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어쩔수가없다' 박찬욱 감독 "남성성 분석·탐구하는 영화"
"현대 가부장제 사회의 남편·아빠·직장인 이야기"
"이병헌 장점은 순수함…백지상태 캐릭터서 시작"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항상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관객에게 선사해온 거장 박찬욱 감독이 신작 '어쩔수가없다'로 돌아왔다.
한반도 분단 현실을 다룬 '공동경비구역 JSA'(2000), 집요한 복수극을 다룬 '올드보이'(2003), 관능과 해방의 '아가씨'(2016), 애틋한 미스터리물인 '헤어질 결심'(2022) 등 매 작품마다 서사와 미장센 그리고 살아 숨쉬는 캐릭터를 교차시키며 한국 영화사의 지평을 넓혀온 박찬욱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특유의 세밀한 연출과 대담한 서사를 이어간다.
'어쩔수가없다'는 실직 가장 만수(이병헌)을 통해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 속에서의 불가피한 경쟁과 관계 균열을 지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아이러니를 정교하게 직조한 블랙코미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는 박 감독이 꾸준히 탐구해온 인간 죄의식과 구원 혹은 회복의 딜레마가 새로운 층위에서 변주된다.
또한, 기존 작품들과는 다른 결의 영화적 변화점으로 색다른 경험을 안겨주며 관객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안겨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SR타임스는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박찬욱 감독을 만나 영화 '어쩔수가없다'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이번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인 '어쩔수가없다'는 해외 관객의 호평을 받은 블랙코미디 영화다
외국인들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게 만든 부분은 없어요. 그렇다고 한국인만 아는 유머를 많이 쓰지도 않았죠. 그런 부분도 나름대로 영어 자막으로 웃을 수 있게 넣었습니다. 토론토 영화제 때도 정말 제가 의도한 순간마다 관객들이 다 웃어줘서 기분이 좋았어요. 언론 시사에서 웃음이 나온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그런데 베니스 영화제에서 고추잠자리 신 반응이 좋았습니다. (웃음)
Q. 촬영과 편집에서도 영화적 체험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김우형 촬영 감독과는 스토리보드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했어요. 토론토, 뉴잉글랜드 해외 로케이션 스카우트도 함께했고요. 서로 취향을 알기 때문에 함께 촬영한 건 처음이었지만, 몇 번 찍어본 사이처럼 팀워크는 잘 맞았어요. 김우형 촬영 감독은 조용한 사람이지만, 일에 관해서는 대담하고 용감한 시도를 하는데 거리낌이 없어요. 누구보다 과감하죠. '헤어질 결심'과 상반된 스타일을 원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잘 맞아서 재미있게 일했죠.
뭔가 주저하는 거 없이, 절제 없이 그냥 하고 싶은 거 다 합시다 했어요. 클로즈업이 크게 들어가고 싶다 하면 그렇게 들어가고, 카메라 움직임을 요동치게 하고 싶다면 또 그렇게 했죠.
전 어쩔 수 없이 구식인간이라 옛날 필름 시대 룩을 못 잃는 사람이에요. 필름 촬영을 시도했는데 한국에서는 어렵더라고요. 완전히 똑같은 상황을 디지털과 필름으로 찍어 비교해봤죠. 테스트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카메라, 렌즈, 조명, 색 보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전에 했던 어떤 영화보다도 필름 룩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색깔도 과감하게 썼고 명암 대비도 좀 다른 영화보다 많이 높였습니다. 여러 가지 시각적 강렬한 인상을 만들어냈죠.
'헤어질 결심' 때는 팬데믹 때문에 언제 개봉할지 몰라 편집을 오래 할 수 있었어요. 편집이란 오랫동안 하는 게 좋긴 좋더군요. 이번에는 그에 비해 절반의 시간 밖에 못 썼죠. 그래도 정말 치열하게 노력했습니다. 12시간 편집실에서 일하고 집에 가져와서도 메모하는 식으로 효율적으로 시간으로 쓰면서 아쉬움 없이 편집했어요.
