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진의 리뷰] '국보', 혈통을 넘어선 재능과 예술혼의 마스터피스

2025-11-19     심우진 기자
▲'국보' ⓒ미디어캐슬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1964년, 가부키 명문가 당주 한지로(와타나베 켄)는 나가사키 지역 타치바나파 야쿠자 두목 곤고로(나가세 마사토시)가 주최하는 신년회에 참석한다.

그곳에서 한지로는 곤고로의 아들 키쿠오(쿠로카와 소야)의 '세키노토'(궁녀로 변장한 공주가 문지기로 위장한 악인에게 복수하는 이야기)의 간이 가부키 공연을 보게 된다. 순간 한지로는 키쿠오의 타고난 '온나가타'(女形, 남자 배우가 여성을 연기하는 것)'재능에 매료되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하지만, 공연 직후 야쿠자 조직 간 전쟁이 일어나 신년회는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결국, 어린 나이에 눈앞에서 아버지를 잃게 된 키쿠오. 그는 비참한 마음을 억누르며 복수를 다짐하기도 하지만, 한지로에게 거두어져 가부키 세계에 정식 입문한다. 

▲'국보' ⓒ미디어캐슬

그렇게 키쿠오는 평생의 라이벌이자 둘도 없는 친구가 될 한지로의 아들 슌스케(코시야마 케이타츠)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키쿠오는 스승 한지로에게 하나이 토이치로라는 예명을 받고 혹독한 배우 훈련을 받는다. 

슌스케의 어머니 사치코(테라지마 시노부)는 키쿠오를 가문 견습생으로 거두는 것에 반발하면서도 남편의 뜻에 따른다. 사치코 또한 키쿠오의 놀라운 재능을 이내 알아차리지만, 3대 한지로의 이름을 물려받아야 할 아들 슌스케의 입지가 흔들릴 것을 내심 염려한다.

대선배이자 당대 최고 가부키 배우 만기쿠(타나카 민)에게 인사하러 갔던 키쿠오와 슌스케는 그의 '백로 아가씨' 공연을 보고 공포와 경외심을 동시에 느낀다. 키쿠오는 만기쿠가 얻은 '인간 국보' 타이틀이 '겉치레'가 아님을 절절히 통감하며 넋을 놓고 그의 공연을 지켜본다.

▲'국보' ⓒ미디어캐슬

1972년, 성인이 된 키쿠오(요시자와 료)와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 콤비의 가부키 공연은 나날이 인기를 더하고 메이저 극장인 미야코좌 데뷔까지 제안받게 된다. 하지만 기뻐하는 키쿠오에게 흥행주관사 직원 타케노(미우라 타카히로)는 "결국 억울하게 끝나는 건 너"라며 직설적으로 조언한다.

그의 말대로 세습 기반인 가부키 세계는 냉정했다. 키쿠오에게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지만, 슌스케처럼 자신을 지켜줄 피가 없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우정과 질투의 양가감정 속에서 엇갈린 길을 걷게 된다.

▲'국보' ⓒ미디어캐슬

이상일 감독의 영화 '국보'는 '악인'(2010), '분노'(2016)에 이어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요시다 슈이치는 3년간 가부키 무대에서 '쿠로고(黒衣)'로 일했던 자신의 경험을 녹여내 소설을 완성했다. 이번 작품은 청소년기부터 장년기까지 주인공 기쿠오의 인생 속에 휘몰아쳤던 고통과 희생 그리고 욕망의 반세기 세월을 담았다. 

가부키는 17세기 초 일본 교토에서 생겨났다. 당시 새로운 이 예능은 큰 인기를 끌었지만, 풍기 문란을 이유로 여성이 무대에 서는 것을 금지했다. 이로 인해 남자 배우가 여성을 연기하는 온나가타가 생겨나면서 독특한 무대 예술로 발전한다. 

▲'국보' ⓒ미디어캐슬

가부키는 노가쿠와 함께 한국 관객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본 전통 예술 공연이다. 따라서 이 영화 속에서 온나가타 연기를 하는 남자 배우들의 가성과 몸동작이 처음에는 어색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곧바로 이상일 감독의 정서적 리얼리즘 추구와 배우 연기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집요한 연출에 압도당한다. 여기에 배우들이 1년 넘게 연습하며 전심전력을 다 해 만들어낸 화려한 가부키 공연 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폭발적 감정의 순간들을 맞이하며 깊숙이 몰입하게 된다.

