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下> 반도체, 대기업 경쟁 속 中企 '생존기로'
올해 국내 반도체 업계는 불확실성의 안갯속을 지날 것으로 보인다. 국내 정치 불안에 따른 환율 상승,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미·중 분쟁 격화, 대외 수요 약화 요인 등 지난해 말부터 이어진 변수들로 올해 국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 수출의 주력 품목인 반도체와 관련 업계의 행보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 <편집자주>
[SRT(에스알 타임스) 윤서연 기자] 국내 반도체 업계의 올해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반도체 기업 양대산맥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각 AI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고대역폭 메모리(HBM)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지만 중국 시장 의존도가 높은 반도체 소부장 기업들은 불확실한 대내외 환경 속에서 위기감이 더해지고 있다.
◆ SK하이닉스, '삼각동맹' 주력…삼성전자 '고전'
SK하이닉스는 일찌감치 엔비디아, TSMC와 삼각동맹을 맺고 HBM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AI' 훈풍을 타고 호실적도 기록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2024년 한 해 벌어들인 영업이익만 23조원을 넘어섰다.
반면 삼성전자는 AI 시장 대응에서 경쟁사 대비 뒤처졌다는 평가와 함께 실적도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 8일 공개된 지난해 4분기 잠정실적에서도 암울한 성적표를 받아 올해도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 연결기준 매출 75조원, 영업이익 6조5,000억원으로, 전기 대비 매출 5.18%, 영업이익은 29.19% 감소하며 시장 전망치를 하회했다.
업계에서는 반도체(DS) 부문의 경영 악화를 실적 부진의 주요 원인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는 부문별 실적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증권가는 DS부문이 3조원 안팎의 영업이익을 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분위기를 반전시킬 카드인 엔비디아 퀄테스트(품질검증) 통과는 해를 넘긴 지금까지 별다른 소식이 들리지 않는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현재 엔비디아에 5세대 HBM 제품인 HBM3E 8단과 12단을 납품하기 위해 테스트를 진행 중이다.
이와 관련해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지난 7일(현지시간) 기자간담회에서 "현재 테스트 중이며, (삼성이) 성공할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하면서도 "삼성은 설계를 새로 해야 한다"며 공개적으로 설계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반면 SK하이닉스는 HBM 시장에서 엔비디아, TSMC와 강력한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SK하이닉스의 5세대 HBM은 엔비디아의 AI GPU에 탑재되며 시장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확보했다. 특히 TSMC와의 협력을 통해 생산 공정을 최적화하고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한 점이 강점으로 평가된다.
AI 반도체 시장에서 SK하이닉스의 동맹 구도에 밀려 고전하고 있는 삼성전자는 최근 파운드리 투자 규모를 줄이는 등 효율화에 나섰지만 대형 고객사 수주 지연과 수율 확보에 대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TSMC와의 협업 가능성도 내비쳤지만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는 지난달 자서전 출간 기념 대만 언론 기자간담회에서 “이건희 선대회장이 메모리 사업을 하고 싶어했고 협력하자고 했지만, TSMC가 삼성과 협력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며 협업 가능성에 선을 그었다.
◆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 틈새시장 공략해야
국내 반도체 중소·소부장 업체들의 생존환경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소부장 내재화율은 30%에 불과하다. 대기업들이 글로벌 협력망과 자본력을 바탕으로 국제적 변수에 대응하고 있는 반면 중소 소부장 업체들은 지정학적 리스크와 글로벌 동맹에서 소외되며 생존의 위기를 맞고 있다.
다만 미국은 자국 내 제조 역량 강화를 목표로 대만의 TSMC 의존도를 낮추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어 국내 기업들에게 기회가 제공될 수 있을 전망이다.
관련 업계 관계자는 "아직 확실하게 미국의 대중국 규제 정책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선단 공정에 대한 규제가 언급되고 있는 데다 TSMC에 대한 사용을 지양하는 경향이 있다 보니, 삼성전자와 파트너십을 노리는 업체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미국 빅테크들과 삼성전자와의 협력이 공고해질 경우 국내 소부장 업체들에게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자사 제품의 고도화를 위해 주로 해외 주요 기업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만큼 정부가 국내 소부장 육성을 위한 테스트베드 조성과 국가 산업단지 개발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는 3월에는 SK하이닉스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내 첫 번째 팹이 착공될 예정이며, 미니팹 구축 사업도 본격화될 전망이다. 미니팹은 소형화된 반도체 제조 공정을 통해 중소업체들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된 시설이다. 다만 이러한 정책적 지원에도 불구, 최근 반도체 인력 부족 심화 현상에 더해 첨단 공정 기술 개발 등 남은 과제는 산적해 있어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해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에서도 최근 인재 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는 있지만 소부장 업체로 취업하려는 인력은 많지 않은 게 현실"이라며 "정부나 대기업에서 중소기업, 소부장 업체와의 협력, 기술 개발 지원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수림 대신증권 연구원은 “빅테크 업체들의 엔비디아 칩에 대한 수요는 올해도 강력하게 지속될 전망이나 방대한 워크로드(작업량)로 비용 부담이 발생하는 연산에 있어서는 메모리와 연산 구조를 간소화해 설계가 가능한 주문형 반도체(ASIC)를 활용해 효율화를 추구해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며 “이는 국내 소부장기업들에게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