길게 찍은 걸 압축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긴장감이 있어요. 훨씬 더 많이 찍은 뒤에 그걸 프레임 단위로 잘라내고 촘촘하게 편집할 때 생기는 미학이 있죠. 점프 컷도 많아져서 보는 재미가 있어요. 영화가 길더라도 긴장이 풀어지지 않는 그런 작품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늘 보던 것, 익숙한 것으로 구성을 할 것인가, 아니면 낯설게 만들 것인가 생각하죠. 저는 이미지들이 뭔가 예뻐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해요. 한 번도 촬영 감독이나 미술 감독한테 그런 말을 한 적 없어요.
제가 원하는 것은 좀 강하고 낯설고, 분명히 한국에서 찍었는데 저런 모습이 있나 싶게 만들고 싶어요.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가 우리의 이야기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떤 면에서는 꿈같고 어떤 면에서는 동화처럼 보이길 바랐습니다.
Q. '헤어질 결심'이 여성적인 영화였다면 '어쩔수가없다'는 남성적이다.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 영화에서는 광고판을 통해 위축된 남성성과 대비되는 여성성이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도 그런 요소가 있었나
저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고요. '헤어질 결심'은 확실히 여성적인 느낌이 어딘가 모르게 있죠. 박해일은 탕웨이와 대등한 주인공이고, 그렇지만 굉장히 초식남 같은 느낌이죠. (웃음) 그리고 좀 여백이 많은 영화였어요. 그래서 어딘가 모르게 시적인 느낌이 감돌죠.
근데 이 영화는 반대 스타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그냥 아주 꽉꽉 눌러 담은, 꽉 찬 영화입니다. 편집도 그렇고 프레임 안에 여백 없는 영화로 하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 시적이기보다는 산문적이죠.
미리와 아라가 나오지만, 어디까지나 만수의 이야기입니다. 만수가 제거할 대상들은 다 만수의 거울이나 분신 같은 면을 조금씩 공유하는 사람들이고요. 그래서 확실히 남성적이죠. 그리고 주제 자체가 '남성성에 대한 탐구'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었어요.
근데 그렇다고 해서 '남성적이다'라고 했을 때 뭔가 마초적인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건 아닌 건 아시겠죠? 남성적인 스타일이라는 게 뭔지 참 규정하기는 어려워요. 이 영화는 남성성에 대한 분석이라고도 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약간은 연민 어린 조롱 같은 것도 있고요.
특히, 현대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고 있는 남편, 아빠, 직장인의 이야기죠. 직장을 잃으면 자기 정체성이 송두리째 붕괴되는 것처럼 느끼는 그런 남자들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헤어질 결심'과는 참 다른 스타일이 됐죠.
Q. 환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경계가 모호한 장면들이 있다. 연출 의도가 궁금하다
우리가 '한국의 현실'이라고 말할 때는 사실 각자가 경험하는 좁은 범위 안에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영화에 나오는 저런 집이 실제로 있나?'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서울의 오래된 골목이나 지방 도시에는 그런 집들이 존재합니다. 저희가 촬영에 사용한 공간도 실제하는 장소였죠. 70년대 지어진 '불란서 주택'은 당시 천박한 취향이라며 건축가들에게 외면받았어요.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독특한 한국만의 스타일로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지금 보면 흥미롭고 멋스러워 보이기도 하죠. 댄스파티 역시 전혀 허구가 아니죠.
'현실성'이라는 개념을 더 폭넓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촬영과 미술을 통해 표현되느냐에 따라서 어느 순간, 현실은 조금 비틀리고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듯한 경계에 서게 됩니다. 제가 늘 추구하는 것도 바로 그 지점입니다.
영화 후반부에 아들의 꿈이 등장하거나, 만수가 취업한 뒤 공장에 첫 출근 장면에서 딸의 첼로 연주가 겹쳐지는 순간이 그렇습니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혹은 꿈인지 관객은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죠.