천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1993)를 감명 깊게 봤다는 이상일 감독. 그의 영화 '국보'에는 결이 다른 감정의 소용돌이가 있다. 이상일 감독 자신이 재일교포 3세 한국인으로서 일본 사회 안에서 경계인으로 살아왔듯이, 작품 속 키쿠오 또한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혈통의 장벽과 차별을 견디며 살아간다. 키쿠오 뿐만이 아니다. 슌스케 역시 정식 후계자라는 타고난 핏줄의 짐을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국보' ⓒ미디어캐슬

그런 가운데 혈통의 틀을 깬 '소네자키 동반 자살' 공연을 앞둔 키쿠오. 떨고 있는 자신을 다독이는 슌스케에게 그의 피가 간절함을 고백한다. 하지만, 오히려 슌스케는 뛰어넘을 수 없는 키쿠오의 괴물같은 재능을 목도하며 끝없는 좌절감에 빠져든다. 

서로를 도둑질하고 싶은 두 사람은 결국 필연적인 운명의 갈림길에 접어든다. 눈을 뗄 수 없는 명장면과 교차편집의 연속인 이 시퀀스는 3시간에 가까운 영화의 한 가운데에서 완벽한 몰입감을 불어넣는다. 이후에도 쉼없이 후반부까지 캐릭터 아크와 감정의 격랑이 이어진다.

배우의 악마와 거래한 키쿠오는 인간 국보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대가를 지불한다. 그는 소꿉친구 하루에(타카하타 미츠키), 게이샤 후지코마(미카미 아이), 스승의 딸 아키코(모리 나나)에게 상처를 입힌다. 넘을 수 없는 핏줄의 독배를 마신 키쿠오는 결국 고립과 몰락의 끝자락에서 절규한다. 요시자와 료의 연기력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명장면이 펼쳐진다.

▲'국보' ⓒ미디어캐슬

물려받은 이름이 죄악이 되고 혈통이 저주가 됐을 때, 키쿠오와 슌스케는 다시 만난다. 지금까지 잔혹한 자기파괴를 거듭해온 두 사람은 진정한 콤비로서 장엄한 예술 그 자체가 된다.

카메라는 대중 앞에 선보이는 찬란하고 아름답기만한 무대 위 예술을 찍는 동시에, 결코 예술가 개인의 행복과 일치하지는 않는 무대 뒤편 모습을 집요하게 담아낸다. 재능과 실력이 최우선이 아닌 예술계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각도 마련해준다.

▲'국보' ⓒ미디어캐슬

여기에 더해 이상일 감독은 작품 속 가부키 공연을 등장인물의 감정 거울로 활용하면서 병행 서사를 이끌어 나간다. '렌지시'는 한지로와 슌스케의 피로 이어진 부자 관계를, '두 명의 등나무 아가씨'는 키쿠오와 슌스케가 함께 수련해온 시간을, '도죠지의 두 사람'에서는 둘의 우정과 위기를, 그리고 '소네자키 동반 자살'에서는 절절한 우정의 비애를 담아낸다. 마침내 '백로 아가씨'에 이르러서는 그토록 꿈꾸던 풍경을 보게 되는 키쿠오의 아름답고 찬연한 형상을 시각적으로 배치한다. 

▲'국보' ⓒ미디어캐슬

이 작품에서는 소마이 신지 감독의 '이사'(1993)로 데뷔한 이래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 늑대아이'(2012)의 각본을 맡았던 오쿠데라 사토코 작가의 섬세한 필력,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4)의 소피안 엘 파니 촬영감독이 그려내는 정교한 조명과 색채 감각을 경험할 수 있다. 또 '킬 빌' 시리즈의 타네다 요헤이 미술감독, 하라 마리히코 음악감독이 전통과 세대 그리고 예술의 무게를 진중하게 다루는 이 영화를 완벽하게 만들어 나간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일본에서 25년 만에 실사 영화 천만 관객을 돌파한 이상일 감독과 전통적인 세습의 틀을 뛰어넘어 인간 국보를 향하는 키쿠오의 모습이 닮아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재능으로 핏줄을 능가했다. 

감정의 진정성과 극적 장엄함을 동시에 전달하는 이상일 감독의 영화 '국보'는 혈통을 넘어선 재능과 예술혼을 향한 갈채를 담은 올해 최고의 마스터피스다. 오직 극장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전율과 감동을 안겨주는 이 작품은 '패왕별희'와 마찬가지로 명작으로 기억될 영화다. 엔딩에 흐르는 주제가 'Luminance'의 음악성이 영화적 여운을 더욱 완벽하게 완성한다.

▲'국보' ⓒ미디어캐슬

 

제목: 국보(国宝, KOKUHO)

감독: 이상일

각본: 오쿠데라 사토코

촬영: 소피안 엘 파니

미술: 타네다 요헤이

음악: 하라 마리히코

원작: 요시다 슈이치 [국보]

출연: 요시자와 료, 요코하마 류세이, 타카하타 미츠키 외

수입: 미디어캐슬

배급: NEW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74분 58초

개봉일: 2025년 11월 19일

평점: 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