사실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새어머니에게 영화적으로 자유를 주고 더 큰 선물을 줄 수도 있었죠. 하지만 그게 아니라 우리네 인간사를 그대로 투영하면서 동시에 그 인물이 빛나는 순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고민했을 때 그냥 새어머니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라는 것까지가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이라고 생각했어요.

Q. 새어머니가 악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기영은 아줌마라고 부른다. 어떤 설정인가. 

아버지가 다른 여자인 새어머니를 만나 이혼하거나 혹은 이혼 안 했을 수도 있다고 저는 생각 했어요. 기영은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청소년기를 보냈고 그래서 새어머니가 미울 수밖에 없죠. 하지만 그분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기영도 생각하기 때문에 그 두 가지가 부딪히는 거죠. 그래 이럴 수도 있지, 내가 미워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근데 그러지 말자 하는 것들이 마음을 왔다 갔다하죠. 그래서 기영이라는 인물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영은 사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성격과 겉모습을 되물림 받았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운명에 맞서는 사람이기도 하다라고 김영성 배우와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빅슬립' 김태훈 감독. ⓒ찬란
▲'빅슬립' 김태훈 감독. ⓒ찬란

Q. 영상미가 상당히 좋다. 보통의 독립 영화들보다 더 공을 들인 느낌이다.

촬영 감독님, 미술 감독님, 조명 감독님 등 스태프들이 마음부터 금전적인 것까지 다 쏟아부은 작품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영화계는 누가 촬영한다고 하면 가서 도와주기도 하고 상부상조의 개념이 굉장히 강하잖아요. 그래서 여기에 자기들이 받아야 될 본인 돈도 들어간거죠. 마음의 빚도 지고 진짜 빚도 지고 그렇게 만드는 영화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고마우면서도 굉장히 미안하기도 하죠.

Q. 음악에도 공을 많이 들인 느낌이다. 잠들기 전이나 명상할 때 듣는 음악 같다.

후반작업을 거의 2년 동안 했습니다. 이왕 하는 거 후회하지 않을 만큼 해보자라는 마음이어서 감독님들이 굉장히 열의를 가지고 끝까지 해내셨다고 생각해요. 음악 같은 경우는 거의 제가 이틀에 한 번꼴로 도시락을 싸들고 감독님이 계신 강화도로 찾아갔습니다. 둘이 같이 논밭을 산책하고 같이 밥 먹고 밤새우며 계속 몇 개월에 걸쳐서 만든 음악들이에요.

음악을 만들면서도 영화에 대한 많은 얘기와 그리고 감정적인 소통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분들의 태도 역시 이 영화 속에 굉장히 많이 녹아 들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영화에서 심장 소리가 들리는 장면에는 어떤 연출 의도가 숨어있나.

이 영화를 만들면서 등장 인물의 불행을 다룬다는 게 굉장히 조심스러웠어요. 그들의 슬픔을 영화를 통해서 덧나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범죄라든지 이런 부분들을 직설적으로 다루고 싶지 않아서 돌려돌려 이야기를 했고 대신 이 아이의 감정, 정서 이런 것들을 좀 더 영화적으로 전달해보자라는 얘기를 후반 작업때 사운드 감독님, 음악 감독님과 이야기했고 그게 소통이 된 거예요.

심장 박동 소리를 넣으면 관객들에게는 체험이 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마지막에 길호가 아이들과 헤어져서 돌아오는 장면에서는 베이스가 쾅쾅쾅 하면서 정말 용기 내서 돌아섰다라는 음악적 연출이 들어갑니다. 그게 저희 세 작업자의 협업을 통해서 만들어낸 방식이었습니다.

▲'빅슬립' 김태훈 감독. ⓒ찬란
▲'빅슬립' 김태훈 감독. ⓒ찬란

Q. 아이들이 광부처럼 머리에 렌턴을 달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은 장면의 연출 의도도 궁금하다.

제가 한때는 이태원 언덕배기에 테이블 하나 펼쳐놓고 지나가는 청소년들을 붙잡고서 수업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수업 이름이 라이트 페인팅이었거든요. 아이들이 렌턴을 들고 카메라 앞에서 그림을 그리면 장노출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었어요. 

그 수업을 짰을 때는 제가 렌턴이라는 빛을 들고서 어둠 속에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거였는데 반전이 일어난 거예요. 어둠이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이 그 빛을 저한테 비추고 있다는 생각이 굉장히 강렬하게 들었죠. 마치 영사기에서 쏘는 빛 같고 영화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어둠이 아니라 빛으로 표현하고 싶었고 ‘빅슬립’을 쓰면서 아이들을 어둠으로 묘사하지 말고 빛으로 묘사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나중에 빛이 산란하는 장면은 아이들이 나 여기 있다고 손짓하는 듯한 느낌을 생각하면서 만들었습니다.

Q. 영화 속 학교 밖 아이들은 교실 맨 뒷줄에 앉아있는 일진보다 더 착한 것 같다.

제가 수업을 하면서 학교 밖 청소년들 혹은 가출 청소년들에게 다가가는 게 쉽지 않고 힘든 환경에 있는 아이들에 대한 선입견도 있었어요. 근데 오랫동안 아이들을 만나면서 섣부른 판단이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입니다.

섣불리 영화 안에서 이 아이들이 정말 나쁜 아이들이다 혹은 좋은 아이들이다라고도 얘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냥 조금 더 지켜봐주셨으면 좋겠고 그런 시간이 우리들에게 필요하지 않냐라는 말들을 계속 전하고 싶었습니다.

Q. 켄 로치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밝히셨는데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저는 제가 감히 켄 로치 감독님과의 비교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켄 로치 감독님의 영화를 늘 좋아했어요. 켄 로치 감독은 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어두운 세상 안에서의 어떤 인간을 그려내는 것에 늘 감동했었거든요. 그런 부분들이 저에게 충분히 영향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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