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대한민국 신문논술대회 대학 일반부

▲ 조문희 씨.
▲ 조문희 씨.

눈 바로 앞에 가슴을 두드리는 ‘고릴라’가 지나가는데도 눈치 채지 못할 수 있을까. 요즘 말로 ‘말도 안 될 것’ 같지만 1999년 하버드대 차브리스 교수의 실험에 따르면 참가자 중 무려 절반 이상이 사람 크기만 한 고릴라를 알아채지 못했다.

실험은 이렇다. 참가자들에게 서로 다른 색의 옷을 입은 팀이 농구공을 패스하는 영상을 보여준 뒤 공이 패스되는 ‘횟수’를 세도록 했다. 사람들이 패스 횟수를 세는 데 정신이 팔린 사이 정작 질문은 “고릴라를 봤는가”를 물었다. 놀랍게도 58%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느 한 가지에 과도하게 사로잡혀 정작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하는 현상. 차브리스는 이를 ‘무주의 맹시’라 칭했다. 허상에 사로잡혀 본질은 보지 못하는 모습을 일컫는다.

요즘 일자리 관련 발표들을 보면 온 사회가 ‘무주의 맹시’에 빠진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어딜 봐도 ‘숫자’가 강조되지, 그 이면을 보려는 시도가 부족한 탓이다. ‘청년실업률 11.2%, 고용률 1.9% 상승’이라는 현상 설명부터 ‘일자리 81만 개 창출, 고용시간 18시간 단축’ 등 해결 방안까지 숫자로 점쳐있다. 이쯤되면 현대 정치가 ‘숫자 민주주의’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양당 체제의 과두제 민주정에서는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는게 중요하기에 선명성이 강조되고, 그를 잘 드러내는게 숫자였다. 누가 81만 개를 외치면 그에 얹어 100만 개를 내놓는 형식이다. 결국 숫자에 집착하면 결과는 포퓰리즘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숫자라는 허울을 거두고 본질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숫자의 ‘함의’가 무엇인지, 우리 경제의 내실을 따져봐야 한다는 의미다. 일각에서는 고용률이 오르고 주가가 연신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낙관적 전망을 내놓는다. 숫자에 기반해서 말이다. 하지만 실상을 따져보면 그 성장이 ‘모두’의 성장이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늘어난 일자리를 단순 아르바이트였고, 주가도 과반이 반도체 사업 일부 덕이였다. 소수가 늘어난 부를 독점하고 나누지 않았단 의미다. 오히려 사내유보금을 늘리고 투자 규모를 줄이기까지 했다.

청년실업률도 마찬가지다. 역대 최고치라고는 하나 실상 일자리는 도처에 널렸다. 지방 중소기업들이 구인난에 허덕이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갈 수 있는 일자리’가 아니라 ‘가고 싶은 일자리’가 없는 것이다.
간극이 생긴 이유는 간단하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했다. 같은 일을 하는데 대기업에 가면 중소기업보다 돈을 세 배를 더 버는 거다. 즉 일자리의 본질은 얼마나 ‘많냐’가 아니라 얼마나 ‘좋냐’가 돼야 한다.

기실 일자리 ‘창출’은 허상에 불과하다. ‘저성장’이 세계적 트렌드가 된 마당에 성장할대로 커버린 한국 사회엔 자원과 기회가 모두 부족한 상황이다. 이럴 땐 늘리기보다 있는 것을 ‘제대로’ 활용하는 게 맞다. 그 길이 ‘포용적 성장’이다. 소수에 집중된 자원을 나누고 다함께 크자는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성장의 과실을 나누는 것이다. 돈이 많아진 중소기업은 임금 등 근로자 처우를 개선할 것이고, 청년들도 중소기업에 눈을 돌려 취업할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의 첨병이라는 IMF조차 “낙수효과는 끝났다”며 필요성을 역설한 개념이기도 하다. 포용적 성장을 위해선 대기업의 납품 단가 후려치기 등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 공정한 시장질서를 확립하는 게 우선이다. 공공일자리 ‘81만개’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고릴라가 가슴을 두드리는 행위는 심각한 위협을 뜻한다. 본질을 보지 못하고 놓쳐버리면 사회에 심각한 위협을 끼친다는 의미다. 일찍이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를 지적했다. 실업난, 환경오염, 테러 등에 최근 일어난 4차 산업혁명까지 사회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다분히 우리 사회의 앞날은 디스토피아적이다. 이런 때 본질까지 놓쳐버린다면 미래는 더 암담해질 것이다. 숫자로 점쳐진 일자리 ‘창출’이라는 허상을 거두고 이면을 살펴보자. 있는 자원이 제대로 활용되고 있는지, 모두가 성장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그것이 고용절벽사회에서 일자리 대책을 논하는 첫 걸음이다. <조문희, 서울여자대학교 방송영상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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