사실 공장 신 전체가 독특해요. 거기부터는 SF 영화 같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로봇들이 나오고 벌목 현장으로 마무리되잖아요. 현실과 꿈의 경계 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주게 되는 거죠.
Q. 원작에서는 만수가 제거해야 할 대상이 훨씬 많다. 이번 작품에서는 제거 대상 숫자가 줄어든 대신 각각의 인물 서사와 처한 환경, 집의 모양과 구조가 자세히 드러난다. 하지만, 차승원 배우가 맡은 시조는 다른 인물들보다 그런 부분이 많이 생략된 느낌이 드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시간 때문에 모두 다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죠. 시리즈로 만들지 않는 한 어쩔 수가 없죠. 그리고 제가 관객 입장으로 생각해봤어요. 처음에 3명을 죽인다고 표적 사진하고 순서까지 다 정리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범 모를 죽이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리는데 그럼 두 명이 더 남았는데 이들은 언제 다 죽이지 싶은 생각이 드는 거죠. 그래서 시조는 놀랄 만큼 빨리 처리됩니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 전개에 탄력이 붙는 거죠.
Q. 만수가 법무 부부의 말을 따라 하는 부분이 있다. 관련된 만수 캐릭터 설정이 있다면
남처럼 느껴지지 않아서죠. 범모는 자기 분신 같고 자기 부부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미리와의 대화에서 범모와 아라의 말을 자꾸 인용하는 거죠.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에 뭔가 적는 행동은 사실 만수가 말주변이 좋거나 임기응변이 뛰어난 인물이 아니라서 그래요. 뭔가 준비를 안 하면 초조하고, 말하다가 까먹을까 봐 몰래 보는 거죠. 만수가 서툰 사람이고 제지업계 일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보이길 원했습니다.
마지막 문 제지에서의 면접 장면에서는 청산유수처럼 술술 말이 나와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이죠. 분명 후회나 죄책감도 있겠지만, 살인 행각을 거치면서 만수가 자신감을 회복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만수를 마냥 사랑할 수만은 없죠.
아들이 경찰에 끌려갔을 때 부분은 원작에도 있는 건데 제가 가장 좋아했던 요소라 영화에도 썼습니다.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아들 문제를 그렇게 잘 처리하지 못했을 거예요. 아들에게 거짓말을 시키죠. 부도덕하게 위증하라고 강요하는 그 자신감은 살인을 성공한 것에서 얻은 것이죠.
아들을 대하는 모습에서 자기는 남자가 된 것 같고, 진짜 아빠가 된 것 같고, 가장의 위상을 되찾은 것 같죠. 그러다 사과나무를 심으면서 아들에게 담배를 건네는 실수를 합니다. 쿨한 아빠 흉내를 내는 거예요. "네가 스스로 버려라" 하고 멋있는 아빠 놀이에 도취된 거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멋진 아빠 논리에 취해 저지른 실수가 결국 파국으로 이어지죠.
면접 장면에서 손바닥에 아무것도 안 적고 멋지게 말하는 모습도 사실은 그 연장 선상이에요. 그런데 면접 후반부에 가면 소등 시스템이라는 말에 당황하고 질문에 대해 다시 쪼그라들어요. 공장에 가서도 로봇과 AI에 압도당해 위축되고, 길 잃은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어리바리하게 퇴장하는 거죠.
Q. 영화 속 배롱나무와 온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원에 강한 인상을 주는 나무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오래된 배롱나무는 운동을 많이 한 남자의 동물적인 근육질을 연상시키죠. 근데 꽃은 너무 아름답고요. 그 대비가 아주 흥미롭죠. 만수가 자기 집, 정원 꾸미기, 식물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미지로 쓴 게 배롱나무였어요.
온실은 만수의 성격과 역사를 다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돼지 농장을 했을 때 지은 집인데 그 시절에는 제법 잘 살았던 거죠. 그런데 집안이 몰락하면서 집을 팔고 여기저기 이사 다니다가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다시 샀어요. 온실은 남자이자 남편인 만수의 로망을 성취한 공간인 거죠. 범모에게는 음악감상실이 있는 것처럼요. 그런데 그런 곳을 다 팔고 뺏겨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거죠. 그래서 만수의 행동 배경을 보면 그 부분이 가장 중요했던 겁니다.
