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슨. ⓒ워터홀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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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인간다운 세상이 되기 위해 필요한 편견 없는 소통에 관한 이야기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영국은 아동복지 정책을 선도적으로 실현한 나라다. 1601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구빈법을 제정하면서 종교기관이 아닌 국가가 아동복지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후 영국은 18세기 들어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노동자 인권이 대두되어 1802년 노동법인 공장법이 만들어진다. 그런 와중에도 아이들은 방직 공장에서 가축처럼 혹사당해 죽음에 이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842년에는 아동과 여성의 광산노동 금지법이, 1889년에는 아동학대 방지법이 제정된다.

이미 19세기부터 영국 정부는 가정에 합법적으로 개입해 부모에게 학대받으며 강제노동, 성매매에 동원된 아이들을 도왔으며, 위탁부모 제도를 도입했다.

▲리슨. ⓒ워터홀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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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동복지 선진국으로 알려졌던 영국은 2000년 '빅토리아 클림비 학대 사망 사건'으로 큰 충격에 빠진다. 잔인한 학대 속에 장기 손상으로 사망한 9살 소녀에 대한 영국 국민의 애도와 자책이 이어졌다. 정부를 비난하는 분노의 목소리는 높았다.

이 사건을 기록한 2003년 '로드 래밍 보고서'는 기존 아동 보호 체계하에서 사회시스템이 12번의 기회를 놓쳤다고 지적했다. 영국은 그제야 아동 보호 체계를 뜯어고치기 시작했고 2018년에는 '절대적 수준의 아동 보호'를 목표로 법을 개편했다. 영국 정부는 같은 사건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촘촘한 사회적 아동 보호 시스템을 추구하려고 노력한다.

▲리슨. ⓒ워터홀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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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진화한 영국 아동 보호법에도 문제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강제 입양' 제도의 오작동이다.

영국은 종교적인 이유로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미혼모를 중죄인 취급해 왔다. 종교기관은 미혼모를 강제수용해 속죄라는 이름으로 중노동을 시켰다. 그리고 아이를 빼앗아 강제 입양시켰다. 입양기관은 양부모에게 아이 한 명당 1,000파운드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인 1940년대부터 시작해 1970년대까지 약 50만명 이상의 미혼모 자녀들에게 이 같은 일이 일어났다. 강제 입양은 영국을 비롯해 영연방국가인 캐나다, 아일랜드, 호주, 뉴질랜드에서도 행해졌다.

2009년 출간된 '필로미나의 잃어버린 아이'를 원작으로 한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영화 '필로미나의 기적'(2013)은 그 당시 강제 입양으로 아들과 생이별한 미혼모 이야기를 다뤘다. 이러한 강제 입양과 관련해 엔다 케니 아일랜드 총리와 빈센트 니콜스 영국 추기경은 공식적으로 과거 피해자들에게 사과했다.

▲리슨. ⓒ워터홀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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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와 아이를 떼어놓는 강제 입양

그러함에도 영국의 강제 입양은 현재 진행형 상태다.

제77회 베니스국제영화제 미래의 사자상과 심사위원 특별상 2관왕에 빛나는 아나 로샤 감독의 영화 '리슨'은 그런 현실을 건조한 시선으로 차분하게 카메라에 담는다.

(이 리뷰는 영화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벨라(루시아 모니즈)와 조타(루벤 가르시아)는 런던 교외에서 아이 셋과 함께 살며 팍팍한 삶을 이어 나가고 있는 가난한 포르투갈 이민자 부부다.

일용직으로 일하던 조타는 임금이 체불된 채 실직 상태에 놓여있다. 그나마 아내 벨라 혼자 청소 도우미로 일하고 있지만, 갓난아이를 포함한 다섯 식구가 생활하기에는 벌이가 턱없이 부족하다.

▲리슨. ⓒ워터홀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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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딸 루(메이지 슬라이)에게는 청각장애가 있다. 보청기가 고장 났지만, 새것을 사줄 형편이 못 된다. 영국은 환자가 경제문제와 관계없이 무상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국가보건서비스(NHS) 제도를 운영한다. 청각장애인 경우 보청기를 무상 지원한다. 하지만 루 가족은 무상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 장기할부로 사보려 해도 고정수입 증명이나 보증인이 있어야 했다. 루는 엄마가 일하는 동안 보청기 없이 유치원에 맡겨진다.

복지국 직원이 방문하는 날, 루와 함께 집에 돌아온 벨라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당장 짐을 싸 떠나야 한다며 남편 조타를 닦달한다.

영국은 '절대적인 수준의 아동 보호'를 목표로 하는 나라다. 그래서 벨라는 위기를 직감하고 있었다.

유치원 교사는 보청기가 없으면 루와 같은 아이들은 위험한 상황에 빠진다며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루는 자기 몸에 난 멍 자국을 확인하는 의료진과 소통에 문제가 있었다. 이 상황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뻔했다.

