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MBC 방송 화면 캡처
 
연예인도 ‘공인(公人)’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연예인 스스로 ‘공인’이라고 지칭하는 것에 역겨움을 느낀다. 마치 자신이 사회적으로 대단한 가치와 비중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랑하는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주로 저널리즘에서 사용하는‘공인’또는 ‘공적 인물’은 사회적 언어이다.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공직자나 공무원을 일컫는다. 이 말의 의미가 확대되어 사회적으로 널리 명성을 얻거나 공론의 장에 자발적으로 관련된 사람까지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다. 언론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 개인에게는 엄격한 초상권과 사생활보호권을 완화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사회적으로 널리 명성을 얻거나’라는 측면에서는 연예인은 ‘공인’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공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공인은 ‘지위’라기보다는 역할과 책임을 의미한다. 공직자가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사사로이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정직하고, 모범적이어야 하듯이 연예인도 공인이라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그의 명성, 그것에 따른 영향력과 경제적 이익이 국민들의 관심과 지지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도덕한 행동이나 비양심적인 모습에 국민과 언론이 가혹한 비판을 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역시 여기에 있다. 하물며 인기(명성)을 이용해 사람들을 속이고, 그래놓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면 말해 무엇하랴. 
 
가수 조영남씨의 그림 대작(代作)이 논란이다. 그가 지금까지 그렸다고 하는, 한 점에 많게는 수 천 만원씩 주고 팔아먹은 그림이 다른 사람을 시켜 그린 것이었다는 폭로가 나왔다. 진위는 검찰의 수사로 밝혀지겠지만, 실제 대작 한 사람(송기창)의 진술이고, 그가 구체적인 증거(문자기록)까지 제시했고, 당사자인 조영남씨의 반응과 가수로서의 지금까지의 그의 행적으로 미루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공인의 여부, 예술가로서의 양심의 문제를 떠나 남이 그린 그림을 마지막에 ‘젓가락만 얹어’ 자기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명백한 ‘사기’다. 더구나 그것이 인기를 이용해 상업적 이익을 볼 목적이었다면 비난이 아니라 처벌을 받아야 할 범법 행위이다. 이전에 스스로 공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람들 앞에 나와 사실여부를 솔직히 밝히면서 결백을 주장하거나, 엎드려 사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어떤가. 이번 사건을 해프닝 취급하면서 그림의 소재를 빗대 “어른들이 화투 가지고 놀면 안 된다고 했는데, 너무 오래 가지고 놀다가 쫄딱 망했다"고 너스레나 떨고 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태도가 천박하기 그지없다. 더욱 어이없는 것은 대작이 미술계의‘관행’이라면서 검찰 조사를 비웃고, 해괴한 현대미술의 논리로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바보취급하면서 오히려 그를 옹호하는 한 문화평론가의 반전 독설이다. 
 
그의 말대로 “대작(代作)이 관행”이라고 하자. 그렇다고 그것이 옳고, 모두가 그렇게 해도 괜찮은 것은 아니다. 그도 말했듯이 “관행이 보통 과거로부터 널리 행해져왔으나 이제는 없어져야 할 어떤 것”이라면 나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적어도 예술가로서의 양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를 외면하고 ‘관행’에 편승했다면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한다. 작가로서의 책임과 양심 문제이고, 그런 작품은 예술이 아니라 사기이기 때문이다. 정말 자신의 열정과 상상력, 혼을 다해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와 그 지망생들이 분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다. 누가 그렸건 그림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남이 그린 그림을 내 것으로 속이거나, 내 그림을 남의 것으로 위장하는 것은 예술을 ‘쓰레기’로 만드는 짓이다. 문제는 그 쓰레기조차 유명세를 타고, 아니면 협잡에 의해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조영남 사건은 그림을 그리는 자나 그것을 대하는 자의 한심한 태도와 기준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그림을 높은 가격에 사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가 그렇게 열심히 작품을 내놓고, 전시회까지 잇따라 열었을까. 그들은 정말 그의 그림에 매력을 느껴 거액을 주고 샀을까. 아니면 단지 그가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산 것일까. 그림을 보는 눈은 제각각이니 어느 한쪽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후자도 많을 것이다. 
 
그들에게 그림은 과시용이다. 그들에게는 누구의 그림, 얼마를 주고 산 그림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은 그림이 아니라, ‘스타’의 이름과 돈을 벽에 걸어놓는 셈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예술적 취향이나, 그림의 예술성은 전혀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 이런 천박함이 이번 사건을 낳았고, ‘관행’이란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게 만들었으며, 미술에까지 스며든 싸구려 문화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누군가 “그림은 시”라고 했다. 시가 웃을 일이다. 
 
<주필ㆍ국민대 겸임교수ㆍ前 한국일보 논설위원/ guriq@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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