Q. 대사는 어떤 점에 중점을 뒀는지 궁금하다. 재미있는 작명이나 언어유희 같은 부분도 많이 느껴진다
글 쓸 때 관객에게 들려주는 설명적인 대사를 쓰면 안 된다고 하죠. 관객에게 들려주는 대사가 아니라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대사여야 합니다. 그런 대사가 모여서 관객들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게 유도해야 하는 거죠.
시각 요소에서나 편집에서나 주저 없이 이것저것 다 하고 싶은 걸 한 것처럼 대사도 재미있게 했습니다. 대부분 제 아이디어였고 재미있게 한국화하는 과정에서 이자혜 작가가 함께했어요. 이경미 작가도 그런 걸 많이 가져왔어요. 미리가 만수에게 "너도 잘 생겼잖아"라고 하는 대사 같은 거죠.
Q. 이병헌 배우와 함께 국내 유명 배우들을 중심으로 캐스팅한 이유가 있다면
이병헌 배우는 인간적으로나 직업인으로나 그의 장점은 굉장히 순수한 사람이라는 거죠. 잡념이나 고정관념이 별로 없어요. 독선이나 아집도 없고 심지어 정치적 견해도 그런 편이죠. 그래서 영화를 시작할 때 백지상태에서 시작할 수 있는 배우입니다. 예를 들어 이 상황에서 이럴 수 있지 않을까 할 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말을 별로 안 합니다. 아마 그동안 인간관계 속에서 관찰하면서 모인 정보가 방대해서 그럴 수도 있겠죠.
그리고 표현력이 굉장히 뛰어나죠. 표정이 다양하고 몸짓도 다양해서 영화 속 대부분 장면에 등장해도 지겹지가 않아요. 예를 들자면 보통 피아니스트가 88개 건반을 가지고 치잖아요. 이병헌 배우 경우는 한 300개 건반에다 손가락도 한 30개인 피아니스트 같은 거죠.
영화에서 여러 인물이 시퀀스에 나왔다 빠져야 하니까 그런 이병헌 배우와 대등하게 느껴지는 굉장히 잘 알려진 배우들이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야 잠깐 나와도 그 시퀀스를 완전히 장악할 테니까요.
Q. 전작들과 비교해 볼 때 블랙코미디 요소가 상당히 많이 채워진 작품이다
원작을 읽을 때부터 이 영화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준 건 '모던 타임즈'입니다. 자본주의 시스템 속 톱니바퀴 같은 개인의 이야기죠. 그래서 만수의 코미디는 대부분 어리석거나 어설퍼요. 그게 바로 이 영화의 비극적 원인이니까요.
해고됐다는 것 자체가 비극입니다. 그런데 아라의 말처럼 실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실직에 어떻게 대처하는가가 문제죠. 그 대처를 할 때 가족을 지키는 길로 살인을 선택한다는 사고방식이 어리석어요. 그리고 숙련된 노동자지만 새로운 임무를 수행할 때는 완전 초보라 실수하고 허둥지둥하는 코미디가 나오는데 거기서 연민도 생기게 되는 거죠.
Q. 손예진 배우가 연기한 미리는 원작과 비교해 크게 차별화되어있다. 염혜란 배우의 아라 캐릭터는 미리에서 분리된 팜 파탈 분신처럼 느껴졌다. 둘 다 영화 안에서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로 존재한다
원작보다 제가 더 강조한 건 남성성의 문제였어요. 그런데 그걸 효과적으로 묘사하려면 대비되는 인물들이 필요하죠. 이게 자칫 잘못하면 '우리들의 아빠는 다 불쌍하다' 혹은 '가장은 다 희생자다' 같은 식의 영화가 될 수 있잖아요. 저는 그런 식으로 흐르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균형을 잡아줄 수 있는, 보다 현실적인 시야를 가진 여성 인물이 필요했죠.
