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진의 리뷰] '세계의 주인', 절망하지 않는 인간 찬가의 파노라마

2025-10-22     심우진 기자
▲'세계의 주인' ⓒ바른손이앤에이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18살 여고생 주인(서수빈)은 누구보다 밝고 활발한 모범생이다. 하지만, 사과가 싫다며 담임인 보아(이상희)에게 장난을 칠 때도, 19금 웹툰을 그리는 단짝 유라(강채윤)를 비롯한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웃을 때도, 같은 반 수호(김정식)의 여동생 누리(박지윤)와 함께 있을 때도 그녀의 표정에는 알 수 없는 찰나의 공백이 있다.

주인의 하나뿐인 남동생 해인(이재희)은 학예회에서 누나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마술을 열심히 연습 중이다. 그러나 누나가 자신이 공들여 준비한 마술 공연에 오지 않을 것 같아 고민이 크다. 주인의 엄마 태선(장혜진)은 어린이집 원장이다.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주인을 다독이며, 19금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가 전문가라면서 딸에게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농담을 건넨다. 

▲'세계의 주인' ⓒ바른손이앤에이

주인은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과의 봉사활동에도 열심이다. 특히 같이 태권도장을 다녔던 미도(고민시)는 주인 못지않게 활달한 성격이라 두 사람은 친자매처럼 어울려 지낸다.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대한(이대연)은 출입문 비밀번호를 알려줄 정도로 주인을 각별하게 생각한다. 그녀의 주변은 일상적이고 평온하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은 수호가 주도하는 전교생 참여 서명운동에 반기를 든다. 서명지에 적혀 있는 내용이 크게 잘못됐다며 홀로 서명을 거부하는 주인. 어떻게든 설득해보려 애쓰는 수호에게 주인이 순간적으로 냅다 질러버린 한마디에 교실 전체가 술렁인다. 주인은 어색해진 분위기를 더 어색한 웃음으로 무마해보려 한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주인에게는 불편한 내용이 담긴 익명의 쪽지가 전달되기 시작한다.

▲'세계의 주인' ⓒ바른손이앤에이

교과서에도 수록된 장편 데뷔작 '우리들'(2016)로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 백상예술대상 영화각본상을 받았던 윤가은 감독이 '우리집'(2019)에 이어 6년 만에 내놓은 신작 '세계의 주인'은 관객을 다시 한번 놀라운 영화적 경험 속으로 안내한다.

윤 감독의 연출가로서의 탁월한 시선은 이번에도 작품을 또렷이 빛나게 한다. 카메라는 평범해 보이는 한 청소년의 일상을 자연스러우면서도 면밀하게 스케치해 나간다. 그러다 문득 스크린 귀퉁이로 빼꼼히 삐져나와 쭈뼛거리는 인물의 틈새를 기어코 관객이 발견하도록 만든다. 

▲'세계의 주인' ⓒ바른손이앤에이

이 영화는 엉뚱하고 당돌하게 시작해, 분절되고 파편화한 미스터리와 의문을 서서히 흩뿌려 나간다. 주인이 남자친구 찬우(김예창)를 대하는 태도, 친구 유라의 질문, 갑작스러운 미도의 격분, 집을 나간 아빠 기동(김석훈), 엄마 태선의 미묘한 표정, 동생 해인의 뜻 모를 행동 등 무엇 하나 그 속을 시원하게 내비치지 않는다. 모든 인물의 외재화 된 몸짓, 표정, 대사는 관찰자인 관객에게 궁금증을 자아낸다. 

▲'세계의 주인' ⓒ바른손이앤에이

여러 의문을 품게 하던 상상의 조각들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 비로소 관객 마음 안에서 재구성되고 합체된다. 그렇게 관객은 마침내 감춰진 이야기의 전말과 함께 그녀의 내면세계에 당도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세차장 시퀀스에서 엄마 태선 옆에 앉은 주인은 지금까지 말하지 못하고 꾹꾹 눌러 담아두었던 모든 감정을 투명하게 폭발시킨다. 대사, 연기, 촬영, 음향의 영화적 결합이 최고조에 이르는 이 영화의 명장면이다. 

▲'세계의 주인' ⓒ바른손이앤에이

고통을 지나온 그녀의 꿋꿋한 외면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결코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기로 결심한 자신의 내면 의지다. 상처를 완전히 잊을 수는 없지만, 당당한 그녀의 인생과 영혼은 파괴되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 어둠을 힘껏 떨쳐내고 밝은 일상이 가득한 자신의 세계를 지배해 나간다. 결코 해체되지 않을 가족의 힘도 버팀의 큰 양분이 돼준다. 특히 누나 주인의 상처를 사라지게 하고 싶은 동생 해인의 간절함이 밝혀질 때 콧등이 시큰해져 온다. 

▲'세계의 주인' ⓒ바른손이앤에이

윤가은 감독은 이야기가 결말로 향할 때 등장인물들의 모든 행동과 대사를 다시 처음부터 곱씹게 만드는 마술을 부린다. 클리셰를 비틀며 관객의 예측을 빗나가게 하기도 한다. 다소 해체주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요소들이 결합해 주인에게 더 이상의 비극과 불안이 다가오지 않게 막아선다. 저 너머의 추악한 존재들에게는 목소리조차 허락되지 않도록 꼼꼼하게 단절해 두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2023)에서처럼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인물의 내면을 파고 든다. 그리고 따뜻한 시선으로 사건을 구성해나가는 윤가은 감독만의 연출 솜씨는 놀랍도록 정교하다. 

주인이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과에 대해 윤가은 감독은 "삶에서 피할 수 없는 트라우마의 트리거일 수도 있고, 혹은 정말 싫어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사과의 의미는 관객 각자의 판단과 상상에 맡겨진다. 그런 우리의 상상 중에는 언젠가 사랑에 성공하게 될 주인의 미래 세계도 존재할 것이다.

윤가은 감독 스스로 작은 영화라고 겸양한 '세계의 주인'은 절망하지 않는 인간 찬가의 파노라마를 담은 올해 최고의 가장 큰 한국 영화로 남을 작품이다.

▲'세계의 주인' ⓒ바른손이앤에이

제목: 세계의 주인(The World of Love)

각본/감독: 윤가은

출연: 서수빈, 장혜진, 김정식, 강채윤, 이재희, 김예창

제공/배급: 바른손이앤에이

제작: 세모시, 볼미디어

개봉: 2025년 10월 22일

평점: 8.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