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르센은 5년 만에 산타마리아로 돌아온다. 이웃 도시에 있는 조선소 사장의 외동딸과 결혼해 그의 유산을 물려받고 좌절된 삶을 역전시키려는 속셈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데, 조선소는 이미 파산하여 장부상으로만 존재하는 셈이고 회사에 남은 직원들은 조선소의 물품을 팔아 구차한 삶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우루과이 소설가 후안 카를로스 오네티의 대표작 ‘조선소‘의 등장인물에게서 더 이상 희망은 발견하기 어렵다. 비관적이다 못해 허무하기까지 한 고독과 광기, 좌절의 공간 산타마리아. 그것이 왜 하필 우리 거제·울산의 모습이 되어 다가오는가. ’IMF 위기‘마저 모르고 지나갔다던 ’조선업의 도시’ 거제 아닌가. 그렇게도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던 현대중공업의 울산 아닌가. 그런데 거제 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도 울산 현대중공업도 조선업계의 위기로 지금 죽을 지경이다. 조선소 불빛이 하나 둘 꺼져가고 있다. 사람들은 퇴락한 조선소 마냥 음울한 얼굴로 무기력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조선·해운업 구조조정으로 거제·울산의 지역경제는 위축될 대로 위축됐다.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국무회의에서 그 ‘해법’의 하나로 내수 진작을 위한 국내 휴가를 권했다. 기업 구조조정 본격화에 따른 지역경제의 어려움을 덜어준다는 뜻에서 거제 해금강과 울산 십리대숲을 여름 휴가지로 콕 집어 추천했다. 국무위원을 향해서는 여름 휴가 기간 국내 여행에 솔선수범해 주길 바란다고 했고, 공공기관과 기업들도 가능한 한 국내에서 즐길 것을 권하기도 했다.

대통령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국관광공사는 ‘8월 가볼만한 곳’에 십리대숲을 넣었고, 문화체육관광부는 중앙부처와 경제 6단체에 공문을 보내 십리대숲 방문을 권유했다고 한다. 김기현 울산시장이 청와대 비서실에 ‘박대통령의 울산휴가’를 요청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지역경제를 걱정하는 대통령의 진정성에 굳이 토를 달 이유는 없다. 그러나 분주하지만 한가하게만 비치는 그런 내수 진작책이 과연 지역경제 활성화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여행을 통해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 그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누구는 저 멀리 카일라스 성산에 올라 ‘수정(水晶)’의 기운을 얻는가 하면 누구는 보잘 것 없는 동네 야산을 걸으면서도 똑같이 충만한 힘을 느낀다. 여행 혹은 휴가의 본질은 ‘어디’가 아니라 ‘어떻게’, ‘구속’이 아니라 ‘해방’에 있는 것이다. 해금강의 천태만상 기암괴석이 아무리 눈을 호강시킨들, 십리대숲의 대나무 군락이 아무리 삽상한 기운을 내뿜은들, 거기에 진정한 벗어남의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한갓 거짓 여행이요 반쪽 휴가일 뿐이다.

대통령의 일언일구는 천금의 무게를 지닌다. 그렇기에 더욱 진중하고 사려깊어야 한다. 지역경제 살리기 명분이 아무리 태산보다 크다 해도 특정 지역으로의 여행을 ‘강제’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국민은 지켜보고 있다. 당장 국무위원들은 대통령의 휴가지 권유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울며겨자먹기로 십대리 숲길을 거닐며 하기 싫은 숙제하듯 휴가 인증샷이라도 올릴 것인가. 아니면 눈 딱 감고 머나먼 이국으로 ‘창조여행’을 떠날 것인가. 휴가는 휴가답게 여행은 여행답게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낫다.

위기의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본격적인 조선업 구조조정으로 근로자들은 대규모 실직 상태에 내몰렸다. 13만명 넘게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가히 실업대란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어떻게든 실직을 줄이고 전직을 지원하고 상처난 마음을 어루만져 줘야 할 것 아닌가. 누구라도 나서 ‘뭣이 중헌디’라고 정색을 하며 물어야 할 판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11일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며 “구조조정 도시인 울산과 거제시에 지역대표가 참여하는 조선업 희망센터를 설치해 상생적인 구조조정이 이뤄지도록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도 지적했듯이 구조조정은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경제와도 깊이 연계되어 있는 일이다. 그런 만큼 노사 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와 주민들이 상생하는 구조조정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스페인의 ‘창조도시’ 빌바오처럼 조선·철강업 침체로 위기를 맞았지만 주민들과 지자체가 힘을 모아 문화관광도시로 거듭난 사례도 있고 보면 돌파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역관광 활성화도 좋지만 구조조정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실직 위기자’부터 먼저 구해내야 한다. 박 대통령으로 하여금 십리대숲을 걷도록 하는 것도 좋지만 곧 가동될 ‘조선업 희망센터’ 운영부터 만전을 기하길 바란다. 하루하루 부대끼며 살아가는 벼랑에 선 이들에게 절망보다 못한 가짜 희망을 안겨줄 순 없지 않은가.

<논설주간 ·김종면 前 서울신문 수석논설위원  jmkjm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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