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시습 시선 (金時習詩選)

김시습 지음 | 이승수 옮김  | 한국,시 | 지식을만드는지식 펴냄│192쪽│16,500원

 

 

[SR(에스알)타임스 장의식 기자] 어려서 천재로 이름을 날렸지만 24세에 세상을 등지고 방랑한다. 출가해 승려가 되었지만 뿌리 깊이 박힌 유교의 가르침을 버리지 못한다. 자기모순으로 인한 방황과 고뇌 가운데 유독 그의 마음을 끈 곳이 있으니 바로 경주다. 김시습의 시 가운데 경주와 관련한 작품을 엮었다.

‘명성은 일찍부터 컸지만 하루아침에 세상을 도피했고, 마음은 유자(儒者)이면서 행적은 불자(佛子)이니 시대에 괴상하게 보일 것’으로 생각해 고의로 미친 짓을 함으로써 사실을 엄폐하려 했다.

1582년 이이(李珥, 1536∼1584)가 선조의 명을 받아 지은 <김시습전>의 한 구절이다. 심유적불(心儒迹佛) 네 글자에는 김시습의 숱한 방황과 깊은 고뇌가 모두 담겨 있다. 이이는 김시습의 일생을 자기모순과 자아 분열로 간파한 것이다. 김시습은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 사회 부적응자이자 시대의 이방인으로 일컬어지는데, 그 근본 원인은 세계와 마주하기 이전 스스로 자아의 분열을 이겨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종의 죽음은 여러 해를 두고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으로 속이 흉흉하던 김시습에게 모종의 결단을 촉구했다. 그는 갑자기 승려가 되어 여행을 떠난다. 이후 김시습의 삶은 여행의 연속이었다. “반생 길 위를 집 삼아 보냈으니, 만수천산이 눈 아래 호사로워라(半生長以路爲家, 萬水千山眼底賖).” 7년 정도의 여행 끝에 견문이 많아지고 지식은 단단해졌지만 몸은 무척 지쳤다. 지친 그를 편안하게 품어 준 곳이 경주, 즉 신라였다. 그는 여기서 7년의 긴 안식을 가진다.

1583년 간행된 개주갑인자(改鑄甲寅字)본 ≪매월당집≫ 권12의 <유금오록>에는 106제 146수의 시가 실려 있다. 금오산에 거처를 두고 있던 시절에 지은 작품들이다.

전체 106제 146수의 시 중에서, 일부 추정을 포함하면 경주에 머물면서 경주의 풍물이나 생활을 읊은 시는 69제 100수다. 본서는 이중 63제 76수를 번역하고 해설을 붙인 것이다. 경주에서 지은 시는 대부분 포함하되 연작시의 경우 일부만을 실었다. 1465년 한양에서 지은 <금오산을 그리며(憶故山)>(72)와 <시주받은 돈으로 모두 책을 사서 금오산으로 돌아가다(所嚫貲財 盡買圖書 還故山)>(73) 두 수는 당시 김시습의 금오산에 대한 애정을 잘 보여 주고 있어 뽑아 넣었다.

경주 시절 김시습은 폐허에서 신라를 거니는 시간 여행자였다. 그는 심신이 지친 몸으로 경주를 찾았고, 경주의 빈터와 허물어진 전각, 기운 탑과 훼손된 불상, 그 위에 서려 있는 먼 옛날의 사연들이 그 황량한 속을 어루만져 주었다. 김시습은 오랜만에 심신의 안식을 찾았고, 그 따스한 둥지에서 ≪금오신화≫가 태어났다. 경주를 찾는 이가 이 책을 들면, 550년 전 경주의 풍경과 그 속을 거니는 나그네와 이들 사이에서 빚어진 시경(詩境)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읽으며 외로운 천재와 함께 천년 고도 경주를 거닐어 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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