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의 한 장면. ⓒ SR타임스
▲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의 한 장면. ⓒ SR타임스

인간이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누구나 이런 꿈을 꾼다. 삶에 ‘후회’가 많으면 많을수록.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은 지나간 삶을 다시 선택하고, 그 선택으로 지금과 다른 현재와 미래를 만들 기회를 가진다는 얘기다. 그 욕망이 허구와 상상 속에서나마 과거를 바꾸는 소설과 영화들이 계속 나오는가 보다. 그럴듯한 과학적 논리를 동원하든, 엉터리 주술을 쓰든 상관없다. 시간, 횟수도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가상’에 불과하니까.

일본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서 산골마을 이토모리에 사는 여고생 미츠하는 어느 날 꿈에 서로 몸이 바뀌면서 3년의 시간을 넘나든다. 영화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 팀(도널 글리슨)은 가문의 전통적 초능력으로 어두운 곳에서 눈을 감고 주먹을 쥐면 돌아가고 싶은 시간으로 몇 번이고 다시 간다.

프랑스 작가 기욤 뮈소의 소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와 그것을 원작으로 만든 홍지영 감독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폐암으로 죽음 앞둔, 초로의 소아과 의사가 과거를 바꾸기 위해 캄보디아 노인이 준 이상한 알약을 먹고 30년 전의 자신을 만나러 간다. 과거로 돌아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생명을 살린다.

그러나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시간을 되롤리는 것은 삶과 역사를 뒤흔들고,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선(線)이고 흐름이다. 누구도 정지시키거나, 건너뛰거나, 늦출 수 없다.‘벤자민의 시계’처럼 거꾸로 갈 수도 없고, 소설과 영화에서처럼 제멋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없다.

시간은 차별하지 않는다. 언제, 누구에게나 같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인공은 지구보다 시간이 수 천 배 느린 은하계를 만나지만, 설령 그런 곳이 있다한들 인간이 갈 수 없으니 의미가 없다. 시간이야말로 일회성의 절대 불변인지도 모른다. 과거는 과거에 현재이고, 현재는 미래의 과거이다. 현재는 과거의 연속이고, 삶은 그 위에서의 선택의 결과이다.

정말 ‘기적’이 일어나, 아니면 이론에 불과한 과학이 현실화해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현재의‘내’가 과거로 돌아가 그때와 다른 선택을 하고, 그것으로 미래까지 바꾼다고 행복할까. 누구도 자신할 수 없다. 새로운 선택과 삶에도 여전히 후회와 미련은 남을 것이다.

▲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포스터 ⓒ SR타임스
▲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포스터 ⓒ SR타임스

세상에 또 하나의 ‘나’나 아바타가 존재하지 않는 한 인간은 두 개의 시간과 삶을 동시에 선택하고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기회만 있다고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도 아니다.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처럼 과거로 돌아기를 반복도 끝내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듯.

삶은 시간이 쌓인 것이다. 그것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삶을 쌓는다는 것은 지금을 지우는 일이다. 그것을 알기에 과거로 돌아가 인생을 다시 살고 싶지도, 설령 간다고 해도 그때와 다른 선택을 하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의 주인공도 그 때문에 과거를 완전히 바꾸지 않고 절반의 선택만 한다.

그래서 시간여행의 영화와 소설은 지금과 다른 선택의 달콤한 환상만 주지 않는다. 그보다는 인생에서 이미 결정된 것을 바꾸려 하지 말고, 이제부터 과거가 될 현재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고, 소중한 것들을 놓치지 말라고 충고한다.

누구도 인생에서 최고의 선택을 알 수 없다. 신은 우리에게 그런 능력은 주지 않았다. 다만 살면서 매 순간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고 소중하고 선택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런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아직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만들어야 한다. 어리석고 비겁하게 과거여행이나 꿈꾸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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