그 역할이 바로 미리였어요. 물론 미리라고 해서 완벽한 인간은 아닙니다. 그녀도 잘못이 있고 결함이 있죠. 하지만 남편보다 훨씬 성숙하고 시야가 넓은 인물이에요. 제가 결정적인 대사라고 생각했던 건, 미리가 남편에게 "당신이 무슨 안 좋은 일을 해도 그건 나도 같이하는 거야, 알았어"라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실제로 미리는 잘못한 일이 없어요. 살인에 직접적인 책임도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왜 그렇게까지 행동하는지 짐작할 수 있고, 거기에는 자기 책임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책임이 없어도 있다고 여기는 태도, 그것이 성숙한 삶의 방식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건 남편에 대한 연민이기도 하죠. 남편이 원래 악마 같은 사람은 아닌데, 왜 그렇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결국 자기 때문, 자기와 자식들 때문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돼요.
실제로 완전히 책임이 없는 건 또 아니니까요. 비 오는 날 뾰족한 우산 쓰고 가다가…라는 결정적인 영감을 주잖아요. (웃음) 하여튼 이런저런 면에서 미리는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만수의 입장에서 아라를 관찰하다 보면 자기 아내가 떠오르는 거죠. '와이프도 저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요. 남편의 실직 상태를 견디면서, 속으로는 정말 맨발로 미친 사람처럼 산이고 들이고 뛰어다니고 싶어 하지 않을까 또는 키 크고 젊고 유능하고 멋있는 남자 오진호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생기고요.
그래서 남편들끼리 연결된 점, 아내들끼리 연결된 점이 다 있어요. 언뜻 보기에는 미리와 아라가 아주 상반된 캐릭터 같지만, 사실은 겹치는 지점이 있죠. 말씀하신 대로 미리의 내면에도 춤추는 걸 좋아하는 면이 있듯이, 아라는 연극배우로서 뭔가 표현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에요. 결국, 미리의 어떤 측면이 과장되어 현실에 나타난 캐릭터가 아라라고 할 수 있죠.
Q. 만수의 살인이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인지, 관객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도 중요한 부분이다
그게 제일 중요한 포인트였어요. 이병헌 씨와도 그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제가 가장 강조한 것은 너무 납득이 잘 되도록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고, 그런 쪽으로 설득했습니다. 왜냐면 배우는 관객이 공감해주고 자신을 따라와 주길 바라니까 계속 그런 점을 걱정했어요. '저 정도면 세 사람쯤은 죽일 만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들 수는 없죠. 누가 그걸 용납할 수 있겠어요.
사실 영화적으로 이해하게 할 수 있는 훨씬 쉬운 길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딸 리원이 첼로 교습 때문이 아니라, 죽을병에 걸려 장기 이식이 절실하다든지 또는 빚이 너무 많아 당장 재취업하지 못하면 누가 굶어 죽는다든지 하는 설정을 하면 되는 거죠. 그렇게 하면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 포인트는 그런 상황이 아닌데 살인하는 사람은 도대체 뭐냐는 거죠. 그 질문을 영화 보는 내내 관객들이 질문하길 바랐습니다. 호소력 있는 눈빛과 표정으로 이병헌 배우가 '계속 저를 응원해 주세요. 저의 마음 이해하시겠죠?'라는 식으로 계속 끌어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카메라가 약간 거리를 두고 관찰하면 '저게 맞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나 내 감정을 투사한 주인공이 더는 도덕적으로 전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면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들었으면 했어요.
제일 대표적인 장면이 만수가 범모에게 "돈을 못 벌면 집이라도 팔아. 마트 가서 짐이라도 날라"라고 하는 부분이죠. 관객은 그게 바르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런데 만수는 왜 그렇게 안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잖아요. 사실 만수는 자기 자신도 알고 있으므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만수의 도덕적인 딜레마가 뭔지 다 알고 있는 상황 속에서 '너는 왜 그렇게 안 해?'라고 관객이 질문할 수 있는 상황을 계속해서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