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카우. ⓒ영화사 진진
▲퍼스트 카우. ⓒ영화사 진진

- 미니멀리즘 서사 속 진중한 우정 이야기

[SRT(에스알 타임스) 심우진 기자] '초원의 강'(1994)으로 데뷔한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올드 조이'(2006), '웬디와 루시'(2008), '믹의 지름길'(2010), '어둠 속에서'(2013), '어떤 여자들'(2016) 등 '미국 독립 영화의 기둥'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묵묵히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해왔다.

조나단 레이몬드의 단편 소설 '더 하프 라이프(The Half Life)'를 원작으로 하는 '퍼스트 카우'(2019)는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국내 첫 극장 개봉작이다. 그녀의 전작들처럼 이 영화 또한 미니멀리즘 스토리텔링을 고수하고 있으며 사회 비주류층에 초점을 맞추는 특징을 갖추고 있다.

▲퍼스트 카우. ⓒ영화사 진진
▲퍼스트 카우. ⓒ영화사 진진

(이 리뷰에는 영화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세기 황금광 시대 미국 서부에는 온갖 사람들이 몰려든다. 본명인 오티스 피고위츠보다는 쿠키(존 마가로)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그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쿠키는 모피 사냥꾼 무리를 따라다니면서 식량 조달과 식사를 책임지고 있다. 하지만 총도 없이 맨손으로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 그가 숲에서 구할 수 있는 음식이라고는 기껏해야 버섯이 전부다. 유대인에다 서열도 밀리는 쿠키는 사냥꾼 무리 안에서 위협에 가까운 투덜거림을 듣기 일쑤다.

그러던 어느 날 쿠키는 나체로 수풀 속에 몰래 숨어있던 동양인 남자를 만난다. 쿠키는 비록 생면부지지만 굶주린 상태로 추위에 떨고 있는 그에게 기꺼이 담요와 함께 아껴 둔 음식을 건넨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이 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킹 루(오리온 리)이며 아메리칸 인디언이 아닌 중국인이라고 밝힌다.

▲퍼스트 카우. ⓒ영화사 진진
▲퍼스트 카우. ⓒ영화사 진진

천사같이 선량한 마음을 가진 쿠키는 러시아인들에게 잡히면 죽을 운명인 킹 루의 사연을 듣자 외면하지 못하고 몰래 그를 자기 천막에 데려와 재워준다. 다음날 킹 루는 이별 인사도 없이 사라진다.

몇 해가 지나 오리건의 한 마을에 도착한 쿠키는 그곳에서 우연히 킹 루와 재회한다. 이번에는 킹 루가 집 없이 야영하는 쿠키에게 근사하지는 않지만, 몸 뉠 곳은 있는 작은 오두막집을 거처로 제공한다.

중국 광동성에서 출발해 온갖 곳을 돌아다니다 겨우 오리건에 정착한 킹 루는 이곳이 사람 손이 타지 않은 새로운 곳이며 가능성 있는 기회의 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쿠키는 킹 루의 말에 반신반의한다.

▲퍼스트 카우.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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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낡은 가죽 부츠에도 사람들이 눈독을 들일 만큼 모든 것이 부족한 이곳에 최초로 우유를 짤 수 있는 암소 한 마리가 들어온다. 이 마을 최고의 권력자인 영국인 팩터 대장(토비 존스)이 홍차에 우유를 타 마시려고 주문한 젖소였다.

젖소는 킹 루가 말한 성공의 가능성과 기회가 되어준다. 사업수완과 추진력이 강한 킹 루와 의기투합한 쿠키는 한밤중에 몰래 젖소에서 우유를 짜낸다. 그렇게 훔친 우유로 쿠키는 뛰어난 요리 솜씨를 발휘해 빵을 만든다.

우유가 들어가 풍미가 뛰어난 쿠키의 '고향의 맛' 빵은 사람들이 줄 서서 사 먹을 만큼 마을에서 큰 인기를 끈다. 하지만 훔친 우유로 빵을 만드는 것이 발각되면 두 사람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게 뻔했다. 그래도 그들은 꿈을 위해 돈을 포기할 수 없었다.

▲퍼스트 카우. ⓒ영화사 진진
▲퍼스트 카우. ⓒ영화사 진진

윌리엄 블레이크의 '지옥의 격언' 중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게는 우정"이라는 문구를 인용하면서 시작하는 영화 '퍼스트 카우'는 19세기 미국 서부 시대에 피어난 따뜻한 우정을 그린다.

데뷔작 '초원의 강'에 대해 켈리 라이카트 감독이 "로드 없는 로드 무비이자, 사랑 없는 사랑 이야기이며, 범죄 없는 범죄 이야기"라고 전한 것처럼 '퍼스트 카우' 또한 흔히 떠올리는 서부 영화와는 다른 내러티브를 가진다.

이 영화에는 스파게티 웨스턴에서 클리셰로 흔하게 등장하는 인디언의 습격도 은행강도도 포장마차도 없다. 카우보이모자를 쓴 건맨이 말을 타고 달리며 총을 난사하지도 않는다.

▲퍼스트 카우. ⓒ영화사 진진
▲퍼스트 카우. ⓒ영화사 진진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곤궁한 본토에서의 삶을 버리고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척박한 환경 속으로 뛰어든 이민자들 안에서도 소외된 계층인 유대인과 중국인이다. 계산이 빠른 유대인과 요리를 잘하는 중국인이라는 고정관념이 서로 뒤바뀐 쿠키와 킹 루는 함께 삶을 헤쳐나가며 우정을 쌓고 서로 연대한다. 뺏고 빼앗는 황금광 시대를 살아가는 약자인 그들이 약탈할 수 있는 것은 은행도 금광도 아닌 하얀 우유뿐이다. 놀랍게도 우유는 그들에게 황금이 되어준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땅을 빼앗아 식민지로 삼은 국가의 이미지를 대표하듯 등장하는 영국인 팩터 대장은 쿠키와 킹 루의 우유 도둑질을 결코 용납하지 못한다. 약탈자가 다른 약탈자에게 도둑질을 당하고는 분노해 뒤쫓는 아이러니는 풍자에 가깝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쿠키와 킹 루의 우정은 변함이 없다.

▲퍼스트 카우. ⓒ영화사 진진
▲퍼스트 카우. ⓒ영화사 진진

이 영화는 35mm 필름을 사용해 1.37:1의 아카데미 비율로 촬영됐다. 1:1에 가까운 화면비는 낡고 오래된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며 풍경의 미학을 신중하게 담아낸다.

이 진중한 영상 안에는 '프런티어 정신'과 ‘개척’이라는 단어로 미화된 침략과 약탈의 미국 건국 초기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 이야기 안에는 총 한 자루 없이 도망자로 살다 지쳐 대지에 누워 숨을 돌리는 주인공들이 있다.

그들의 육신이 백골이 되었든 그마저 삭아 흙이 되어버렸든 따뜻한 우정은 편히 대지에 스며든다. 우정이란 인간 인생에 있어 큰 축복이다.

◆ 제목: 퍼스트 카우(원제: First Cow)

◆ 관람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 러닝 타임: 122분

◆ 개봉일: 11월 4일

◆ 감독: 켈리 라이카트/출연: 존 마가로, 오리온 리/수입·배급: 영화사 진진

▲퍼스트 카우.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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