▲리슨. ⓒ워터홀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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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회복지국 직원이 경찰과 함께 집에 들이닥친다. "나는 좋은 엄마예요"라며 아이들을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벨라. 하지만 남편과 함께 아동학대 혐의를 받게 된 그녀는 이미 보호자 자격을 박탈당한 것과 마찬가지. 조타는 서류에 서명하지 않고 벨라는 끝까지 저항한다. 하지만 자식들을 전부 빼앗긴다.

영화는 루 가족 모습을 아름답고 예쁘게만 담으려 하지 않는다. 절박함에서 스며 나오는 인간적 단점이나 어두운 면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미화 하지 않는다.

돈이 궁한 벨라가 가게에서 몰래 식료품을 훔치는 사이에 그녀의 아이들은 골목에 방치된다. 벨라는 남편을 의심하고 싸우기도 한다. 이 가족에 대한 사회복지국의 판단이 옳은 걸까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한다.

그러나 곧 깨닫게 된다. 벨라는 현실 속 진짜 어머니의 모습이다. 대부분의 어머니는 벨라처럼 자식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격정적이면서도 숭고한 모성을 지녔다.

▲리슨. ⓒ워터홀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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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는 이제 젖이 나와도 먹일 아이가 없다. 세 아이를 한꺼번에 빼앗긴 벨라는 격양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다. 딸 루와의 수어를 금지하고 규정만 내세우는 관료와 싸운다. 이곳저곳에서 갈등을 일으킨다. 사회복지국은 그녀에게 '공격적'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그러나 벨라의 주장만큼은 매우 합리적이고 정당했다.

아동 보호를 위해 빼곡하게 만들어놓은 규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루 가족을 끊임없이 학대하고 괴롭힌다. 아이들은 부모와 생이별하는 것뿐만 아니라 형제끼리도 뿔뿔이 흩어져 강제 입양 당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영화에서는 강제 입양이 결정되면 돌이킬 수 없다고 설명한다. 영국법은 강제 입양된 가정유지를 흔드는 어떠한 시도도 아동 보호에 반하는 위법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풍족하지는 않아도 서로 사랑하는 이 가족의 진실을 들어주려 하는 이는 영국 제도권 안에서 찾을 수 없었다. 루 가족은 마치 나치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처럼 모순의 총알을 피해 어둠 속에서 자력으로 자신들을 구원해야 했다.

▲리슨. ⓒ워터홀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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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회의 비극

아동학대 방지법과 입양기관을 통한 입양제도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사회복지제도다. 이 제도의 순기능 덕분에 많은 아동이 폭력과 학대로부터 생명을 구했고 새 가정에서 행복을 되찾았다.

그러나 영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의 아동 보호제도에는 불합리함이 존재한다. 이 영화와 달리 우리나라 경우는 학대 부모와 아동을 분리하는데 소극적이다.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를 목격하더라도 개인 가정사라며 간섭을 꺼리는 인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유·아동 대상 범죄에 대해서는 항소심에서 원심보다 형량이 경감되는 사례도 다수다. 지난달 2심이 진행된 '정인이 학대 사망 사건' 또한 그랬다.

이 영화를 보면서 '만약 학대당하던 아이가 루가 다니던 유치원에 맡겨졌다면'이라는 가정을 해볼 경우, 영국식 아동 보호법에도 분명 합리적인 부분이 있다.

▲리슨. ⓒ워터홀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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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결코 입양제도 자체를 탓하지 않는다. 문제는 입양의 선한 취지와 목적을 벗어난 강제 입양 방식에 있다. 사회복지국은 루가 정말 학대를 당했는지를 합리적으로 조사하지 않는다. 부모인 벨라와 조타가 루를 학대했다고 답을 정해 놓고 강제 입양을 진행한다.

루 가족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편견을 버리지 않고 자신들의 귀를 막는다. 법정에 선 벨라는 자기 자신조차 놀랄 만큼 당당한 논리로 너무나도 당연한 진실에 귀 기울이지 않는 영국 아동 보호 체계를 비판한다.

사회복지국 직원들은 악역 위치에 놓여있다. 하지만 그들도 분명 규정된 프로토콜 안에서만 움직여야만 한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말단 공무원의 권한은 제한적이다.

그래서 영화 '리슨'은 벨라의 입을 통해 우리 사회가 편견을 버릴 것, 분명한 모순과 맹점을 외면하지 말 것, 용기를 내 진실된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당부한다.

이 영화는 아주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강제 입양이라는 용어를 안 썼을 뿐 한국에서도 미혼모의 아이들을 물건처럼 해외에 수출했던 과거가 있다.

비극은 우리 곁에 항상 존재한다. 그래서 국가는 인간성을 외면한 법과 제도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 '리슨'은 현명한 소통이 가져올 더 나은 복지사회를 위해, 그리고 우리가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 곱씹어 봐야 할 메시지를 담은, 반드시 봐야할 영화 중 하나다.

▲리슨. ⓒ워터홀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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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리슨(원제: LISTEN)

◆ 관람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 러닝 타임: 78분

◆ 개봉일: 12월 9일

◆ 감독: 아나 로샤

◆ 출연: 루시아 모니즈, 메이지 슬라이, 소피아 마일즈, 루벤 가르시아

◆ 수입·배급: 워터홀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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